• 욥기 강해 (19)

    예정의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욥 [욥 9:3-12]
    2022.06.26 | 이수진 목사
    • 오늘은 예정의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욥의 말을 살펴보면서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예지 예정의 하나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을 독재자로 오해한 욥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욥 9:3~4)
      “쟁변하다”는 말은 “다투어 변론하다”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감히 창조주 하나님과 쟁변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 오직 순종과 경외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빛 자체이시고 완전한 분이시며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딤전 6:16, 요일 1:5, 신 32:4, 출 33:20).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은 지혜롭고 힘이 강하시기에 독재자처럼 마음대로 자신의 자녀들과 재물을 다 거둬가셨고 질병의 고통까지 주셨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모든 것을 거둬 가신 하나님 앞에 욥 자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도>에 담긴 구원의 섭리를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깊고 오묘한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셨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속죄의 제물로서 예수님을 만세 전에 예비하셨습니다(고전 2:7).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기만 하면 자신이 아담에게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인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원수 마귀 사단은 오히려 자기 꾀에 넘어가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도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죄도 자범죄도 없으니 죽임당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원수 마귀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였으니, 이로써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영계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원수 마귀는 법을 어긴 대가로 자신의 권세, 곧 사람을 주관하고 사망을 주장하는 권세를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죄가 없으시므로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셨고, 이러한 주님을 믿는 사람마다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분쇄하고 사망 권세를 깨뜨려 버리신 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강한 힘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처럼 사랑의 섭리가 담긴 하나님의 힘과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강한 힘과 지혜로써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사람이 강하고 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거역한다면 형통치 못하다 말하고 있지요.
      욥의 말대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형통한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렇게 바른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거역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여러 가지로 진리의 권면을 했는데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회개하려고도 하지 않았지요.


      2. 예정의 하나님으로 오해한 욥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욥 9:5~10)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지만 공연히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고 마음대로 옮긴다든가, 이유 없이 땅을 움직여 기둥을 흔드는 분은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정하시고 무조건 그 계획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 즉 ‘예정의 하나님’이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 자신은 의롭고 아무 잘못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예정 가운데 자신을 이렇게 무너뜨리셨다는 것입니다. 매사를 하나님께 책임 전가하는 모습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며 좋은 것 주기를 원하시는데,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무지했기에 여전히 자신은 까닭 없는 고난을 받는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셨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해와 달을 멈추게는 하셨지만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신 적은 없지요.
      밤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있는데 별자리마다 각자의 위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별들이 각각 위치에서 변함없이 있다는 의미를 ‘하나님께서 별들을 봉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은 마치 하나님의 주권으로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으신 것처럼 표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별 하나까지도 영계의 법칙에 맞추어 적절한 위치에 두셨습니다.
      북두성이란 큰곰자리의 북두칠성을, 묘성은 황소자리 성좌에 위치한 별무리를, 삼성은 오리온 별자리 중앙에 나란히 있는 세 개의 큰 별을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별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 모든 별들을 만드시되 그들 사이에 운행의 질서와 법칙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강하시므로 마음대로 별들을 봉하시며 온갖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것처럼, 욥에게도 예정 가운데 고난을 주셨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예정의 하나님이요, 두려운 하나님이요, 독재 자 같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지 예정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공의로운 재판관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정론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인류 역사와 인생의 생사화복 등 모든 것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 역시 이미 정해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한 번 구원받았다고 정해지면 그것이 끝까지 유효하다고 말하지요.
      반대로 예지 예정이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모든 것을 정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욥의 말처럼 예정의 하나님이시라면, 모든 사람의 구원의 여부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따라 무조건 정해 놓은 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실 이유가 없지요.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선택하신 것이 아니며, 누구든지 자유의지 가운데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정해 놓으신 예지 예정의 하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남방의 밀실”이란 이 땅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욥이 볼 때 북쪽보다는 남쪽이 따뜻하고 꽃도 많이 핍니다. 또 남쪽에서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니 욥은 ‘아마도 남방에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밀실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방의 밀실을 만드시고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고 표현한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애굽에 내린 열 재앙을 비롯하여,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등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인간 경작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이 시대에도 이 제단을 통해서 수많은 기사와 표적, 희한한 일과 기이한 일들을 펼쳐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예정 가운데 마음대로 주관하신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질서와 공의, 그리고 사랑 가운데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예정의 하나님이라 오해하고 있기에 자신 역시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가 아무 이유도 없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회개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3. 물음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나쁜 하나님으로 오해한 욥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욥 9:11~12)
      욥은 하나님이 본인 앞에 지나가셔도 알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느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 시대인 지금은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시는 일은 적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게 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기도에 응답을 체험하니 기쁨과 소망이 넘칩니다.
      성령님은 누구보다도 우리와 가까이 계셔서 말할 수 없이 따뜻한 사랑으로 안아 주시며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강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시면 방언의 은사도 임하고 유창한 방언도 합니다. 성령의 불세례가 임하면 뜨거움도 느끼며 치료도 받고 각종 은사도 받는 등 영적인 체험도 하지요. 말씀 안에 살아가는 만큼 성령의 역사 가운데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도 생겨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보호해 주시며,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면, 즉 성령이 역사하시면 느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러한 체험이 없고 느껴 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가 내 앞으로 지나가셔도 보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와 재물과 건강을 다 빼앗아 가져갔으니 나쁜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께 대해 “하나님, 어떻게 이처럼 막무가내로 빼앗아 가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도 없다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것을 빼앗아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게 해 주시고 두드리면 열어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욥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께 묻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형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꿈이나 환상, 성령의 음성, 영감으로 교통을 이루며 역사해 가시지요(암 3:7). 사랑의 간구, 의인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며, 우리의 물음에 귀찮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 기울이시고 자상하게 답해 주시는 분입니다. 시편 145편 18절에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시는도다”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중심으로 사모하고 구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구약 시대와 달리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시는 마지막 때이기에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성령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022-06-29 오전 10:52:07 Posted
      2022-07-01 오전 11:11:1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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