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계명(4)

    탐내지 말찌니라 [출 20:17]
    2019.03.24 | 정구영 목사
    • 지난 시간에는 열 번째 계명에서 ‘왜 탐심을 버리라고 하는가?’에 대해 탐심은 우상숭배 때문이라는 것을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의 예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 곧 우선순위의 문제에 대해 빌라도 총독과 사도 바울의 경우를 통해 증거하겠습니다.

      1. 왜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하는가

      지난 시간에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던 여로보암은 권력과 명예에 대한 탐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영육 간에 우상을 만들어 결국 자신과 가정, 북이스라엘 전체까지도 멸망으로 이끌어 갔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할까요? 그래야 우선순위가 제대로 잡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할 때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잘못됐을 때는 결국 비참한 삶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우선순위의 중요성에 대해 한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2. 우선순위의 문제

      하루는 시간 관리 전문가가 학생들에게 퀴즈를 냈습니다. 그는 큰 항아리를 꺼내 주먹만 한 돌들을 항아리 속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에 돌이 꽉 차자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물었더니 학생들은 “예” 하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정말 그럴까요?” 하며 그는 조그만 자갈을 꺼내 항아리에 집어넣고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되묻자, 자신 없는 목소리로 “글쎄요”라고 말했지요.
      이번에는 모래를 항아리에 붓고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물었습니다. 학생들이 “아니오.”라고 하자, 다음에는 물주전자를 꺼내어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실험이 끝난 후 강사는 학생들에게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물었습니다. 한 학생이 즉각 손을 들고 대답했지요. “당신의 스케줄이 꽉 찼더라도, 새로운 일을 그 사이에 추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즉시 부인을 한 후,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이 실험의 의미는, 만약 당신이 큰 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영원히 큰 돌을 넣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인생이라는 항아리 속에 가장 먼저 넣어야 할 큰 돌은 무엇입니까? 우선순위를 달리했을 때 사람의 삶이 이 땅에서의 삶과 저 세상에서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성경에 나오는 두 인물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3.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버린 빌라도 총독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심문을 당하고 다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집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풀어줄 수 있는 전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 주고자 하지요. 이는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죽이려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막 15:10). 그러나 유대인 군중들은 오히려 강도 바라바의 특사를 요구합니다. 할 수 없이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뒤,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다시 군중들 앞으로 끌고 가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석방을 시도해 보지만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진실을 알았지만 그 진리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총독의 위치가 우선순위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진리를 버리고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에게 사형 언도를 내립니다.

      성경에 나오는 빌라도의 행적만 보면 어쩌다 예수님을 재판하는 자가 되어 저주받은 이름이 되었는가 하고 억울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와 관련된 역사적 문헌을 살펴보면 빌라도의 진면목을 더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로마 군기 게양 사건입니다. 빌라도가 임기 첫 주 한밤중에 황제의 화상이 새겨진 로마 군기를 예루살렘에 게양합니다. 이를 반대하는 5천 명의 유대인 결사대가 물러서지 않자 결국 로마 군기를 내렸지요. 사실 로마 제국은 속주민들의 전통 종교를 존중해 주는 관용 정책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의 행동은 참으로 무례하고 악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로마 신이 새겨져 있는 금 방패를 가이사랴의 신전에 봉헌한 후, 예루살렘 성벽 서쪽 성문에 걸어놓은 사건입니다. 이번에도 유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려다가 굴욕을 당하고 말았지요.
      또한 예루살렘 수로 건설 사건이 있습니다. 빌라도는 수로 건설로 성전이 가장 큰 혜택을 받았으니 제반 경비를 제사장들에게 지불하라고 합니다. 제사장들은 세속적인 사업에 하나님의 헌금을 사용할 수 없다고 반발합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성전세를 급습해서 탈취해 갑니다. 분노한 유대인 군중은 거세게 항의했고, 이에 빌라도는 군대를 파견합니다. 이때 갈릴리에서 제사 지내기 위해서 왔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고, 그들의 피가 희생 제물의 피와 섞이게 되었지요(눅 13:1).
      이 밖에도 실로암 망대 붕괴 사건(눅 13:4), 사마리아인 학살 사건 등을 통해 빌라도의 심성과 그의 행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적 사실에 의하면 그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고, 그렇게 바랐던 총독의 자리를 몇 년 못 지켰다는 것과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저 세상에서는 어떠할까요? 아랫음부에서 3단계의 형벌 중 채찍에 의한 형벌을 받고 있으며, 이 땅에서 빌라도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지옥사자에 의해 채찍에 맞게 됩니다. 또한 죄 없는 예수님께 십자가 처형을 언도했기 때문에 저주의 상징으로 혀가 뽑혀 고통을 호소할 수도 없지요.
      빌라도에 있어서 우선순위는 이 세상에서의 영달이었습니다. 알면서도 진리를 버린 그의 최후는 결국 이 땅에서도 행복하지 못하고, 저 세상에서도 비참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자기를 버린 사도 바울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을 심히 핍박하던 바울을 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을까요? 그는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었지만, 일단 진리를 깨닫고 나면 변개치 않고 진리를 위해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을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께서 만나 주셨습니다. 강한 빛으로 인해 시력을 상실한 사울은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 기도를 올립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하시며 사울을 찾아가 그가 시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안수해 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회심한 사도 바울은 진리를 깨우친 이후, 자기가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진리를 향해 자기 생명을 바치게 됩니다. 또한 사도 바울에 의해 복음은 비로소 만방을 향해 펴져 나갈 수 있었고,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의 약 1/2이 사도 바울 한 사람에 의해 기록이 되었지요.
      이처럼 사도 바울이 주님의 기대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엄청난 사도로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사도 바울은 우선순위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선택을 했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다 보면 따라오는 것이 핍박과 환난입니다. 그 환난과 핍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을 보면 잘 나옵니다. 그는 아무리 많은 고난을 받아도 중심에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끊임없이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살았기에 고난은 잠깐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을 하나님의 영광과 상급을 바라보며 능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 죽음을 앞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이제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의 마음이 든 것도 아니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도 아니었습니다. 너무도 보고 싶고, 그 품에 안기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직접 뵈올 수 있다는 기쁨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올랐지요.
      그러면 빌라도와 사도 바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빌라도는 자기를 위해 진리를 버렸고, 사도 바울은 진리를 잡으려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렸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상급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지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탐심은 우상숭배라 했고(골 3:5), 탐욕을 부리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엡 5:5). 탐심은 언제든지 기회만 되면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등의 죄로 나아갈 수 있지요. 결론적으로 탐심을 버리라는 제10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면 제1~9계명을 범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의 죄성까지 다 빼내어 성결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계명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계에서 힘은 성결임을 깨달아 계명대로 지켜 행하며,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벗어 버리고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019-03-25 오후 11:17:22 Posted
      2019-04-09 오후 6:02:3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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