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기 강해 (6)

    욥을 판단, 정죄, 비판하는 엘리바스 [욥 4:1-11]
    2022.03.25 | 이수진 목사
    • 1. 감정적으로 욥을 책망하는 엘리바스

      욥이 자신의 생일과 부모를 원망하며 탄식하자,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듣다 못해 먼저 입을 엽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욥 4:1~2)
      여기서 염증이란 싫증나는 것을 말합니다. “너의 말을 들으니 내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충고 좀 해야겠다. 네가 나의 말에 싫증을 낸다 해도 나는 책망의 말을 해야겠다.” 이런 의미이지요. 엘리바스는 욥의 말이 비위에 거슬리고 감정이 상해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엘리바스의 행위 또한 진리에 합당치 않지요.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성내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약 1:19, 4:11~12, 마 7:1~2). 사람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 감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감정이 실리면 상대의 마음을 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날카로운 칼에 찔린 것처럼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여 힘을 잃을 수 있지요(잠 12:18). 꼭 필요한 권면을 한다 해도 상대의 마음과 입장을 헤아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할 때 상대가 감동을 받아 변화합니다. 상대에게 옳은 말을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선하고 지혜롭게 하느냐는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욥 4:3~5)
      예전에 욥은 정직한 삶을 살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바른 길로 이끌어 줄 수 있었습니다.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했다는 것은,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에게 삶의 의욕을 되찾을 수 있도록 권면하며 이끌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넘어져 가는 자’란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한 사람을 말합니다.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하거나 실연의 아픔을 당하거나 가정이 파괴되는 등 절망적인 현실 앞에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욥은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며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것입니다.
      욥이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다는 것은,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도움을 주고 힘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물질이 없는 사람에게는 물질로 공급해 주고, 양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양식으로 구제하는 등 실질적인 행함으로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힘든 상황을 만나니 답답해하며 욥이 교훈했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 버렸다며 엘리바스는 감정적으로 욥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2. 욥과 엘리바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점

      하나님께서는 욥의 탄식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충만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알려 주고 계십니다. 시험 환난이 왔을 때 신앙상태를 점검할 수 있으며 내 안의 중심과 참 신앙이 드러나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인정해 주실 때는 “하나님 사랑합니다.” 했는데, 혹여 내게 연단이 왔을 때도 여전히 그 고백이 동일하게 나오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모습이 항상 동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축복해 주실 때만 하나님 일에 충성한 것이 아닙니다. 매 맞고 핍박받고 감옥에 갇히고 오해받고 죽임을 당할 것 같은 위협 속에 있었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며 숱한 고난을 받았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고, 너무나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을 남겼지요(롬 8:35~39).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이러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다음으로 엘리바스의 모습에서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엘리바스는 이전에 욥으로부터 많은 교훈과 권면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욥을 존경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가 바라던 모습이 아닌 욥을 보니, 진리의 지식으로 욥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처럼 상대의 형편이 바뀌었다고 해서 예전에 받았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정적인 말로 책망하고 지적한다면 참사랑이 아니지요. 또 그러한 말로는 상대에게 깨우침이나 위로를 줄 수 없고 도리어 사단이 역사하여 상대의 감정을 더욱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령 내 생각이 옳다 해도 감정을 담아 말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온전히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사랑이 담긴 주님의 마음으로 대화할 때라야 성령이 역사하여 상대가 깨우치고 변화받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판단 정죄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욥 4:6)
      평소에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위가 완전하기를 소망하며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친구였기 때문에 평상시 욥과 대화를 하면서 욥의 이러한 소망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욥에게 막상 시험이 오고 고난이 닥치니 평소에 그가 했던 말과는 너무나 다른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엘리바스는 계속 욥의 티를 지적합니다.
      여기서 욥이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뢰했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다니엘처럼 어떤 상황,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질 줄 알면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기도를 올렸지요(단 6:10).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할 뿐이기에 사나 죽으나 오직 감사만 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의뢰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7)라고 욥에게 반문합니다. 이 말 자체는 진리 말씀입니다. 만일 어떤 재앙이나 사고,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죄 또는 불의라고 하는 근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롬 6:23, 골 3:25).
      문제는 이 말을 하는 엘리바스의 마음 중심입니다. 만일 시험과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당장 회개하십시오. 당신에게 죄가 있어서 그런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한다면 이는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찌르는 말이 되고 맙니다.

      또한 엘리바스가 욥에게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8)라고 한 말도 맞습니다. 악으로 밭을 갈고 독을 씨로 뿌렸으면 그 열매 역시 독의 열매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엘리바스가 욥의 마음이 그처럼 악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이어서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욥 4:9) 했는데, 여기서 입기운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콧김이란 하나님의 마음에 품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엘리바스는 “욥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네가 악으로 밭을 갈고 독으로 씨를 뿌렸으므로 네가 심은 그대로 독의 열매를 거둔 것이 틀림없구나!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멸망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품은 것으로 인해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라고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욥을 악인으로 정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옥토 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고,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악으로 밭을 간 것이 아니라 선으로 밭을 갈았던 사람이고, 독으로 씨를 뿌린 것도 아니었지요. 욥이 지금 원망하고 탄식하는 것은 마음밭이 악해서가 아니라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아직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욥 4:10~11)
      이는 엘리바스가 욥의 처지를 사자에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욥이 예전에는 부유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었지만 지금은 모든 걸 잃어버렸으니, 이러한 처지를 이가 부러진 젊은 사자, 늙어서 더 이상 사냥할 수 없는 사자에 비유한 것입니다.
      또한 이는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에 대한 말이기도 합니다. “짐승의 왕인 사자도 강할 때가 있으면 늙을 때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인간도 이런 때가 있으면 저런 때도 있는 법이다. 인간의 운명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이런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 속담에는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말이 있어서, 어려운 중에도 그냥 때를 기다리다 보면 좋은 날이 올 수도 있다 하고, 또 “팔자소관”이라며 인간의 운명은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모든 질병으로부터 지켜 주신다 했고(출 15:26), 우리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며,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아니하고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신 28:1~13).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갈 6:7).

      4. 먼저 내 안의 들보를 빼내야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들보’란 ‘마음속에 있는 큰 죄성’을 의미합니다. 먼저 내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내야 주님의 마음과 눈으로 모든 사람을 바라볼 수 있고 또 상대의 티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으면, 엘리바스처럼 악 속에서 지적하게 되니 상대에게 깨우침을 주기보다는 고통을 주고 실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상대가 아무리 거슬리는 행동을 해도 미움이나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덮어갑니다. 들보가 없으니 상대의 좋은 점만 보이고 그 신앙에 맞춰 이해하며 상대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기도해 주게 되지요.
      흠과 점과 티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의 허물을 지적하거나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를 베푸셨고 허물을 덮어 주시며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많은 죄와 허물을 용서받은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먼저는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마음에서 티를 빼는 데 힘쓰며, 더 나아가 서로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22-03-30 오후 7:21:47 Posted
      2022-04-01 오후 2:53:4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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