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국(42)

    3천층(7) [약1:12]
    2008.02.17 | 당회장 이재록 목사
    • 이 시간은 성경 인물 중에서 3천층에 들어간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율법에 비춰 온전했을지라도 마음의 성결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에 오시지 않은 구약시대였기 때문에 3천층에 들이셨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내주하시는 신약시대에는 반드시 마음의 성결을 이뤄야만 3천층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1. 노 아

      창세기 6:9에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기록된 것처럼, 노아는 당세에 완전한 자로서 홍수의 심판 후에 새로운 인간 경작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아도 새예루살렘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3천층에 머물게 됩니다. 홍수 심판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담대한 삶을 살았지만, 홍수 후 350년을 더 사는 동안은 그리 담대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홍수를 기점으로 이 땅의 사람들은 더욱 육으로 물들어 가면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육의 속성이 드러나는데, 노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홍수 이전 겉으로는 행함이 완전해 보인 노아도 홍수 이후에는 악의 모양이 서서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는 홍수 후 350년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결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마음 깊은 속까지 개간하는 인간 경작을 받았지만, 근본에 내재된 육의 속성까지는 다 벗지 못한 것입니다.

      노아는 아들 함이 자신의 허물을 전하자 저주했습니다. 물론 아들 함의 잘못이 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모습과 다윗을 비교해 보면, 그 마음의 선에서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연단을 받는 중에 시므이란 자에게 엄청난 저주와 모욕을 받았습니다. 이때 신하들은 심히 분노하여 시므이를 처치하려 했지만 다윗은 오히려 신하들을 만류했습니다. 잠잠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을 달게 받으려는 겸비한 마음이었습니다.

      다만 사무엘하 16:12 말씀처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과 아들 함을 저주한 노아의 마음은 선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홍수 이후 노아는 질서상 가장 머리된 자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노아가 자신의 부족함을 더 철저히 발견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노아시대 살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후손이기 때문에 혹여 어떤 말씀을 드리고 싶어도 심히 어려운 입장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높은 직분을 받아 머리가 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가 될수록 지적이나 권면해 주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스스로 더욱 자신을 낮추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아야지요. 아부나 칭찬만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 듣기 싫은 말도 내 영혼에 유익되면 기꺼이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노아에게는 이처럼 영혼에 유익되는 말을 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노아는 머리로서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에 그 말을 받지 못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노아가 생을 마칠 때에는 감사보다는 후회가 컸습니다. 스스로 돌아볼 때 성결을 이루지 못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구약시대 인물로서 율법의 기준에 비춰 볼 때는 당세 완전한 자로 인정을 받았고, 홍수 심판에서 방주를 예비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노아에게 3천층의 영광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2. 이 삭

      창세기 35:28-29에 이삭이 180세의 나이로 늙어 기운이 다해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창세기 25:7-8에 보면 아브라함 역시 175세의 나이로 기운이 진하여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죽음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록으로는 둘 다 나이 많아 기운이 다하여 죽은 것이지만 각각의 죽음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때가 되어 몸에서 기운이 빠지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눈이 흐리거나 몸이 쇠약해진 것도 아니고 숨을 거두기 전까지 강건한 몸을 유지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할 정도로 온전히 영의 마음을 이뤘기 때문에, 아프지 않음은 물론 이삭을 낳은 100세 때보다도 더 강건한 몸을 유지하며 산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경우에는 아브라함과는 달리 ‘늙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삭은 이미 오래 전부터 눈이 흐려 에서와 야곱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몸이 쇠약해져 말 그대로 늙어 죽은 것입니다. 물론 이삭도 어디가 병들어 아프거나 몸이 불편했던 것은 아닙니다. 육의 법칙에 따라 나이 들면서 몸이 점점 쇠약해져 결국 기운이 진하여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지난날의 많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비교하여 자신이 부족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노년에 더 많은 자녀를 낳으며 평안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아들 에서와 야곱의 갈등을 지켜보며 고통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아들 야곱과는 20년간이나 생이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들들의 갈등의 큰 원인은 아버지 이삭의 편애와 부족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아들의 갈등이 심화된 사건은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의 축복 기도를 받은 일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동생 야곱에게 있었지만, 이때도 이삭이 영의 마음을 가졌다면 문제가 그처럼 커지지 않았지요. 만일 이삭이 아브라함처럼 넓고 큰 영의 마음을 가졌다면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을 모두 살리는 방법을 찾았을 것입니다. 야곱도 자신의 아들이니 오히려 그 일로 야곱과 에서의 사이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썼겠지요. 그런데 에서를 편애하니 그의 편에서 바라보며 야곱만 탓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좋은 땅을 먼저 택해 갈 때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해서 좋은 땅을 택해 갔던 롯이 전쟁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롯에 대한 걱정과 함께 어찌하면 롯을 구할까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만약 육의 마음이었다면, ‘그것 봐라, 먼저 좋은 땅을 택해 가더니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지.’ 하며 모든 책임을 롯에게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훈련시킨 이들을 이끌고 직접 달려가서 롯을 구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으로 일군 영의 마음이며, 아버지 하나님을 닮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러한 영의 마음과는 달리 책임을 회피하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야곱을 원망하는 에서와 동조하여 함께 탓했지요. 그렇다고 이삭의 신앙이 수준에 못 미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번제로 드리고자 할 때도 그 뜻에 순종했고,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을 명심하여 행하려 노력했습니다. 나름대로 선한 마음을 이루며 믿음을 내보이며 살았습니다. 다만 아버지 아브라함과 비교할 때에 영으로 일군 정도의 차이가 났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삭은 새예루살렘에 이르지 못하고 3천층에 머물게 됩니다.

      3. 야 곱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가로챈 일이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대신해서 축복 기도를 받기도 했습니다. 비록 선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야곱은 나름대로 영적인 사모함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목표한 바는 꼭 이루어내는 곧은 중심을 가졌고, 근면, 성실, 끈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야곱에게 좋은 점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점이 많다 해도 ‘자기’를 깨트리지 않으면 하나님 편에서는 쓰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데 자기를 주장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철저히 ‘자기’를 깨트릴 수 있도록 연단해 가셨습니다. 형을 피해 외삼촌 집에서 20년을 사는 동안 지극히 낮아지는 시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마침내 얍복 강가에서 철저히 깨어집니다. 뒤로는 외삼촌과 언약을 맺어 돌아갈 수 없고 앞에는 형이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20년간 부지런히 일해서 모았던 모든 재물도 전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쌓은 모든 것을 다 무로 돌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철저히 의지하였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깨트려서 ‘지렁이 같은 야곱’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연단의 시간을 통해 중심의 간교한 속성도 뽑아냈습니다. 구약시대에 본성 깊이 내재된 죄성을 뽑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데 야곱은 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연단을 받은 야곱도 온전히 성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삭의 편애로 고통을 많이 받았으면서, 자신 역시 자녀를 편애했습니다. 특히 요셉을 심히 편애했는데, 이는 창세기 37:3에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야곱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하여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편애는 자녀 사이에 비극을 또 다시 불러 옵니다.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종으로 팔아 버린 것입니다. 요셉에게도 연단받을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된 일이긴 하지만, 문제의 원인은 야곱의 온전치 못한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독자 이삭이라도 주저함 없이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과 비교하면 야곱의 신앙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부족함이 있기에 야곱은 새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고 3천층에 머문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새예루살렘에 대해 증거하겠습니다.


      2008-02-18 오후 10:19:36 Posted
      2018-06-25 오후 5:15:40 Updated


    • 언어선택
    •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