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51)
본 론 /
1. 백 배의 축복을 받은 이삭
본문 12-14절 전반절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했습니다. 흉년을 피해 이주해 온 이삭이었지만 이처럼 이내 거부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이삭이 이처럼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 말씀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를 동원하고 사람의 방법으로 노력해도 결국 거두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본문에 이삭과 같은 축복을 받을 수가 없지요. 물론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에 세상 사람도 열심히 심고 가꾸면 심은 만큼은 거둘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얻었던 것처럼 백배로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더욱이 하나님의 지키심이 없다면 뜻하지 않은 자연의 재앙 등으로 인해 그나마 심은 대로도 거두지 못하는 일이 흔히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삭이 백배로 얻었다는 것은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의 보장하심과 지키심을 받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지요.
성경에도 보면 마 13:8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하여 최고로 받는 축복이 백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바로 이러한 백배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먼저 하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미 여러 차례 약속의 씨인 이삭을 축복하시겠다 약속하셨고 창 26:3-4에서는 이삭에게 거할 땅을 지시하시며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약속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대로 이루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삭이 백배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이삭 자신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그릇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 15:4-5에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말씀하셨지요. 이 외에도 성경 곳곳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겠다" 누누이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은 바로 이 말씀대로 행하였기에 약속된 복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신 7:12에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조상에게 약속하셨다 해도 그 후손이 하나님의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할 때라야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의 아비인 아브라함이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받았다 해도 만약 이삭이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을 지켜 행하지 않았다면 약속하신 축복이 결코 임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이삭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했기에 축복의 약속을 끌어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훌륭한 신앙의 푯대인 아비 아브라함을 보고 배워 순종해 나간 이삭
그렇다면 이삭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법도와 명령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원래부터 타고난 마음 밭이 좋아서였을까요? 물론 아브라함을 닮아 타고난 마음 밭이 좋은 것도 있겠지만 이삭에게는 누구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신앙의 푯대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아비인 아브라함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바로 아버지였기에 이삭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통해, 믿음이 무엇이고, 순종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나님의 법도와 명령을 지켜 나가야 하는지 세세한 분야까지도 보고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이삭은 자라면서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할 수가 있었고 이러한 기반 위에 스스로도 열심히 노력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나갔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누구를 푯대로 삼고 바라보며 달려가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조직이든 머리된 사람의 신앙이 중요하지요. 가정에서는 아빠와 엄마, 구역에서는 구역장, 조에서는 조장, 지역에서는 지역장, 교구에서는 교구장, 이런 식으로 그 조직의 머리된 사람이 먼저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에 속한 영혼들이 자연스럽게 본을 받아 바른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 하여 사람을 신앙의 푯대로 삼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 중에 온전한 사람을 찾기란 힘들지요. 그러니 사람을 보고 신앙생활을 했다가는 사람 사이의 관계로 인해 시험에 들거나 자칫 미혹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가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신앙의 본을 삼는 것도 반드시 진리 안에서만 가(可)한 것이지요.
결국 히 12:2 전반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한 대로 신앙의 온전한 푯대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그만큼 그 신앙이 온전하고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실 만했기에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고 자란 이삭 역시 신속히 믿음의 기초를 다지며 신앙의 성장을 이룰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신앙이 열매로 나와지는 사건이 이어지는 본문에 나옵니다.
3.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화평함을 좇은 이삭
14절 후반절-16절에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했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 편에서는 자기 족속도 아닌 이방인이 자신들의 땅에 들어와 살면서 그처럼 놀랍게 축복 받아 나가는 것을 보자 마음에서 시기가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것이 결국은 행함으로 나왔는데 이삭의 아비 아브라함 때에 아브라함의 종들이 파 놓았던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우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그 땅이 블레셋 사람들의 땅이라고는 하나 분명히 우물들은 이삭의 아비인 아브라함이 판 것이기에 엄격히 말하자면 그 우물에 대한 권리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에게도 있다고 할 수 있음에도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우는 너무나 무례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더욱이 이전에는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 사람이나 그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고까지 말했던 아비멜렉 왕도 이삭에게 "우리를 떠나가라" 하지요. 그 이유가 바로 이삭이 자신들보다 강성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삭이 얼마나 놀랍게 축복을 받았고 그 부와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이삭은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부와 명예와 권세도 있었지만 자신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음으로 이방인의 땅에 거하면서도 창대하고 왕성하게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이삭은 이처럼 강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운 일에 대해 전혀 따지거나 불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비멜렉 왕이 두려워할 만큼 강성한 이삭이었지만 이삭은 자신에게 해(害)를 입힌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힘을 가지고 어떻게 해 보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지요.
그래서 이삭은 아비멜렉 왕의 요청대로 순순히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아비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또 그곳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며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우물은 원래 이삭의 아비인 아브라함 때에 팠던 것으로서 이삭이 그 우물을 다시 파기 전까지는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메워진 채 버려져 있었지요. 즉 이삭이 다시 파기 전까지는 그곳의 목자들이 사용하지 못했던 우물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그처럼 버려진 우물들을 다시 파서 쓰려 하자 이제 와서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물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자 이삭은 그 우물을 포기하고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이번에도 역시 우물로 인해 다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찌하시겠는지요? 지금 이삭에게는 왕도 두려워할 만큼 강성한 힘과 권세가 있는 상태입니다. 거부(巨富)일 뿐만 아니라 노복 즉 부리는 종들도 심히 많았지요. 그러니 그 힘을 가지고 한번쯤 상대를 위협해서라도 자신이 판 우물을 지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러지를 않았지요. 다시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세번씩이나 양보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이삭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했던 아브라함의 신앙을 통해 배운 것이었지요. 이삭은 단지 배워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실제 삶 속에서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양보하려는 마음이었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화평하려는 마음이었으며 또한 모든 사람을 섬기려는 마음이었지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은 이방인의 땅에 거하면서 늘 주변의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 속에 화평함을 유지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힘이 강하다 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을 늘 섬기려는 마음이었지요.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그의 아들 이삭은 그대로 본받아 지금 행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을 좇는 길이며 하나님의 사람이 택하는 방법이지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유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자신의 유익이 걸리게 되면 선을 좇기 보다는 어떻게든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 합니다. 그래서 갖가지 악한 방법이 나오는 것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권세를 동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롬 12:21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롬 12:18에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말씀하고 있지요.
이삭의 행동이 육으로 보면 물러서는 것 같고 피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이삭이 그들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상대가 악으로 나온다고 해서 같이 악으로 대항하게 되면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지요. 결국 사람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의 방법을 좇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서 멋진 승리의 결과를 주시게 됩니다. 이삭이 바로 그러했지요. 그가 끝까지 선의 방법을 좇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4. 연단을 통해 이삭에게 더 넓은 땅으로 축복을 주신 하나님
이삭이 세 번씩이나 양보를 하고 또 다시 옮겨가서 우물을 팠을 때에는 그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때 이삭이 22절 후반절에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고백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연단을 허락하신 이유는 반드시 있으며 더 넓은 땅을 축복으로 주시기 위한 방법이었지요.
만약 우물로 인한 다툼이 없었다면 이삭은 그냥 그곳에서 안주했겠지만 다툼이 있었기 때문에 이삭은 그것을 피하여 계속 이동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결국에는 넓은 지경의 땅에 이르는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장 육으로 볼 때는 불통인 것 같고 지킴받지 못하며 보장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오히려 그것이 축복의 길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이삭의 아비 아브라함도 그 아내를 빼앗기는 일이 있었을 때에 그것이 겉으로 보면 불통인 것 같고 재앙을 만난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을 더 크게 축복하시고 아브라함의 이름을 확실히 심고 알리는 계기로 삼으셨던 것과 같지요.
그러므로 어떤 연단이나 시험이 왔을 때 물론 먼저는 자신에게 그러한 연단이나 시험이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고 점검해 보아야 하겠지만 만약 이유 없이 연단이나 시험이 왔을 때는 오직 감사함으로 선을 좇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축복을 위한 연단이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이삭은 연단이 왔을 때 그것을 온전히 선의 방법으로 통과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더 놀라운 축복을 주실 수가 있었던 것이고 그것에 대해 원수 마귀 사단도 전혀 송사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이러한 축복의 말씀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삭은 여호와 앞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림으로 언약의 말씀에 대한 확증을 얻는 과정을 밟은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다는 증거로서 이삭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은 것이지요.
저도 이러한 영계의 법칙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기로 정한 날이나 절기를 맞으면 결코 준비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평소에도 모든 예배 때마다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특별히 축복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을 때는 정성을 다해 힘껏 예물을 준비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며 축복받는 비결이지요.
이삭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렸던 아브라함으로부터 이러한 축복의 법칙을 배웠기 때문에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더 놀랍게 축복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증거로 나타난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이전에 이삭에게 자신들을 떠나라 했던 아비멜렉 왕이 친히 이삭을 찾아와 화친을 구하는 사건입니다.
5. 이삭에게 화친을 구하는 아비멜렉
아비멜렉은 날로 강성해지는 이삭을 보면서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니 이삭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떠나라 했었지요. 그렇게 떠난 이삭이 그 후로도 날로 강성해지는 것을 보면서 아비멜렉은 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28절 전반절에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이 고백하기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했던 것처럼 이삭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에 아비멜렉은 이러한 이삭이 더욱 두려워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혹여라도 이삭이 예전의 일로 인해 자신들을 해(害)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삭을 찾아와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하며 화친을 요청했던 것이지요. 물론 이삭에게는 예전의 일로 인해 아비멜렉을 해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아비멜렉은 만약 자신이 이삭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얼마든지 보복을 할 수 있는 마음이었기에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이삭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들이 예전에 이삭에게 선한 일만 했던 것처럼 말을 하지요. 29절에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말합니다. 어찌 보면 속이 뻔히 보이는 말과 행동을 보면서도 이삭은 끝까지 그들을 선으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결 론 /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중에 제대로 된 제자 한명을 키워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나마 모세에게는 여호수아가 있었고 엘리야에게는 엘리사가 있었으며 사도바울에게는 디모데 정도가 있었지만 한결같이 스승보다 나은 제자는 없었지요.
이삭도 그의 신앙 자체만을 본다면 훌륭한 신앙을 가졌다 말할 수 있지만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신앙에 비하면 그래도 부족한 것이 많지요. 그럼에도 이삭이 오늘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영향이 그만큼 컸습니다. 누구를 보며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했느냐가 이처럼 중요한 것이지요.
이와 함께 꼭 명심해야 할 것은 결국 신앙은 내 자신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가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해도 보고 듣고 가르침 받은 바를 스스로 행해 나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이삭은 아비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언약으로 인해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어진 면도 있지만 자신 스스로가 아브라함을 통해 가르침 받은 것을 그대로 행해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이 더 온전히 아비의 신앙을 본받아 마음 씀씀이 하나에서부터 모든 행함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닮아나갔다면 아브라함보다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 6:40에 보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비록 제자가 선생보다 나아질 수는 없다 해도 온전케 되어진다고 하면 선생과 같아질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제자가 선생과 같아진다고 해서 이것이 똑같아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영적인 세계는 끝이 없기 때문에 스승이 온 영이고 제자도 온 영으로 들어온다 해서 둘이 똑같은 것은 아니지요. 온 영으로 들어와서도 끝없이 펼쳐진 영의 세계를 계속해서 침노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제자가 온 영으로 들어오는 동안 스승은 온 영에서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온 영으로 들어온 제자를 더 깊은 차원으로도 이끌 수 있는 것이구요. 그래서 영의 세계에는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의 차원으로 이끄시는 최고의 스승 한분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요 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말씀했지요. 바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도 생각나게 하심으로 영의 차원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나가면 얼마든지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가 있지요. 성령님께서 최고의 스승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셔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날로 더 깊은 영의 차원으로 침노해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30:05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