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49)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를 여럿 낳아 보신 분들은 느끼시겠지만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성품에 차이가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부모로부터 공통적으로 타고나는 성품도 있지만 때로는 자녀들 간에도 전혀 다른 면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요. 또한 자녀들 중에 어떤 자녀는 아버지 쪽을 많이 닮고, 어떤 자녀는 어머니 쪽을 많이 닮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녀를 보면 "자기 아빠를 쏙 빼닮았다" 말하기도 하고, 어떤 자녀에 대해서는 "자기 엄마를 쏙 빼닮았다" 말하기도 하지요. 이처럼 자녀를 보면 부모의 성품이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부모를 보면 자녀의 성품이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도 각각 에서는 아버지의 성품을, 야곱은 어머니의 성품을 더 많이 닮은 경우입니다.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는 각각 자신의 성품을 더 많이 닮아 나온 자녀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게 되었지요. 즉 이삭은 에서에게, 리브가는 야곱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편협된 사랑도 에서와 야곱의 사이를 더 벌어지게 하는 하나의 큰 원인이 되었지요. 이삭과 리브가가 정말 진리 안에서 에서와 야곱을 양육했다면 형제간에 화평치 못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편이 갈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 론 /
1. 편협된 사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한 이삭
이처럼 편협된 사랑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는 데 있어서도 큰 지장을 받게 되지요. 실제로 이삭은 에서에 대한 편협된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주신 말씀에 담긴 뜻을 마음에 명심하지 못했습니다.
본문 2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은 이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지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은 비록 에서가 먼저 태어나 장자가 되지만 결국에는 동생인 야곱을 섬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린 자 즉 야곱을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러니 이삭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했다면 에서가 자신을 더 닮았고 장자라고 해서 그에게 장자권을 주려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야곱에게 장자권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관습 또한 틀에 매여서 으레 장자인 에서에게 장자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우선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에 따랐어야 했다는 말이지요.
이삭의 아비인 아브라함은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낳기 전에 이미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 비록 정통계보를 통해 낳은 약속의 씨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 후사가 없던 상황에서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의뢰하지 않았다면 사람의 생각 가운데 이스마엘을 후사로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요.
더욱이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고도 이삭을 얻기까지는 14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었다면 14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면서 이렇게 기다려도 약속된 씨가 없으니 이스마엘이라도 후사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약속의 씨를 기다렸고 마침내는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의 차이는 이후에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도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한번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약속의 씨임을 알았기에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순종해 나갑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나 이스마엘 모두를 조금의 차별 없이 똑같은 자녀로서 사랑해 주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명히 알았기에 정에 이끌리거나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쫓아야 했을 때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자 즉시로 순종했던 것을 봅니다.
또한 아내 사라가 죽고 후처를 통해 여섯 명의 자녀들을 더 낳았을 때도 아브라함은 육적인 정에 이끌리기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먼저 생각했지요. 그래서 이삭을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을 그의 생전에 멀리 떠나보냈던 것입니다.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짐에 있어서 조금의 지장도 없게 하려는 의도에서였지요. 아브라함이 사랑이 없고, 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사람과의 사이의 육적인 관계나 정(情)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달리 이삭은 그렇지 못했던 것을 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뜻은 큰 자인 에서가 작은 자인 야곱을 섬기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말씀으로 분명히 알려 주셨지요. 그러니 이삭이 육적인 정이나 사람의 생각에 매여 에서에게 편협된 마음을 갖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여 야곱이 비록 동생이라 할지라도 그가 후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러지를 못했고 리브가 역시 선한 진리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한 것이 아니라 간교한 방법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한 것이기에 결국 에서와 야곱은 형제간에 비극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되지요.
2. 야곱을 예지(豫知)하시고 예정(豫定)하신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일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에서를 택하여 쓰셨으면 안 되었을까요? 어차피 에서가 장자로 태어났으니까 에서의 중심을 좋게 만드셔서 그가 순리 가운데 자연스럽게 장자의 명분을 이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도록 하시면 안 되었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독재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공의에도 맞지 않는 것이구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는 임의로 정하여 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예지하시는 가운데 예정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20-21에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토기장이는 하나님을 비유한 것인데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마치 하나님께서는 마음대로 어떤 사람은 좋은 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나쁜 그릇으로 만드시는 분이구나 하고 오해를 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시며 철저히 공의의 법칙에 맡기시기 때문에 어떤 것도 임의로 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임의로 하신다면 이 세상에 좋은 중심과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을 되도록이면 많이 태어나게 하셔서 그들을 들어 사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 아브라함, 모세, 에녹, 베드로, 사도 바울, 이런 중심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드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간다면 얼마나 빠르고 신속하게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도 공의의 법칙에 따르시기 때문에 임의로 좋은 그릇을 마음껏 만드시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 경작의 역사를 통해 위대한 인물들이 아주 가끔 나왔던 것이구요.
다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지하시는 분으로서 인간 경작의 역사 속에 장차 어느 때가 되면 어떤 인물이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십니다. 어느 때쯤 되면 아브라함과 같은 인물이 나와야 하고, 어느 때쯤 되면 모세와 같은 인물이 나와야 하며, 어느 때쯤 되면 사도 바울과 같은 인물이 나와야 할 것 등을 다 아시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때쯤 되면 그러한 인물이 나올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주관해 가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조상과 어떤 부모를 통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야 할지 등을 미리 아시고 주관해 가신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예지 예정인 것입니다.
무조건 하나님의 마음대로 좋은 그릇을 아무 때나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를 아시고 그때에 맞추어 그런 인물이 나올 수 있도록 주관해 가심으로 정하신 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 중에 누가 더 좋은 중심을 가졌고 누구를 통해 뜻하신 섭리를 이루어야 할지를 이미 알고 계획하셨습니다. 에서보다는 야곱의 중심이 더 좋을 것을 아셨기에 비록 야곱이 아우였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중에서부터 그를 택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지하시고 예정하셨다 하여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룰 수 있는 도구로 나와지기 위해 이후로 필요한 연단을 받아야 했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능히 연단을 통과하여 나와질 것도 아셨지만 야곱의 연단은 철저히 스스로가 받아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도 지켜보는 가운데 정확히 공의에 맞게 받아야 했지요. 야곱이 하나님의 정하심에 들어있다 하여 연단을 형식적으로 통과한다거나 좀 부족해도 봐주는 것이 아니라 공의 가운데 정확히 받아야 했다는 말입니다.
성경상에 크게 쓰임받은 인물들 역시 그들의 그릇이 좋고 중심이 좋았다 해도 그들이 만약 연단을 잘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처럼 쓰임받을 수는 없었겠지요. 그릇이 좋고 중심이 좋은 만큼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쓰기를 원하시는 것이며 따라서 그에 따른 연단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강도 있게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나도 그릇만 좋다면 중심만 좋다면 믿음의 선진들처럼 크게 쓰임받을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전에 먼저 나에게 만약 아브라함과 같은 모세와 같은 야곱이나 요셉과 같은 연단이 온다면 나는 과연 잘 통과할 수 있을까… 이것을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볼 때 어떤 사람은 연단을 적게 받고도 또는 연단을 쉽게 쉽게 통과해서 영으로 들어가고 쓰임받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연단 역시 공의 가운데 정확하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누구를 봐주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도 그 연단을 지켜보기 때문에 전혀 송사거리가 없도록 공의에 합당해야 하지요. 누구의 도움도 아닌 자신의 믿음으로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님께서도 도와주시지만 이 역시 자신의 믿음으로 끌어내려야 하는 것이지요. 더욱이 그릇의 크기에 따라 또한 그릇의 재질에 따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연단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쉬워 보이는 연단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하게 연단하시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약하게 연단하시기도 하구요. 자칫 작은 그릇을 무리하게 넓히려다 보면 깨질 수도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연단을 통해 각 사람을 변화시키시고 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3. 공의 가운데 야곱을 택하시고 연단하신 하나님
야곱의 경우는 그 중심이 바르고 좋기는 하지만 26절에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했지요. 이처럼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것은 그가 욕심과 앞서고자 하는 마음을 이미 가지고 태어났고 그로 인해 앞으로 에서와의 사이에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를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타고난 기질 속에서 간교한 성분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20년이라는 긴 연단의 세월을 허락하심으로 그가 철저히 깨어지고 낮아지도록 역사하셨지요.
세상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마치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녀도 낳고 삶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돌아갑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공의에 어긋나지 않는 가운데 정확하게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강제로나 임의로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때와 기한과 사람의 중심과 마음 그리고 모든 환경과 조건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처음 인간 경작을 시작하면서 계획하신 대로 지금까지 한 치의 오차 없이 모든 일을 이루어 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본교회를 보아도 잘 알 수 있지요. 본교회의 모든 일도 사람의 힘과 계획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이끄시는 대로 정확히 인도받아 나가고 있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야곱을 택하심과 같이 본제단 역시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고 야곱을 연단하여 변화시켜 사용하셨듯이 본제단도 지난 22년간을 연단하여 사용하고 계시지요.
그러므로 야곱이 아무리 택정함을 입었다 해도 쓰임에 합당케 되기 위해 연단이 있어야 했던 것이며 연단을 통해 결국은 합당하게 나와졌던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연단하여 사용하시되 사 48:10에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는 말씀처럼 고난의 풀무에서 인내하며 연단받아 정금같이 나온 사람을 더 크고 존귀하게 사용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롬 5:3-4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하신 대로 어떤 연단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실망하고 낙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소망 가운데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편협된 사랑 속에 장자권을 넘보게 된 야곱
쌍둥이로 태어난 에서와 야곱은 점점 성장하여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고 야곱은 종용하면서 조용한 사람으로서 장막에 거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에서를 사랑하게 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지요. 이삭은 장자인 에서를 사랑하고 자신을 더 닮은 에서에게 마음을 썼는데 에서가 사냥한 고기까지 좋아하게 되니 그만큼 더 많은 사랑이 갔던 것입니다. 반면에 리브가는 자신의 성품을 더 많이 닮아 종용하면서도 지혜로운 야곱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게 되었던 것이구요.
그런데 이처럼 편협된 사랑의 골이 깊어질수록 야곱의 마음에는 불만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야곱이라고 해서 왜 아버지인 이삭의 사랑을 더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아직 진리로 변화된 것이 아니기에 자신보다 형인 에서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못마땅했지요. 나는 왜 형 에서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나에게 무엇이 부족하기에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을 했던 것입니다.
형 에서가 사냥을 해 와서 그것으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을 보면 나도 에서보다 모자란 것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에서만큼 사랑을 받지 못하나 이런 생각으로 인해 마음에 불안과 불만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결국은 장자권을 넘보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게 되고 맙니다. 에서나 자신이나 동일한 어머니로부터 동일한 때에 태어났음에도 왜 누구는 장자고 누구는 차자가 되어야 하는가 이런 불만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형 에서가 가지고 있는 장자권을 어떻게든 자신이 갖고자 하는 욕심과 야심이 그 마음에 싹트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야곱은 간교한 성품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장자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며 나름대로 지혜를 동원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것이 선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 지혜요, 육의 지혜였습니다. 평소에 형 에서의 성품을 잘 아는 야곱은 에서의 급하고 경솔한 성품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했지요. 들에서부터 돌아와 심히 곤비하여 허기져 있는 에서에게 야곱은 자신이 쑨 붉은 죽을 주면서 대신 장자의 명분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5. 경솔하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
에서는 허기지고 급한 마음에 야곱이 요구하는 대로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겠다고 맹세하였지요. 에서가 자신의 행동이 장차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조금이라도 깊게 생각해 보았다면 그렇게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텐데, 에서는 그런 생각조차 못한 채 당장의 배고픔을 못 이겨 장자의 명분을 팔고 말았습니다.
32절에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며 입술로 맹세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것입니다. 물론 에서는 당시에 자신이 이처럼 입술로만 장자의 명분을 팔겠다고 말한다 해서 그것으로 정말 장자의 명분이 야곱에게 넘어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겠지요. 더욱이 이때 어떤 각서를 쓴다거나 어떤 증표를 건네 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에서는 그처럼 쉽게 말로 뱉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영적인 법칙을 잘 알고 있었지요. 성경에는 입술로 시인하여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 13:2 전반 절에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했고 잠 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씀하신대로이지요. 더욱이 단지 입술로만 시인하는 것이라 해도 야곱은 장자의 명분에 대한 대가를 치루었기 때문에 이것은 이미 영적으로 거래가 성립된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법칙을 알고 지혜가 있었던 야곱은 그렇지 못한 에서로부터 마침내 장자의 명분을 빼앗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장자에게 돌아갈 축복을 온전히 가져온 것이 아니기에 야곱은 훗날 다시 한번 간교한 방법을 써서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채지요. 계속해서 다음 시간에는 아직 온전치 못한 이삭의 모습과 그럼에도 이삭을 보장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에서와 야곱 사이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서의 성품을 이용하여 간교한 방법으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야곱의 모습은 결코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죽 한 그릇에 너무나도 쉽게 장자의 명분을 팔겠다고 입술로 내었던 에서 역시 합당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34절에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말씀합니다. 히 12:16에는 그를 망령된 자라고까지 말씀하지요. 영적인 무지와 함께 안존하지 못한 성품으로부터 비롯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간단한 입술의 말 한 마디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여러분에게는 영적으로 큰 마이너스가 될 수 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의 사이에 큰 담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또 사단의 올무가 되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법칙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며 말 한 마디라도 경솔하게 내서는 안 되지요.
약 3:2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말씀할 정도로 말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또한 영적인 축복을 결코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되지요. 구약 시대에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것은 곧 모든 축복의 보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육적인 축복은 물론이고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정통 계보를 잇게 되는 영적인 축복까지 보장된 것이지요.
이러한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그만큼 마음 중심에 명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을 온전히 믿고 이루어지기까지 변함없는 모습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조금 세월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에서조차도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지요.
결국 똑같은 축복의 말씀을 받았어도 어떠한 마음과 믿음으로 받느냐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축복의 말씀을 주셨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며 불평을 하지요.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떠한 모습인가? 점검해 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 말씀을 통해 깨우쳐야 할 것은 어떤 일이든지 선의 지혜 즉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에 대해 욕심이 있고 야망이 있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영적으로 볼 때 여러분에게 영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 것은 너무나 필요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것에 대한 사모함이 지나쳐서 그것이 자칫 욕심이 되고 만다면 이는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것에 대한 목표를 가지고 사모하여 달려갈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방법을 좇아 선한 방법 가운데 한 단계 한 단계 나가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목표에만 집착한 나머지 주변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선한 방법이 아닌 사람의 방법 가운데 목표한 바를 추구하려는 경우가 있지요. 야곱이 바로 그러했지요. 물론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과정이었지만 야곱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깨트리고 변화되기 위해 기나긴 연단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결국 영으로 들어오고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어차피 연단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지만 여러분이 얼마나 선 가운데 하늘로부터 지혜를 받아 나가느냐에 따라 같은 연단을 받아도 어떤 사람은 짧게 끝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오랜 세월을 받는 경우가 있지요. 사람의 생각과 욕심으로 인해 그만큼 연단이 따르므로 받지 않아도 될 연단까지 받으며 더디 가게 되구요.
이러한 사실들을 잘 깨달아 여러분은 늘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인도받아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범사에 그리스도의 선한 향기를 발하는 주님의 귀한 도구들로 쓰임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30:13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