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38)
서 론 /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정통 계보를 통해 낳은 아들이 아니라하여 차별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삭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자녀로서 사랑을 주고 보살펴 주었지요. 그러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라" 말씀하시자 아침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만을 주어서 그들을 내어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궁핍했던 것도 아니요 물질의 부요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어떤 재산을 떼어주거나 몸종을 붙여서 보낸 것이 아니라 좀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대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 편에서는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재산을 주어 보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것이었지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비록 재산을 주거나 몸종을 붙여준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시며 생사화복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한 것입니다.
재산이라는 것은 쓰면 사라지는 것이고 사람도 배신하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의뢰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모른다하지 않으시지요. 이것을 너무나 잘 아는 아브라함이었기에 그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오히려 육적으로 의지할 만한 것을 주어서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 편에서도 육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재물이나 몸종을 주어서 보내고 싶었겠지만 그보다는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건져내 주실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린 것이지요.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라" 하신 분도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뜻에 따라 순종할 때 다른 모든 것 역시 하나님 앞에 맡겨드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과 영의 차이입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챙겨주고 사라 몰래라도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이 사랑이며 영의 마음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갈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처럼 주 안에서 우리는 육적인 정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가족간에도 또한 사람과 사람 간에도 육적인 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온전한 영적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며 그 정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길로 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상대를 정말 영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상대의 영혼이 잘되는 길인가 이것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때로는 위로와 격려도 필요하고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할 때도 있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주어진 연단이나 스스로 믿음의 단계를 뚫어야 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격려와 도움을 주는 것이 꼭 상대에게 득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더욱이 내 편에서 육적인 정을 끊지 못하고 육으로 대해주므로 상대의 신앙이 더 성장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뚫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이 과연 영적인 사랑인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는 상대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 나오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지요.
아브라함은 바로 믿음의 사람이요 영적인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하갈과 이스마엘로 하여금 자신들 스스로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로 나와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바로 아버지 하나님을 움직여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신앙 말입니다.
본 론 /
1.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된 하갈과 이스마엘
아브라함은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보낼 때에 떡과 물 한 가죽부대만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하갈과 이스마엘이 멀리 가지 못하여 그 물과 양식이 떨어지게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지요. 결국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던 하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본문 15-16절에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체험을 하게 하셨지요. 눅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 칠십 인을 세워 그들을 각동 각처로 보내실 때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받은 사람들을 통해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먹고 그들 집에 유하라 하시지요. 그리고 여기에 대해 눅 22:35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물으시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없었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일을 위해 떠나는 제자들에게 돈이나 옷이나 신발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하여 하나님만을 의뢰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비결을 배우게 하신 것이지요. 아브라함도 바로 이러한 마음이었기에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많은 것을 주어서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들에서 방황하다가 물이 다 떨어지게 된 하갈와 이스마엘은 마침내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17-19절에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했지요.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그들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이러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아브라함 때문이었음을 알아야 하지요. 16절에서 보았듯이 하갈은 이제 자식이 죽는구나 생각하며 슬픈 마음에 방성대곡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도움의 손길이 오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러한 믿음을 갖지도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겨드렸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역사해 주셨던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겨드린 대로 하갈과 이스마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해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마엘이 장차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 역시 아브라함을 보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의 말씀을 지키셨지요. 20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시고 이스마엘이 장성하기까지 함께 하시며 그를 지키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대로 이루어지도록 역사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의 믿음으로 인해 그에게 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축복 가운데 거하게 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갈과 이스마엘은 이것이 누구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킴받고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 이스마엘이 성장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되는 모든 과정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렸던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랬지요.
그런데 막상 하갈과 이스마엘은 죽을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도움을 받아 살아났던 체험을 하고도 일시적인 것으로 흘려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지키심 가운데 성장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으면서도 이것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깨닫지를 못했지요. 그것이 열매로 드러나게 된 일이 바로 하갈이 이스마엘을 위해 애굽 땅 여인을 취해 아내로 삼게 한 사건입니다.
2. 이스마엘을 위해 애굽 땅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한 하갈
21절에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했지요. 하갈은 비록 자신은 애굽 여인이었지만 아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씨였습니다. 또한 하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그의 아들 이스마엘도 당연히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지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브라함에 의해 할례까지 받았던 이스마엘이었구요.
그런데도 하갈은 아들을 위해 이방 여인을 취하여 아내로 삼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과 같은 애굽 여인을 취한 것이지요. 예전에 사라의 학대를 피해 도망했을 때, 아들과 함께 들을 헤매다 죽을 뻔했을 때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하갈이었지만 그 마음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다면 당연히 아들을 위해 이방여인이 아닌 남편 아브라함과 같은 민족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여인을 취하여 아내로 삼게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누누이 그렇게 또 가르쳤을텐데 하갈은 그러지를 않았던 것이지요. 이로 인해 결국은 인간 경작의 섭리 속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대치하는 또 하나의 이방 민족이 나와지고 말았습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한 이스마엘이 그나마 남아 있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마저 잃은 채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간 결과이지요. 이는 결국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놀라운 권능의 역사들을 보았다 해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곁에 살면서 늘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또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들을 보았지요. 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아브라함으로부터 많은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사건들도 친히 겪어 보았구요. 그럼에도 그 마음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요. 여러분이 본 제단에서 일어나는 이 수많은 기사와 표적과 권능의 역사들을 보았을 때에 그 모든 것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았다면 지금쯤 아주 많은 분들이 영의 차원으로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역사들이 베풀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믿음이 그만큼 크게 성장하였고 그래도 많은 분들이 영으로 들어오고 있지만 반면에 수년, 혹은 10년, 20년을 본 제단에서 신앙생활하면서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을 하는 분들도 있지요. 심지어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열심 내던 것이 식어지고 미지근한 신앙으로 빠져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체험한 것을 일시적인 것으로 지나쳐 버리기 때문이지요.
하갈과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하면서 그동안 보고 듣고 체험했던 것들을 저버린 채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게 됨으로 그것이 더 급속히 진전되고 말았던 것이구요. 따라서 아무리 많은 것을 보고 체험한다 해도 그것을 마음 중심에서 믿지 아니하며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갔다"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위하여 그 순간에 샘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으나 발견치 못하고 있던 것을 하갈의 눈을 밝혀 보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갈이 언제쯤 어디로 오겠다는 것을 이미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예비하여 두신 샘이 하갈의 눈에 보이도록 하신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것을 예비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것을 모른 채 자신들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하나님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므로 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3. 아비멜렉과 비골에게 하나님과 함께하심을 인정받는 아브라함
22-23절에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한 나라의 왕과 군대 장관이 찾아와 아브라함을 인정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후대까지라도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당시 아브라함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했으며 그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얼마나 확실히 나타났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아브라함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알며 또한 장차 그를 통해 이루게 될 후손이 얼마나 막강한 존재로 나와질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아비멜렉은 자신이 지금 아브라함에게 후대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신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지요. 그 당시 아브라함은 블레셋 족속의 땅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이방 민족의 한 가운데 살고 있었지요. 그럼에도 이방 민족들이 아브라함을 공격하거나 그에게 해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히 아브라함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했고 오히려 두려워하며 무서워하였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축복이며,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축복입니다.
시 23:4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는 고백처럼 아무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며 주변의 대적들 가운데 거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지키시면 두려워할 것도 겁낼 것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빛 가운데 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며 어둠 가운데 거할 때는 이러한 고백이 당당히 나올 수가 없지요. 오히려 아무리 빛의 제단,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지키시는 제단에서 신앙생활 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늘 어둠과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지킴받을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빛이면 어둠에 둘러 있어도 아무 염려 없지만 내가 어둠이면 비록 주변에 빛이 함께 있어도 결국 사단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권세가 얼마나 컸는지는 25-26절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했지요. 아브라함은 한 나라의 왕인 아비멜렉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아비멜렉은 자신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해 몰랐다고 말하지요.
이는 곧 자신이 알았으면 그렇게 못하도록 했을 텐데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생긴 일이었으니 너그러이 넘어가 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책망할 때에 자신의 불찰을 인정하며 굽히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자 이제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의 마음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한 것은 그들과 어떤 다툼이나 분쟁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들의 잘못은 분명히 지적해 주되 결과적으로는 그들과 화평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본문의 상황으로 볼 때 아비멜렉이 감히 아브라함 앞에서 거짓을 고하거나 다툼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권세와 힘이 그만큼 막강했고 무엇보다도 아비멜렉 편에서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힘과 권세가 더 세고 자신에게는 든든한 하나님이 계시다하여 무조건 아비멜렉을 누르려하거나 그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려하지 않았습니다. 책망하여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자 이내 먼저 손을 내밀어 화평을 이루지요.
아브라함이 얼마나 지혜로우며 덕과 사랑을 겸비한 사람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모습입니다. 사람을 다루는 지혜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늘 화평하기 원하고 내 유익만이 아니라 상대의 유익을 구해주려는 넓고 큰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인해 사람들 앞에서 교만해지거나 거만해지지 않는 겸비하고 섬기는 마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큰 권세와 힘만이 아니라 이처럼 섬김과 겸비함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이방 민족들과도 다툼이 없이 화평 가운데 지낼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시 37:11에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는 말씀처럼 아브라함은 온유함으로 주변을 품음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굳건히 지켜나갈 수가 있었고 풍부한 화평 가운데 자신의 기반을 다져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34절에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말씀한 대로 이방 족속인 블레셋의 땅에 거하면서도 평안하게 화평을 이루며 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의 언약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일을 이루어 갈 때는 자신이 앞서서 모든 것을 해 나가는 것을 봅니다. 더 나아가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까지도 일일이 간섭하고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가려 하지요. 예를 들어 이러한 사람이 머리가 된다고 하면 아랫사람들은 성장할 기회가 그만큼 줄어듭니다.
물론 윗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고 주관을 받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 가야 하지만 그렇다 하여 자신의 믿음과 계획대로 모든 것을 이끌어가라는 의미는 아니지요. 아랫사람들에게 영적인 방향과 길을 제시해줌으로 그들이 스스로 기도하여 인도받아 나갈 수 있도록 때로는 맡겨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시행착오도 일어나겠지만 그것이 무섭다하여 믿고 맡기지 못한다면 당장은 일이 잘되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일이 더 안 될 수밖에 없지요. 바로 영적으로 성장한 일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된 사람의 역할이 너무 중요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며 기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랫사람이든 주변의 사람이든 그들도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지요.이것이 큰 자의 모습이며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대하며 치리해 나가는 지혜는 결국 위로부터 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처세술이나 인간의 관계에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사람을 대해나가는 것은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항상 좋을 수는 없지요.
약 3:17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말씀하신 대로 내 마음에 성결을 이루고 화평과 관용과 양순 그리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며 편벽과 거짓이 없을 때만이 정녕 선(善)에서 나오는 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선에서 나오는 지혜로만이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품으므로 사람 사이에도 아름다운 관계를 이룰 수가 있지요.
오늘 들은 말씀을 통해 위로부터 난 선한 지혜를 사모하시되 정녕 모든 것을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온전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시므로 선과 믿음의 아름다운 조화 속에 아버지 하나님의 일들을 아름답게 이루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1:48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