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37)
서 론 /
세상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는데 흔히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말할 때 인용하지요. 마치 열 손가락을 깨물면 모두가 아프듯이 부모의 입장에서는 말을 잘 듣고 착한 자녀에게만 사랑이 가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부모의 마음을 맞추지 못하고 이런저런 모습으로 인해 심려를 주는 자녀라 해도 다 같은 자녀이기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되고 사랑이 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마음을 가진 부모가 많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 중에 말썽을 피우고 문제를 일으키는 자녀가 있다면 처음에는 참고 인내하며 사랑과 관심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이 계속되어 세월이 지나면 나중에는 마음에서 사랑의 감정이 떠나고 심지어는 자녀에 대해 미움의 감정까지 품게 되는 사람들도 있지요. 또는 자기 마음에 맞는 자녀에게만 사랑을 주며 편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욱이 자기가 낳지 않은 자녀를 자기가 낳은 자녀와 함께 키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주는 경우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지요.
그렇다면 진리를 아는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의 마음과 사라의 마음을 비교해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 론 /
1.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요구하는 사라
약속의 씨인 이삭은 잉태에서부터 탄생 그리고 성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해 가셨지요. 그래서 이삭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상하신 간섭하심 가운데 성장할 수가 있었고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삭이 젖을 떼는 날 큰 잔치를 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점차 성장하게 되면서 하갈과 그의 소생 이스마엘 그리고 사라 사이에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마침내 불거져 나오게 되지요.
9-11절에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했습니다. 이스마엘이 비록 정통 계보를 이어갈 약속의 씨는 아니지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삭과 같이 사랑스런 아들이었지요. 물론 장차 하나님의 섭리가 이삭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이스마엘을 사랑하지 않거나 이삭과 차별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이스마엘과 이삭이 똑같은 자녀였기에 똑같이 사랑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었지만 사라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사라는 예전에 자신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후사를 이으려 했는데도 막상 하갈이 잉태를 하게 되자 그 상황을 참아내지 못하고 심히 학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한 하갈이 자신을 멸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라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하갈이 사라를 피해 도망까지 해야 했던 상황이었지만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하갈에게 보내어 그가 낳을 아들에 대한 언약의 말씀을 주시며 하갈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도록 역사하셨지요. 이 사건을 통해 사라도 자신의 행동이 너무 지나쳤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갈도 여호와의 사자의 지시에 따라 사라의 수하에 복종하게 되니 일단 겉으로는 화평이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지 겉으로만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요, 그 마음에서부터 감정을 버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은 일시적인 화평밖에 될 수가 없었지요. 그러니 훗날 다시금 예전과 비슷한 상황이 되자 결국 그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던 감정이 마침내 갈등으로 표출되고 맙니다. 평소에 늘 하갈과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하는 행동 역시 결코 곱게 보일 리가 없었지요.
사라는 혹여라도 이스마엘로 인해 이삭에게 어떤 해(害)가 올까 염려하였고 정통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야 할 이삭과 그렇지 않은 이스마엘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스마엘을 눈의 가시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라는 자기 소생인 이삭과 그렇지 않은 이스마엘에 대해 분명한 차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마엘이 아들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보게 되자 마침내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요구하지요. 예전에 하갈을 심히 학대하여 하갈이 도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사라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지요. 세월이 흘렀는데도 예전에 가지고 있던 비진리의 마음을 버린 것이 아니라 마음 한 편에 늘 눌러 놓았을 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의 마음을 조금만 이해하고 그의 선한 마음을 일부만이라도 닮았다면 결코 이런 말이 나오지는 않았겠지요.
만약 사라가 더 넓고 선한 마음이었다면 이스마엘도 남편 아브라함의 씨로 된 아들이니 오히려 이스마엘 역시 자신이 낳은 아들처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었겠지요. 또한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하는 행동도 희롱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 사이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장난 정도로 너그럽게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입니다. 사라의 선한 마음에 감동이 되어 결국은 서로 화평을 이루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가 그러한 마음이 안 되니 또 한 번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마음에 고통을 받도록 하는 사건이 생기고 만 것이지요. 물론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을 자녀는 아니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똑같이 자신의 자녀였기에 그를 내어 쫓으라는 사라의 말에 깊이 근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살펴보면 사라의 마음이 진리에 비추어 합당치 못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스마엘이나 하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라가 단지 한 번의 사건만을 보고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아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쌓이고 쌓여 오던 감정이 결국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장면을 목격함으로 터져 나오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러니 사라가 생각하기에 더 이상 이스마엘을 이삭과 함께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기까지 하갈이나 이스마엘 편에서도 온전치 못한 모습들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갈은 원래 사라의 몸종이었으니 전과 같은 마음으로 섬겼으면 되었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던 것이고 이스마엘도 이삭을 친동생과 같이 보살피고 지키며 사랑해 주었으면 되었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 간에 섬기지 못하고 서로 간에 이해하지 못하며 양보하지 못하는 모습들로 인해 결국은 화평이 깨어지게 되었고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나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마음에 고통을 받아야 했으며 심히 근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조금도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은 아브라함
이러한 상황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 보내라는 말씀이지요. 잠시 후에 설명하겠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였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할지를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는 하갈과 이스마엘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였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어떻게 할지를 말씀해 주시자 즉시로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마엘 역시 이삭과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주었던 아브라함이었지만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떠한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게 되면 마치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 쫓는 것보다는 사라를 잘 타이르고 이해시켜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 그대로 두도록 하는 것이 더 선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이런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자기 생각도, 자기 보기에 선도, 자기 보기에 의도 철저히 무(無)로 돌렸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온전한 순종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이나 자기 보기에 의와 일치될 때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자기 보기에 의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이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불순종하거나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과연 아브라함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겠는지요?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하고 육신의 생각을 동원할 분은 안 계십니까? 아니면 뭔가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며 다른 방법을 찾지는 않으시겠는지요?
그러나 자기 보기에 아무리 선해 보이고 좋은 방법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곧 불순종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방법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벌써 하나님 앞에 엄청난 교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비록 자기 생각에는 이해되지 않고 자기 보기에는 더 좋은 길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마음이 되어지기를 원하시지요.
아브라함은 바로 이러한 마음이었기에 자기 생각이나 자기 주장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지금까지 22년 동안 교회를 치리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한 번도 제 생각이나 주장을 내세워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제 생각이나 의견을 가져 본 적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아멘이었지요. 그러면 주변에서는 "당회장님,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이렇게 하면 더 빠르게 이룰 수 있을 텐데요" 이런 식의 말들을 해 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했고 결과를 보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옳았지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람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앞설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신의 생각에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거나 스스로 자신이 옳다 여기는 모습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연단을 통해 육신의 생각이 철저히 깨어진 아브라함은 이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 갔던 것을 볼 수 있지요.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 보냈을 때에 그가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이 되고 말았거나 그대로 혈통이 끊어지고 말았다면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역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나름대로 한 민족을 이루어 가도록 섭리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이삭이라는 약속의 씨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감에 있어서 사라는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방법 가운데 이삭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려 했던 것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맡겨 드림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에 따랐던 것입니다.
사실 이스마엘은 사람의 생각이 동원되어진 결과로 인해 나와진 열매였지요.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었던 일이었으나 사라가 만약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이스마엘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태어났고 이러한 이스마엘 역시 아브라함의 씨였기에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인해 오는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여러분과 관련된 주변의 모든 분야가 함께 축복을 받아 나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많은 것을 역사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아침 일찍 하갈과 이스마앨을 떠나보낸 아브라함
14절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말씀하신 것을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일을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보내야지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즉시로 순종했지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주거나 재산의 일부를 떼어 주었던 것도 아니며 오로지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만을 준 채 떠나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편에서는 야박하다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전폭적으로 의뢰하는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라" 하셨으니 그 말씀에만 순종하면 그 후에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갈과 이스마엘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그들을 인도하시는 섬세하신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 편에서 사람의 방법과 생각을 동원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폭은 오히려 좁아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하나님께 100을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100을 다 책임져 주시지만 50만 맡기고 50은 자기가 하려고 한다면 그만큼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수 있는 한계를 좁히는 결과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100을 온전히 다 맡겼기에 하나님께서도 온전히 책임져 주실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처럼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만을 주어 보낸 데에는 한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아비의 마음도 담겨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던 아브라함이지만 그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떠나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요. 그래도 마음먹으면 손이 닿을 만한 곳에 발이 닿고 소문이 들려올 만한 거리의 장소에 그들이 정착하여 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이것이 육신의 생각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였다면 왜 여러 종들도 붙여 주고 더 많은 재산과 양식을 줘서 보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기에 일절 사람의 방법이나 생각을 동원한 것이 아니며 다만 아비로서 이스마엘이 가까운 거리에 살았으면 하는 마음은 얼마든지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이처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해 주셨는지를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신자나 새신자와 같은 경우는 그들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일이 가르쳐 주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마치 젖 먹는 어린아이를 돌보는 심정으로 세세한 것 하나까지라도 살펴 주어야 하지요.
그러나 신앙이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일일이 가르쳐 주고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가 길을 찾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심방과 상담을 통해 영적으로 제대로 갈 수 있도록 늘 관심과 사랑으로 대해 주어야 하지만 이제 영의 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스스로도 체험을 해나갈 수 있는 신앙이라면 이때는 밥을 떠 먹여 주기보다는 밥을 먹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지요. 그래야 신앙이 더 빠르게 성장하며 스스로도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경우는 연단 중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통과해 나오도록 놔두어야 할 때도 있지요. 연단받는 모습이 힘들어 보인다고 하여 옆에서 도와주려 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의 신앙 성장을 막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여전히 누군가가 일일이 밥을 먹여 주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 모습인지요? 아니면 이제 어느 정도 스스로도 분별을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고 계십니까? 또는 밝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계신지요?
바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바른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육신의 생각을 온전히 깨뜨리고 작은 것 하나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차원이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한 단계 한 단계 더 깊은 영의 차원으로 인도해 가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 보심으로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인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은 발견하고 변화되어서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날마다 더 깊은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1:53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