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35)
서 론 /
롯과 그의 두 딸들이 불의 심판이 임박한 소돔 성을 빠져나와 급하게 피할 곳을 찾아 들어간 곳이 소알 성이었습니다. 원래 천사장들이 롯과 그 가족들로 하여금 도망하여 피하도록 한 곳은 산이었으나 심판의 징조가 워낙 무섭게 나타나기 시작하자 롯은 두려운 나머지 일단 급한 대로 소돔 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소알 성으로 피해 들어갔던 것이지요. 그런데 소알 성에 잠시 몸을 피하게 된 롯은 그 성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이곳이 잠시라도 더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될 곳임을 느끼게 됩니다. 불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소돔 성의 패역함을 친히 보았던 롯은 소알 성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소돔 성을 연상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소알 성 역시 소돔과 고모라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성으로서 소알 성은 자연히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소돔과 고모라의 패역함이 소알 성 사람들 사이에도 그대로 퍼져있었던 것이지요. 롯은 이러한 소알 성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든 그곳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러한 패역한 삶 가운데 함께 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산 속에 들어가서 살지언정 세상 정욕에 물들어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조금이라도 함께 거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돔 성의 멸망을 통해 죄악의 결과에 대해 마음에 철저히 새겨진 롯은 소알 성의 모습을 보면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소돔 성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들 속에 거하는 것이 두려워진 것이지요. 소알 성도 그들의 패역함을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던 것처럼 멸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롯은 두 딸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 굴속에 거하게 되었지요. 그들이 산으로 올라가 살았다는 것은 영적으로 세상과는 구분되어지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의미라 했습니다.
이처럼 롯과 그의 딸들이 어찌 보면 편히 살아갈 수 있는 소알 성을 떠나 굳이 고생할 수밖에 없는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끊고 세상과 구분되어진 삶을 살기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지요. 육의 불편함과 고생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라도 세상과는 구분되어진 새로운 진리의 삶을 살기위해 노력했던 것입니다.
롯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에 젖어 사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구분되어진 삶을 살아야 하지요.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도 끊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은 취하고자 하는 것도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되어진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 편에서의 노력도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므로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롯이 세상과 구분되어진 삶을 살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 굴에 거하였다하여 그것이 마치 수도승과 같이 세상과 모든 것을 단절한 채 살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곳에서의 삶을 이루기 위해 때로는 가까운 성읍이나 인근의 사람들과 교류가 필요한 경우도 있었지요. 그럼에도 롯은 결코 그 마음을 세상에 내어주지 않았고 롯의 두 딸들도 이러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딸들은 그들의 배필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없었지요. 패역한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마음도 내어주지 않는 상황인데 하물며 그들 중에서 배필을 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 배필을 구한다는 것은 롯은 물론이고 아버지 롯의 마음을 잘 아는 두 딸들 역시 결코 원하지 않는 일이었지요.
본 론 /
1. 아비 롯을 통해 인종을 전한 롯의 두 딸
31-32절을 보면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했는데 이것이 육신의 생각이었고 그 결과가 후손 대대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물론 이방 민족들 역시 인간 경작의 섭리 속에 필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었지만 모압과 암몬 족속은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을 때는 그들을 깨우쳐주는 막대기로 사용되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번성할 때는 이스라엘로부터 지배를 받으며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롯의 딸들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낳은 모압과 암몬 족속은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 인간 경작의 섭리를 펼쳐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주변 요소로 쓰임 받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롯과 그의 딸들이 장차 자신들이 낳은 후손과 삼촌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처럼 서로 대적하는 관계가 되어질 것이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육신의 생각을 동원한 결과가 훗날 이처럼 마음 아픈 결과를 낳고 말았지요.
롯의 두 딸들이 세상과 짝하지 않기 위해 그들 중에서 배필을 구하지 않으려 한 것은 너무나 잘한 일입니다. 고후 6:14에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세상을 사랑하고 육에 젖어 있는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배필을 구할 때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구약에 보면 누누이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해 경계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 말씀이 다만 육적으로 이방 여인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근본 이유는 그로 인해 나타나게 될 결과 때문이지요.
느헤미야 13:26-27에 보면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저는 열국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나니 너희가 이방 여인을 취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방 여인을 취하므로 그들이 행하는 죄악에 함께 물들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믿는 자녀들 중에도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 자체가 무조건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설령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다 해도 상대방을 주 안으로 인도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잘해 나가면 상관없지만 혹여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여 자칫 자신도 세상으로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물론 결혼할 당시에는 내가 이 사람을 전도해서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지 생각하겠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면 상황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경우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되지요. 신앙생활을 잘하던 사람도 결혼하고 나면 미지근해지는 경우들이 있는데 하물며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결혼하여 이전처럼 뜨겁게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롯의 두 딸들도 이전에는 소돔 성 사람 중에서 배필을 구하여 정혼까지 했던 상황이었으나 이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마음먹고 세상사람 중에서 배필을 구하려 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 잘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자신들의 한정된 생각의 틀 속에서 방법을 찾다보니 결국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만약 롯의 두 딸들이 생각을 동원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솔직히 밝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진리 안에서 좋은 방법이 나왔겠지요. 바로 롯은 삼촌 아브라함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즉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주변에서는 딸들의 배필이 될 만한 사람을 구할 수 없지만 굳이 배필을 구하기 위해서는 삼촌 아브라함을 찾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과 함께 한 사람들 중에서는 그래도 아브라함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세상에 물들지 않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롯의 딸들도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길을 인도받기 위해 기도했다면 아버지와 상의하지 않았다 해도 아버지 롯의 마음과 동일하게 주관받았을 것이구요. 그러나 롯의 두 딸들은 하나만 생각했지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하므로 인해 결국 자신들의 틀 안에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
2.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빼앗긴 아브라함
이처럼 자신의 생각의 틀로 인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한계 속에서 답을 찾으려다 보니 이것이 육신의 생각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예를 창 12장에 나오는 아브람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은, 자신의 아내를 그곳 사람들에게 빼앗길까 하여 아내에게 자신을 누이라하라 하였지요. 물론 이것이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사래는 아브람의 이복 누이였고 이는 아브람이 자신의 생각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간구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람은 결국 애굽의 왕에게 아내를 빼앗겼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우치고 나서야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시 아내를 찾게 되었지요. 이와 같이 자기 보기에 좋은 길이 때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길과 전혀 다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였던 것에 대해 큰 교훈을 얻었던 아브라함이 또 다시 비슷한 사건을 만나게 되지요. 이 사건은 육적인 상황만을 본다면 전에 있었던 사건과 너무나 유사하게 보이지만 각각의 사건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전에 애굽의 왕에게 아내를 빼앗기게 된 것은 아브람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한 결과였고 이로 인해 아브람은 자신을 발견하고 철저히 깨어지는 계기로 삼을 수가 있었지요. 그러나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아브라함을 드러내시고자 허락하신 것입니다.
전에 아브람이 애굽 왕에게 아내를 빼앗겼을 때와 지금 다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빼앗겼을 때와는 아브라함의 신앙이 전혀 다른 상태였지요. 이미 오랜 세월의 연단을 통해 육신의 생각이 철저히 깨어지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이 어찌 예전의 신앙상태에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생겨났던 일을 또 다시 반복하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의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여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장차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보장된 지위와 환경 속에서 하나의 민족을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서서히 준비하시기 위한 과정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번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이 어떤 인물이며 그가 어떤 권세를 가진 사람인지를 주변에 확실히 심어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진 일이기에 결과를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축복으로 나와지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비록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빼앗기고 말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사라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꿈으로 역사하십니다.
창 20:3에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하셨지요. 그러나 아비멜렉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있었습니다. 4-5절에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했던 것이지요. 이는 아비멜렉이 사라가 남의 아내임을 알고도 악한 마음에서 취하려 했던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아비멜렉의 이러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도 아셨기에 6절에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말씀하셨지요.
3. 아브라함에게 축복주시기 위한 연단
이어지는 7절에는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말씀하십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이번 사건을 허락하신 목적이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가를 주변에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 했는데 바로 아브라함을 선지자라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의 기도로 말미암아 그가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계시지요.
꿈을 꾼 아비멜렉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말을 들은 신복들도 심히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는 곧 아비멜렉과 그의 신하들이 꿈의 내용을 믿었다는 뜻이며 그 마음에 그래도 선한 양심이 있었음을 말해주지요. 마음이 악한 사람들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더 악으로 나왔을 텐데 아비멜렉과 그의 신하들은 꿈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이 상황을 풀 수 있는 선한 방법을 찾게 됩니다.
자신은 비록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 생각하여 취하려했던 것이지만 이로 인해 사라와 아브라함이 겪어야 했을 마음의 고통을 어떻게든 보상하려 했지요. 이 또한 아비멜렉이 그래도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만약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도리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호통을 치며 그냥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마무리했을 텐데 아비멜렉은 그렇지를 않았지요.
14-16절에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 되었느니라"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물론, 사라에게도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며 선으로 상황을 풀어나가려 하고 있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러한 아비멜렉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십니다. 17-18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번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존재를 확실히 심어주시기 위해 아비멜렉과 그의 집안에 이처럼 역사해 가셨던 것입니다.
4. 축복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
아비멜렉은 그랄이라는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이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명예와 권세가 부족한 것도 아닌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후사에 관한 문제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과 문제가 될 만한 분야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기도하여 풀 수 있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한 번의 경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존재가 그들의 마음에 단 번에 깊숙이 새겨지도록 하신 것이지요.
이처럼 모든 상황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존재를 심어주셨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장차 제가 중동의 권세자들과 교류를 이루게 될 때에도 쓰여질 방법이지요.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의 존재를 중동의 권세자들에게 심어주실 때도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있었던 사건과 비슷한 과정을 겪게 하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 없고 부러울 것 없는 그들에게 저의 존재를 단 번에 심어주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만큼 절박한 문제가 해결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권세를 가진 사람인가를 주변에 확실히 심어주셨던 것이며 더불어 큰 축복까지도 허락해 주셨지요. 이는 아브라함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확실히 나타내 주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은 비록 당장에는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결과를 놓고 보면 축복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99년도에 저희 제단에 있었던 연단도 마찬가지이지요. 그 당시에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당하는 것 같았으나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순종하여 인내하며 선의 방법으로 나왔을 때에 오늘날 결과를 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오해들이 풀어져 나가고 있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나타나는 열매를 통해 저와 본 제단을 확실히 보장해 주고 계시지요.
오늘날 본 제단에서 나타나고 있는 수많은 권능의 역사들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광을 받고 계십니까? 그러니 우리는 모든 것을 열매를 통해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약속의 씨인 이삭이 태어나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비멜렉은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꿈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믿었기에 그에게도 결국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결과로 나와지게 되었지요. 그가 비록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결과는 축복으로 나와졌던 것입니다.
반면에 출애굽 당시 애굽의 바로 왕은 어떠했나요? 그는 모세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 무수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서도 오히려 마음을 강퍅하게 하므로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애굽의 바로 왕은 비참한 최후를 그뿐만이 아니라 그 백성, 신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비참한 결과를 맞고 말았지요. 아비멜렉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지요.이것이 바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경작의 섭리를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이런 저런 모양의 사람들을 들어 도구로 사용하시는데 그 중에는 하나님을 모르지만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고 때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은 그 마음의 그릇대로 쓰임받게 되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보면 어떤 사람은 양들 틈에 들어있는 염소와 같은 모양으로 쓰이는 사람이 있고 마치 영화의 악역과 같은 역할로 쓰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모양으로 쓰이고 있는지요? 당연히 육신의 생각을 동원한 결과로 나와진 모압과 암몬 족속들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을 연단하는 막대기와 같은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주인공들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1:59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