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30)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세 사람은 바로 성령님과 두 천사장이 육의 공간에 맞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 했습니다. 영의 존재가 육의 한정된 공간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육의 공간에 맞는 형태를 입어야 하기 때문에 성령님과 두 천사장은 이처럼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셨던 것이지요. 우리 사람과 똑같은 몸을 가졌던 것은 아니고 단지 필요에 의해 잠시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던 것입니다.
4차원의 공간을 소유하고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마음먹으시는 대로 기체, 액체, 고체, 어떤 형태로도 되실 수가 있기 때문에 육의 공간에 나와서는 육의 공간의 한계를 입은 사람과 같은 모양을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육의 공간의 형상을 입었다 해도 영안이 열린 사람은 그 안에 담긴 근본 영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은 이 세 사람을 볼 때 동시에 영체로도 볼 수가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그분들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고 그 앞에 엎드려 극진히 섬길 수가 있었지요.
이처럼 영안이 열리게 되면 육의 몸으로 가리워졌다 해도 그 안에 있는 영체를 볼 수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아 영이 살아난 사람들은 영이 성장하면 할수록 영체로부터 나오는 빛도 더 강해집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닮아 감으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만큼 영체로부터도 더 강한 빛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체에서 나오는 빛을 보면 그가 얼마나 빛이신 하나님을 닮아 영으로 일구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도 바로 이 빛을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영의 차원에 들어와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며 밝은 빛 앞에서는 두려워 떨게 됩니다. 요일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밝은 빛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이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 론 /
1.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라
본문 9절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신 목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약속된 후사가 언제쯤 태어나게 될지 정확한 시점을 가르쳐 주고 계시지요.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고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말합니다.
이 내용을 얼핏 보면 전에 아브라함이 창 17:17에서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고백했던 중심과 내용은 오늘 본문의 사라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아브라함이 웃었던 것은 마침내 언약이 성취될 때가 온 것을 깨닫고 기쁨에서 웃었던 것이라 했지요. 또한 아브라함이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말했던 것은 이것이 사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능히 무엇이나 하실 수 있기에 이러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인정해 드리는 의미에서 고백했던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라의 고백은 의미가 다르지요. 사라는 지금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의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하시면서 14절에 다시 한 번 언약의 때를 확실히 밝혀 주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는 이처럼 자신의 마음속까지도 훤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두려운 나머지 15절에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대답하고 맙니다. 그러나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네가 웃었느니라" 하시며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설령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아 보여도 결코 "아니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도 모르는 내 깊은 마음속까지도 꿰뚫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인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부드러움과 자상함 등을 느끼게 되지만 반면에 이러한 신성적인 면을 대하게 되면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지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입술로 아무리 "아멘, 믿나이다" 고백했다 해서 그것으로 믿음 있다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내 속 중심에는 어떤 마음이 있고 어떤 생각이 있는가가 중요하지요.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고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겉으로는 얼마든지 "예" 할 수 있지만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속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2.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제 두 사람 즉 두 천사장은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여 떠나고 성령 하나님만 남으셔서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십니다. 17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시며 앞일에 대해 아브라함에게 밝히 말씀해 주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깊은 비밀까지 말씀해 주실 정도로 신뢰하시며 친밀한 관계로 여기셨는데 이것이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지요. 연단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아브라함이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게 될수록 하나님 편에서도 아브라함을 신뢰하시게 된 것입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신뢰의 관계를 쌓아 왔기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받을 수 있는 온전한 신뢰의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지요.
저 역시 지금으로부터 만 30년 전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 하나님을 100% 신뢰하며 오직 아멘과 예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사이의 신뢰관계가 날마다 더 쌓여 왔지요. 신뢰를 잃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다 뒤로한 채 하나님과의 신뢰를 첫째로 여겨 왔습니다.
이처럼 행해 왔기에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영의 세계에 대해서까지 알려 주고 계시지요. 또한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해서도 밝히 알려 주고 계시구요. 아버지 하나님과 바로 이러한 신뢰관계가 되기 때문에 자신 있게 앞일들에 대해 예언하는 것이며 능히 세계를 이루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의와 공도를 행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이어지는 18-19절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장차 그의 씨를 통해 계획하신 일들 즉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구세주의 나심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만민에게 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아브라함을 통해 계획하신 일들이 그냥 무조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을 택하였다"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계획은 오직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자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적합한 인물로서 바로 아브라함이 선택되었던 것이요, 그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여 행해야 하는지를 보이게 하시고 이러한 아브라함을 본받아 나온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따를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4. 소돔과 고모라를 살피신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매우 중요한 언약의 말씀을 하신 후 곧바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20-21절에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하셨지요. 이 말씀에는 세 가지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심에도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살피심으로 결코 공의에 어그러지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질 심판은 모든 것을 멸해 버리는 중한 재앙이었기에 이처럼 마지막까지 섬세하게 살피셔서 한 치의 착오도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지요.
둘째로, 이 말씀 안에는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따라서 죄악에 빠지는 것을 얼마나 경계해야 할 것인지 이것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확실하게 새기도록 하시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축복의 언약을 주셨지만 그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의 후손들 중에 결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잘못된 전철을 밟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에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에 이르고 마는 과정을 아브라함에게 확실히 심어주심으로써 또 그의 후대에 심어 주심으로써 두고 두고 경계를 삼게 하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해 미리 알려 주심으로 그곳에 사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 임박한 심판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누구를 떠올렸겠습니까? 바로 조카 롯이었지요. 늘 마음에 두고 있던 롯이었는데 이러한 롯이 살고 있는 소돔이 멸망당할 처지에 놓였으니 이를 알게 된 아브라함은 더욱 롯을 마음에 품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렇게 마음에 품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조카 롯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지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는 바로 롯의 구원이 전적으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임을 확실히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계의 법칙은 구할 때 응답이 오는 것이고 약 5:16 말씀처럼 사랑과 믿음으로 기도하는 의인의 간구일 때 역사하는 힘이 크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에 임박한 심판을 알려 주심으로써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롯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게 하심으로 그 기도에 응답하여 롯을 구원하셨다는 말입니다.
저도 이러한 경우들을 자주 체험해 보았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주의 종이나 일꾼에 대해 어떤 것을 알려 주실 때가 있는데 이는 그것을 알려 주심으로써 제가 미리 알고 대처하도록 하시려는 뜻도 있지만 저에게 이렇게 알려 주시게 되면 제가 마음에 품고 기도할 것을 아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령 어떤 성도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고 알려 주셨다고 할 때 그것을 알게 된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는 순간부터 그 영혼을 위해 애통하며 마음에 품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게 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제가 이처럼 애통하며 마음 아파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저에게 그러한 것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영혼에게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알려 주지 않으셔서 결국 그 영혼이 사망으로 가게 되었다면 그때는 제가 얼마나 더 마음 아파하며 애통하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그 영혼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마음 아파하실 것을 아시지만 그럼에도 제가 마음에 품고 기도하게 하심으로 그 영혼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려는 것입니다. 바로 목자를 보시고 주시는 기회인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실 때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미리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 알게 하심으로 롯을 마음에 품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목자를 생각하사 한 번 더 마음에 품고 기도할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하신다는 말이지요.
5. 롯과 그의 가족들에게만 주어진 마지막 구원의 기회
그런데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롯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가족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오직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에게만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육으로 보면 공평치 못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너무나 정확한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기회도 주어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 앞에 매우 충성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사랑받는 가족이지요. 그런데 이 가족 중에 한 자녀가 하나님 앞에 노여움을 살 만한 일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공의에 따라 징계가 따라야 할 텐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치 않으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경우가 있지요. 바로 그 가족들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노여움을 산 개인으로 봐서는 당장에 징계를 주어도 마땅하지만 그렇게 하셨을 때 가족들이 겪게 될 고통을 생각하사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사랑받는 가족들을 봐서라도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공의 가운데 모든 일을 이루시되, 어떤 일을 이루실 때 한 가지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파생되어질 일들까지도 다 고려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한 사람을 치리해야 할 때도 저 역시 그 사람 개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과 그 주변 사람들까지도 고려하게 되고 또 그 가족들 중에 정녕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 좋은 가족이 있을 때는 또 고려하고 또 고려하게 됩니다. 혹여 그 사람을 치리함으로 인해 충만하게 충성하고 있는 가족이나 그에게 속한 사람들까지도 낙심하지 않을까? 이런 것까지도 고려하여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또 그 사람이 지금까지 신앙생활해 온 과정들도 다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처럼 여러 가지 면들까지 고려하지 못한 채 당장에 잘못만을 문제 삼아 기회도 주지 않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을 보게 되지요.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도 이처럼 행하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두 번 기회를 가질 수 있겠으며 누가 오늘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 나오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고 공의도 사랑 안에서 행하셨기에 여러분이 기회를 얻고 또 기회를 얻으며 오늘에까지 이를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로 사랑 안에서의 정확한 공의이며 공의 안에서의 사랑이지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기 때문에 공의가 사랑으로 말미암아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제단에 속한 양 떼일 때 하나님으로부터 좀더 특별한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때론 소천하신 분들이 자신의 믿음으로 갈 수 있는 천국의 처소보다 더 좋은 처소로 가기도 하는 일들이 있는 것은 다 이러한 사랑 안에서의 공의에 의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어느 한 면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며 결코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으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말씀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공의에 대해서는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부흥성회 때 공의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 좀더 자세한 설명이 나가게 됩니다.
6. 소돔과 고모라를 살피시기 위해 성령 하나님을 보내신 이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살피시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조금이라도 더 인성적인 면에서 상황을 살피시고 최대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협상을 위해 대표가 갈 때에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간다 해도 대표로 가는 사람의 성품에 따라 얼마든지 온유하게 협상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강경하게 협상할 수도 있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때에 성령님을 보내신 것도 바로 조금이라도 더 인성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함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데 그 중에서 성령님은 인성의 분야가 좀더 강하시지요. 그러므로 좀더 인성적인 면에서 살펴 주시고 더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는 속성이 있으십니다. 반면에 주님은 신성적인 면이 더 강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성령 하나님의 대화를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감히 다섯 번이나 말을 바꾸어 가면서 소돔 성을 위해 간구합니다. 처음에는 의인 오십 인이 있으면 그로 인해 소돔을 멸하지 마시라고 간구하더니 다음에는 사십오 인, 사십 인, 삼십 인, 이십 인, 마침내는 십 인까지 내려 가지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성적인 면이 강하시고 인성의 분야를 잘 이해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오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공의의 법칙상 어차피 소돔과 고모라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어찌하든 한 번이라도 더 사람 편에서 생각하여 기회를 주시고자 했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지요. 저도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를 너무나 잘 알지만 때로는 상대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려 주려고 하기 때문에 공의보다는 사랑에 치우치게 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공의를 행하시는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려는 마음이지만 제 편에서는 딱 잘라서 공의대로 치리하기가 힘들지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늘 저에게 신성과 인성의 조화에 대해 말씀해 주셨던 것이며 얼마 전에 7년 환난과 지옥에 대해 알려 주시는 것도 바로 공의의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저로 하여금 깨닫고 마음에 품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용서받을 수 있을 때까지 품게 하는데 어느 한계를 넘어서 용서받을 수 없다라고 결정이 날 때는 아버지가 품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제 마음이야 용서하고 또 용서하려는 마음이지만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정확한 공의의 선을 알려 주심으로 신성과 인성의 온전한 조화를 이루기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도 주님의 마음도 성령님의 마음도 사랑 자체이시지만 어차피 공의라고 하는 정확한 법칙 안에서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가 존재하고 운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 차원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공의의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공의의 선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사랑으로 역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도 인성의 분야를 더 많이 알고 느끼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성령님이라 했는데 왜 성령님이라 기록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 했는지에 대해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알면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공의는 곧 응답의 공식과도 같아서 공의에 따라 정확하게 적용해 나가면 반드시 응답이 주어지기 때문이지요. 그 방법을 말씀드리자면 너무 많겠지만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일곱 영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응답을 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해 각 사람의 준비된 상태를 측량하는 저울과도 같은 것이 바로 일곱 영이지요.
그래서 부흥성회를 앞두고 돌아오는 주일 대예배와 저녁 예배 때에는 일곱 영에 대해 다시 한 번 증거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들으셨지만 돌아오는 주일 예배를 통해서도 선포되는 말씀들을 잘 양식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요 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축복의 말씀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2:20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