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28)
서 론 / 할례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나이 99세가 되었을 때 그의 앞에 나타나 놀라운 언약의 말씀을 주십니다. 바로 그의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며 열국의 아비로 세워짐으로서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지위가 약속된 것이지요. 물론 그가 하나님 앞에 온전함을 인정받게 되는 것은 장차 독자 이삭을 바치는 시험을 통과한 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로 세워주시는 이 사건을 통해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경작의 역사가 시작되지요.
이때까지도 모든 것을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인간 경작의 역사를 어떻게 이루어 가실지에 대한 윤곽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 경작의 역사의 흐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 이렇게 크게 두 부류에 의해 진행되어 가겠지만 그럼에도 결국 인간 경작의 역사의 흐름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통해 주도되어 가지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것이구요.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만남이기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들을 대동하시고 친히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 언약의 말씀을 주고 계신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언약의 말씀을 받은 아브라함 편에서도 언약에 대한 확증의 증표를 내보여야 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아무리 큰 축복의 말씀을 주셔도 받는 편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이 믿음을 보여지는 행함의 증표로 나타내도록 하신 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창 17:11에 보면 할례에 대해 하나님께서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셨지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 할례가 반드시 행위적인 것으로 나와져야 했지만 성령 시대에 와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봅니다. 육적인 할례를 행하여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사이의 언약의 표징을 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 속하였느냐를 가지고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을 삼게 되지요. 육적인 할례를 해야만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정받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말입니다.갈 3:26-29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바로 마음의 할례이지요. 옷은 영적으로 마음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 가지고 있던 육적인 마음의 옷을 벗고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새롭게 옷 입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죄와 악, 구습을 마음에서 제하여 버리고 거룩하고 정결한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하지요. 이처럼 행위적인 할례가 아니라 바로 마음에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을 가진 사람만이 약속된 후사로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 10:15-16에도 보면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법을 육체의 할례나 행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에 두고 생각에 기록하여 그 법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생각에 기록한다는 것은 혼에도 새기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할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잘 깨달아 열심히 마음의 할례를 이루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본 론 /
1. 하나님의 언약을 듣고 기쁨으로 웃은 아브라함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만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신 것이 아니라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꾸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5-16절에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말씀하고 있지요. 사라 역시 남편 아브라함으로 인해 이처럼 놀라운 축복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어떤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기편에서의 노력과 그릇 준비가 필요하지만 때로는 의인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경우들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을 낳게 하시겠다 말씀하시자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의외의 반응을 하지요.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잘못 해석하면 아브라함이 웃은 이유나 생각한 것에 대해 오해할 수가 있지요. 백 세나 된 자신과 구십 세나 된 사라의 몸에서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웃은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들을 때 어이가 없어서 웃는 그런 웃음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생각한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더욱 신뢰하는 고백을 마음속에서 이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곧 세상의 이치대로라면 그처럼 나이 많은 부부에게서 아이가 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은 이처럼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것을 이루실 줄을 분명히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롬 4:18-20에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했지요.
그러면 본문에 아브라함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웃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기쁨의 웃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후사를 약속하신 이후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브라함은 그 긴 세월 동안 변함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또한 그 약속의 성취가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제 사래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면서 그에게 아들을 약속하시는 축복의 말씀을 들을 때 아브라함은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가 왔음을 마음에 깨달으므로 기쁨의 웃음이 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것을 체험하실 때가 있지요.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있어 기도를 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경우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평안과 기쁨으로 응답의 확신을 주십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즉시 마음에 확신이 오고 평안이 왔다 해도 항상 그 응답의 열매를 곧바로 따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응답의 열매가 눈에 본 바요 손에 만진 바가 되기까지는 가장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있지요. 물론 이처럼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해도 막 11:24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신 말씀대로 이미 받은 줄로 믿기 때문에 마음에는 응답에 대한 확신과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응답의 때가 눈앞에 다가오면 성령의 감동 속에서 이를 느끼므로 더욱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비유를 들어 보면 봄이 되어 씨를 심은 농부는 가을이 되면 열매를 거둘 줄을 믿기 때문에 소망과 보람을 가지고 가을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을이 되어 누렇게 익은 곡식이 들판에 황금물결치고 추수할 때가 며칠 남지 않게 되면 농부의 마음은 이전과 비할 수 없는 더 큰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지요. 열매가 바로 눈앞에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온 후사에 대한 약속이 이제 실제로 이뤄질 때가 다가 왔음을 깨닫게 되자 그 기쁨으로 인해 웃게 되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아브라함이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했던 말에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고백의 의미가 아니라 그렇지만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라는 믿음의 고백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이스마엘의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했지요. 이 역시 어떤 사람들은 마치 아브라함이 "내가 늙어서 아이를 더 가질 수 없으니 이미 낳은 아들이나 하나님 앞에 살게 하소서" 고하는 의미로 알고 있는데 이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할 만큼 믿음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아브라함을 택하시지도 않았겠고 그에게 약속의 씨가 주어질 수도 없었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호리라도 의심하지 않았고 약속하신 대로 새로운 아들을 얻게 될 줄을 분명히 확신했습니다.
본문에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은 "이스마엘 또한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의미이지요. 여러분 중에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이라면 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이스마엘이 약속의 후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스마엘 또한 귀하고 소중한 아들입니다. 앞으로 날 약속의 씨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이뤄지고 그 후손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통성을 이어갈 것을 아브라함도 알지만 그렇다하여 먼저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모른 척할 아브라함이 아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된 후사에 대한 언약을 받는 자리에서 또 다른 아들 즉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부탁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태어날 약속의 씨만이 아니라 이 이스마엘도 기억해 주소서 이스마엘도 축복하사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여 주소서" 하는 아버지로서의 애틋한 사랑의 간구인 것이지요.
이러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축복의 언약을 주시므로 아브라함의 마음을 위로해 주십니다. 20절에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하신 것입니다. 비록 이스마엘의 후손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하실 것은 아니지만 그 또한 아브라함으로부터 낳은 한 씨임으로 인해서 그리고 아비의 사랑으로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므로 그에게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약속이지요.
그래서 창 25:13-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 대해 주신 약속이 이후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된 것을 봅니다.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십이 방백이었더라" 했지요. 열두 방백을 이루는 큰 나라가 되게 하신다는 약속이 이처럼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인해 롯의 소유까지도 창대하도록 복을 주셨지요. 이후에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에 거할 때도 아브라함의 간구를 들으시므로 멸망하는 소돔 성에서 롯의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마엘 역시 아브라함에게 속한 자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 후손들이 나름대로 번성하며 복을 누리고 살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지요.
그러나 이스마엘은 어차피 믿음의 후사로서 세워질 사람은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에 대한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주시기 전에 먼저 다시 한 번 이스마엘은 약속된 후사가 아니요 사라를 통해 낳을 아들이 약속된 후사임을 분명히 해주고 계십니다.
20절에서 이스마엘에 대한 약속을 주시기 전에 먼저 19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니라" 하시는 것은 앞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했던 아브라함의 청을 거절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것은 이스마엘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의미이지요. 하나님께서 이루실 언약은 반드시 사라가 낳게 될 이삭을 통해 이뤄진다는 말씀입니다.
3. 약속의 씨, 이삭의 탄생을 알려주신 하나님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거듭 거듭 강조해서 약속의 씨인 이삭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21절에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씨가 언제 태어날 것인지 구체적인 시기까지도 밝혀 주고 계십니다.
암 3:7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믿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아브라함에게 때로는 앞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며 그를 인도해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알려 주셨고 그의 후손들이 어떤 삶을 살지도 알려주셨으며 멜기세덱에 대해서도 알려주셨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믿고 신뢰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 관계가 쌓여지면 하나님과 많은 비밀한 것을 나눌 수 있게 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십니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한 번 주신 말씀은 결코 의심하거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록 그 말씀이 성취되기를 믿음으로 바라며 나가시는지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변치 않는다면 한번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민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한 번 예언하신 말씀은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져 왔지요. 인간 경작의 역사를 꿰뚫으시며 모든 것을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한 치 오차도 없이 이루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축복의 말씀을 주시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22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를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하게 아브라함을 인도해 가시는지 또 얼마나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시는지 알 수가 있지요. 아브라함에게 있어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오시거나 환상과 이상을 통해 그를 만나주시고 인도해 가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섬세하고 자상하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므로 이 땅에서 경작받는 삶 가운데서도 매순간 승리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4. 할례를 준행한 아브라함과 그의 가속(家屬)들
본문 23-2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올라가신 후 아브라함은 즉각 모든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증거를 나타내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과 아들 이스마엘은 물론이고 자신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준행하였지요. 집에서 난 자들만 아니라 돈으로 산 자들까지도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로 할례케 함으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순종했던 것이지요.
더욱이 26-27절에 보면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말씀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할례를 미루거나 육신의 생각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일에 모두가 할례를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육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많은 수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할례 한다는 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일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기도 한 일이지요. 할례를 하게 되면 적어도 며칠간은 통증이 있고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한꺼번에 할례를 했을 때 혹시 주변의 적이 공격이라도 해오게 되면 이 때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생각을 동원하자면 교대로 할례를 행할 수도 있는 것이고 당장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이나 여건을 고려하여 적당한 때를 골라서 할례를 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이유나 생각도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올라가신 그날로 당일에 모든 남자를 할례하게 했다는 사실이지요. 이 얼마나 절대적이면서 온전한 순종입니까? 그러니 이러한 아브라함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는지요?
아브라함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지체하거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즉시로 행하는 믿음의 행함을 나타내 보였기에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공의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도구로서 온전히 쓰임받을 수 있는 온전한 자격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 55:10-11에 보면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근본의 소리는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말씀하신 것을 얼마나 믿고 변함없이 신뢰하여 순종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오늘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한점 의심 없이 믿고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이렇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저것은 저런 문제가 있어서 힘들겠는데요" 하는 어떠한 변명이나 이유도 없었고 오직 아멘과 예로 달려왔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대로 반드시 이루어 주셨구요.
아무리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을 주셨다 해도 만약 사람 편에서 이를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면 또 기회를 주셨다 해도 그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약속한 축복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오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여 행하는지를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명심하여 하나라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는 것은 물론이요 즉시로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응답받는 축복의 길입니다. 나 보기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데요."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온전한 순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과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비교해 보심으로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믿음의 순종과 행함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의 순종과 행함이 하나님께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여러분을 통해서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과 같은 축복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2:28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