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25)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롬 4:18-22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현실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결과를 보았지요. 만약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라거나 현실로 얼마든지 가능한 것을 바라는 것이라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 말씀하고 있지요. 이와 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막 9:23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불가능이 없는 영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한 가지 사건만 놓고 보아도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이 아브라함과 비교할 때 과연 어떠한가를 분별할 수가 있지요. 본 제단에 주신 말씀들은 물론이고 여러분 개개인에게 주신 축복과 언약의 말씀들을 여러분은 과연 얼마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까? 혹여 믿음이 약하여지지는 않았는지요? 혹여 의심하지는 않았는지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이러한 영의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지금까지 연단하며 다듬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기까지 하루 아침에 되어진 것이 아니었지요. 그를 택하여 부르시고 친히 모든 삶을 주관하시며 연단하고 또 연단하셔서 온전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도록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연단의 과정 속에 항상 그와 함께했던 사람이 있었지요. 바로 그의 아내 사래였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 아내를 빼앗기는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했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축복을 받아 나가는 과정에도 항상 곁에서 아브람을 지켜본 사람이었으며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해올 때도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사래였지요.
본 론 /
1. 스스로 연단을 자초한 사래
이처럼 아브람과 모든 연단의 과정 속에 함께했던 사래였지만 그렇다 해서 그의 믿음이 아브람과 같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보고 체험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사래는 그것이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으로 온전히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어 드린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지식적인 믿음으로 쌓여 왔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요. 똑같이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듣고 체험했다 하여 함께한 모든 사람의 믿음이 똑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만으로 똑같이 믿음이 성장할 수 있다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의 믿음도 벌써 대부분은 믿음의 5단계에 들어와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똑같은 시기에 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해도 어떤 사람은 영으로 깊이 들어와 있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해외 성회에 함께하여 똑같이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다 해도 어떤 사람은 그 성회를 통해 영적으로 크게 변화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별로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지요.
그렇다면 왜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듣고 체험함으로 인해 얼마나 자신의 생각과 틀과 이론을 깨뜨리며 또한 얼마나 마음에 할례해 나가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대단하구나 단순히 이처럼 지식적인 차원에 머물고 만다면 아무리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정작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가 없지요. 사래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보고 듣고 체험하면서도 그것을 지식적인 차원에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래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지요. 1절에서는 오늘 사건의 배경과 사건 발단의 원인이 되는 하갈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지요.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나이가 칠십을 훨씬 넘었지만 아직까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래에게는 애굽 사람 하갈이라는 여종이 있었지요. 그러면 사래가 왜 지식적인 믿음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고 했는지 그 이유가 이어지는 2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사래는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말하고 있으며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지요. 더욱이 이어지는 사래의 말을 보면 사래가 지금 얼마나 자신의 생각 가운데 일을 결정하고 그것을 주장해 가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래의 생각으로는 자신의 종인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서라도 자녀를 얻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사래는 이처럼 중요한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자기 생각대로만 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여쭈어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도 아니었고 남편에게 한 마디 상의를 한 것도 아니었지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내가 생산치 못한다고 스스로 단정 짓고 이것을 통보하듯이 남편 아브람에게 말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계획 역시 자기 생각대로 통보하고 있습니다. 이미 마음에 정하고 말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시험이나 환난 또는 문제가 닥쳤을 때 그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 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심지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험 환난을 당하고 문제 가운데 얽히고설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는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항상 자녀들에게 좋은 것 주기를 원하시며 시험 환난과 문제 가운데서 건져 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요. 그런데도 이러한 하나님을 오해하여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고 마는 것입니다.
욥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마치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 의로운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괜히 자신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 가운데 깨우쳐 주시자 욥은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기를 욥 42:3 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하며 이어지는 6절에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욥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여 변화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전보다 더한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셨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문제 가운데 처하게 되면 먼저 내가 왜 이런 문제를 만났는가? 그 원인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발견하여 해결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녀된 여러분을 문제 가운데서 건져 주실 수가 있지요. 그런데 어떤 경우는 아무 원인이 없는 것 같은데도 어떠한 문제가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축복을 주시기 위한 연단이지요. 이때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끝까지 감사와 기쁨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음으로 기쁨과 감사로써 연단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래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전혀 없었지요. 사래가 정녕 남편 아브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면 자신이 이처럼 생산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남편에게 말하여 원인을 찾으려 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 했을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남편과 상의하여 방법을 찾았겠지요. 그러나 사래는 이미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다 하고 자기 스스로 단정을 지은 상태에서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까지 자기 생각 가운데 결정하여 이를 남편 아브람에게 통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영적인 질서를 떠나 육적인 질서 가운데 보아도 전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이지요. 가정의 작은 일도 아니고 사래가 자신의 권한 가운데서 스스로 결정할 일도 아닌 것을 가정의 머리인 남편에게 상의 한 마디 없이 스스로 결정하고 통보한다는 것은 가정의 육적인 질서상으로도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영적인 질서를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과의 밝은 교통을 통해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남편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계신지를 당연히 물었어야 할 텐데, 그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사람의 방법을 찾았다는 것은 영적으로도 너무나 무지한 모습이었지요. 그러니 이와 같이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동원한 것이 결국에는 스스로가 져야 하는 연단의 고통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생각과 사람의 방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나갔을 때는 연단이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람은 이미 아내 사래를 빼앗기는 연단을 통해 사람의 생각 가운데 방법을 동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것이며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지만 같은 사건을 함께 겪었던 아내 사래는 그 연단의 교훈이 마음에 영으로 심겨지지 않았기에 이처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러분이 어떤 문제를 만났다면 먼저는 당연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기도를 조금 해 보다가 당장 눈에 보이는 길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내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연단의 길을 자초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맡겼으면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의지해 보다가 빨리 응답이 오지 않을 경우 의심하거나 세상 방법을 찾을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응답 주실 수가 없지요. 약 1:6-8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말씀한 대로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하나님께 정말 믿고 맡겼다면 응답이 오지 않는다 해도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있고 당장 행동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않으시는 경우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래는 어떠했습니까?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기 생각과 자기 뜻 가운데 자신이 결정한 바를 관철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도, 아브람의 뜻도 아니었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말을 들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했지요. 아브람은 아내 사래에게 자신이 깨닫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비추거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는 식으로 아내를 달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잠잠히 아내의 말에 따라 주었지요.
그렇다면 아브람은 왜 그런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먼저 아브람과 사래 이 두 사람의 성격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래의 모습만 보아도 그녀가 평상시에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능히 짐작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기 주장, 자기 생각, 자기 뜻이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든 관철시켜 나가는 모습이었지요. 아브람은 바로 이러한 아내 사래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도 아브람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내 사래가 이미 정한 일을 바꾸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지요. 자신이 아무리 이런저런 말을 해도 사래는 결국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아브람은 앞서 조카 롯에게 땅을 양보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사람과 화평하기 원하며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기 원하는 마음이지요. 죄가 아니라면 상대의 뜻에 따라 이것도 가하고 저것도 가한 마음이며,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주는 마음입니다. 내 믿음에 맞추지 않고 상대에게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것이 바로 화평의 마음인데 아브람에게는 이러한 화평의 열매가 맺혀 있었기에 오늘 본문과 같은 상황에서 순순히 아내 사래의 뜻을 따라 주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에 어떤 욕심이나 유익을 좇은 것이 아니라 이미 아내 사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상대의 마음에 맞춰 주려 했던 것이지요.
만약 이런 상황에서 아브람이 아내 사래의 말을 거절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 사래가 "그래요, 당신의 말이 맞네요.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나왔을까요? 우리는 이어지는 본문 5절 말씀을 통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자초한 연단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자 사래는 남편 아브람에게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하며 오히려 남편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온유하며 모든 것에 있어서 화평을 좇고자 하는 아브람은 당시 상황에서 아내 사래의 말에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 아니었다면 아브람은 당연히 사래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이처럼 하갈이라는 여인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 것도 결국은 인간 경작의 커다란 계획 속에 들어있는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하갈을 첩으로 취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이제 이어지는 3절에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 후이었더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부연해서 설명해주고 계신 말씀이지요.
아브람이 하갈을 첩으로 맞은 때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 후라 말씀한 것은 그 당시 모든 것이 안정되고 부요하며 평화로운 상황이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낯선 곳에 가서 정착할 때 처음에는 이런저런 어려움도 만나게 되지만 그것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다 보면 점차 안정적인 상황에 접어들 수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람도 가나안에 정착한 지 십 년쯤 되면서 이제는 전쟁의 기억도 사라져 가고 있었고 든든한 터전 속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지요. 삶에 여유가 없이 연단을 받고 있을 때는 사래도 자신이 생산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마음을 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나 이제 모든 것이 안정되고 기반이 잡혀 가게 되자 늘 마음에 가지고 있던 후사에 대한 문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나이도 75세가 넘었다 이 말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사래는 자기 생각과 방법에 맞추어 자신의 종을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주었던 것이구요.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자신의 생각과 사람의 방법을 동원한 결과는 곧 연단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2.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는 하갈
4-5절에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래는 하갈이 자신의 종이었기 때문에 설령 하갈이 아이를 가지게 되어도 설마 그 영향이 자신에게까지 오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속한 종이기에 사래는 하갈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이만 낳으면 아이는 자기 것이고 종의 것이니까 자기 것이고 아브람의 씨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키우고 자기 마음대로 할 줄 알았다 이 말이에요.
그러나 하갈이 막상 잉태하게 되자 그 영향은 곧바로 사래에게까지 오게 됩니다. 하갈은 자신이 잉태한 것을 깨닫자 주인인 사래를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하갈은 애굽 사람으로서 주인인 아브람을 통해 비록 하나님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하나님을 마음에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진리로 변화받은 사람도 아니었지요. 그러했기에 자신의 잉태함을 알았을 때에 그 안에 있던 악이 주인을 멸시하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요 은혜에 감사치도 못하는 마음이지요.
성도 여러분, 어쨌든 종의 신분에 있던 하갈이 주인인 아브람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은 여주인인 사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래가 좋은 마음에서 하갈을 남편 아브람에게 준 것은 아니었지만 하갈의 입장에서는 은혜를 입은 것이었지요. 더욱이 자신이 아브람의 아이를 잉태했다 하여 아직까지 자신의 신분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갈은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기까지 했으니 이는 하갈의 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인정받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에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자신에게 은혜를 끼쳐 준 사람에 대해 감사치 못하며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경우가 그러했지요. 자신에게 찾아와 왕으로 기름을 부어 주었던 사무엘 선지자에 대해 처음에는 지극히 겸손한 모습이었으나 나중에는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 앞에 나가기를 꺼려할 정도로 무례한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나는 사울 왕과 같지 않다 할 것이 아니라 나를 전도해 준 사람, 내가 초신자 때 은혜를 주고 이끌어 주었던 사람 내가 연단 중에 있을 때 힘을 주었던 사람, 이런 분들에 대해 변치 않는 마음으로 감사하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내가 그런 사람들보다 더 높은 직분에 있다 해서 또는 내가 이제는 가르치는 입장에 있다 해서 그분들을 처음 대하던 마음이 변하여 혹여 높아진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은혜받고 도움받았던 분들에 대해 이제 이 정도 감사하고 은혜를 갚았으면 됐겠지 이런 마음은 아닌지요? 내가 윗사람의 인정받고 사랑받는다 해서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자 하며 질서를 무시한 채 높아져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 본문의 하갈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봄으로 롬 12:16에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는 말씀과 같이 늘 마음을 낮은 데 두고 겸비한 모습으로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보면 하갈만 잘못했다 할 것이 아니라 사래에게서도 그 악이 드러나고 있지요. 자기 편에서는 선을 베풀었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뜻하지 않은 결과로 돌아오자 곧바로 악이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연단을 통해 드러나는 사래의 마음을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분들은 보면, 자신이 아는 하나님의 뜻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A냐 B냐 하는 식으로 나눌 수 없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과 형편과 처지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 앞에 쌓아온 선과 믿음의 행함에 따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다르게 적용될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이 아는 것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한다면 이로 인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일이라 해도 제 편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여 지시하고 명령해 본 적이 없지요. 또한 더 좋은 길이 있다 해서 그 길을 가도록 상대에게 강요해 본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되 받는 편에서 본인의 믿음으로 결정하여 선택해 갈 수 있도록 해 주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내가 머리라고 해서 내 뜻만이 옳다고 주장하시는지요? 아니면 내 뜻이 옳다고 생각되면 비록 내가 아랫사람이라도 질서를 무시한 채 무조건 밀어붙이십니까? 오늘 본문의 아브람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자신의 믿음에 맞추기보다는 자기 보기에 옳은 것을 좇기보다는 상대에게 맞춰 주는 화평의 마음이었지요. 그것이 비진리나 죄였다면 단호히 거부하며 결코 타협하지 않았겠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면 아브람은 자기 아내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며 그 뜻을 좇아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바로 부부 간이나 부모 자녀 간에 이처럼 화평을 좇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관도, 선교회도, 연합회도, 구역, 조, 지역, 교구도, 모두가 이처럼 서로 서로 상대의 마음에 맞춰 주며 상대를 위하는 화평의 마음을 이룬다면 그런 곳은 부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와 비진리는 잘 분별하시되 진리 안에서는 서로가 이해하고 양보하는 화평의 마음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 5:9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2:40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