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20)
서 론 /
오늘은 2004년도 들어서 처음으로 드리는 금요철야 예배입니다. 본교회의 금요철야 예배는 이미 개척 때부터 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전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도 은혜받기 위해 참석하시는 분들이 많지요. 또한 본교회 성도님들 중에 은혜를 사모하고 믿음 있는 성도라면 당연히 금요철야 예배는 드리고 있는 줄로 압니다.
금요철야 때 방영되는 만민 매거진은 참석하신 여러분이 믿음을 더할 수 있도록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들을 보여 주고 있고 증거되는 말씀은 여러분을 날로 더 깊은 영의 세계 가운데로 이끌어가고 있지요. 2부 시간의 충만한 찬양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감동감화 충만함을 입을 수 있구요. 그러니 여러분이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온전히 한 밤을 철야로 드리신다면 금요철야 예배가 여러분에게는 너무나 큰 축복과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교회들이 점점 모이기를 폐하며 은혜가 식어져 가고 있는 이때에 여러분은 히 10:25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말씀처럼 올 한 해 동안도 더욱 모이기에 힘쓰며 영을 사모하여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올해 아버지의 역사가 거침없이 펼쳐 가듯이 여러분 모두도 영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해 가는 축복의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 론 /
1. 아브람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
조카 롯이 먼저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는 요단 온 들을 택하여 떠난 후 가나안 땅에 머물며 평안과 축복 가운데 살아가던 아브람에게 어느 날, 사람 하나가 다급하게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아브람에게 조카 롯이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 갔다는 소식을 전하지요. 북방에 있는 네 나라의 왕이 연합한 군대가 당시 롯이 거하고 있던 소돔 땅까지 쳐들어와 롯과 그에게 속한 소유의 사람들까지도 포로와 노획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즉시 자신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적의 군대를 추격해 가지요. 이때 아브람과 함께한 사람의 수가 그리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인과 또 자신과 동맹을 맺고 있던 아모리 족속 사람을 합쳐도 네 왕이 연합한 적의 군대에 비하면 그 수가 많은 것이 아니었지요.
본문 24절에도 보면 아브람과 함께 전쟁에 나갔던 사람의 이름이 그와 동맹했던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 이렇게 세 사람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이러한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적의 군대를 쫓아가서 적을 파하고 조카를 구해 왔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브람이 이처럼 담대히 나가 싸워 이길 수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브람은 현실을 보지 않고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자신과 늘 함께하시며 지키시고 인도해 가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아브람은 군사의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담대히 나가 적과 싸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 20:7에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말씀한 대로 군사의 숫자라는 것이 사람 편에서는 중요하겠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사사기 7장에도 보면 사사 기드온은 그를 따르는 삼백 명의 군사만을 가지고 메뚜기의 중다함 같은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다른 동방의 모든 사람의 연합군을 크게 무찔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도와주시니 단 삼백 명의 군사를 가지고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엄청난 숫자의 적군을 물리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주신 전략이 바로 군사를 세 무리로 나누어 밤을 틈타서 적을 교란시켜 적이 스스로 자멸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창 14:15에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했다 말씀하신 대로 아브람 역시 적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명하셨던 방법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오직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 적과 맞서 싸웠지만 그렇다 해서 무조건 힘으로만 싸운 것이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적을 무찌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다윗 왕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 일일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여쭈어 응답을 받았듯이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람 역시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 앞에 여쭈어 길을 인도받았던 것이지요.
2. 아브람의 선한 마음
지난 시간에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는 아브람의 모습을 통해 그의 선한 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다 했습니다. 자신의 조카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선의 마음이지요. 아브람은 조카 롯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입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큰 은혜를 베푼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는 마음이 변함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은혜를 받은 사람 편에서도 얼마나 쉽게 은혜를 잊고 변개해 버리는지요. 우리는 다윗 왕의 경우를 통해 한 번 은혜를 받고 사랑의 마음을 주었던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인지를 보게 됩니다.
다윗에게는 요나단이라는 절친한 벗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자신을 죽이려 하던 사울 왕의 아들로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이었지요.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은 요나단 자신이 올라야 할 왕위를 대신 차지하게 될 사람이었음에도 요나단은 이러한 다윗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삼하 1:26에 다윗이 고백하기를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할 정도로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요. 그리고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울 왕으로부터 끝까지 다윗을 보호하며 도와주었습니다.
이러한 은혜와 사랑을 입은 다윗 역시 훗날 왕이 되었을 때 예전에 받은 은혜를 결코 잊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왕이 된 다윗은 즉시로 은혜 갚을 방법을 찾았습니다. 요나단은 이미 전쟁에서 죽은 후였기에 삼하 9:1에 보면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사람이 바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었지요.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끝까지 죽이려 했던 사울 왕의 손자요 요나단이 죽은 상황에서는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자신의 왕위를 넘볼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왕위를 굳건히 해야 하는 다윗 왕의 입장에서는 경계해야 하는 인물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다윗 왕은 이러한 므비보셋을 너무나도 극진히 대접해 줍니다.
삼하 9:7에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했던 것이지요. 그의 조부 사울 왕의 소유였던 밭을 다 돌려준다는 것만도 그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처사일 텐데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자신과 한 상에서 먹는 은총까지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삼하 9:11 후반절에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물론 다윗 왕이 요나단의 생전에 그로부터 여러 번 도움을 받으며 은혜를 입긴 했지만 다윗 왕은 이처럼 한 번 은혜를 받고 또 마음 중심에서 사랑했던 요나단에 대해 그가 죽은 후에라도 그의 후손을 통해 끝까지 은혜를 갚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막상 은혜를 받을 때는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다가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상황이 나아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은혜를 잊는 사람들이 허다하지요. 그러나 다윗은 그런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진리의 선한 마음이 임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의 경우는 더더욱 조카 롯에게서 어떤 은혜를 입은 것도 아니었고 하란을 떠난 이후 항상 보살피며 은혜를 베풀어 왔음에도 이처럼 조카 롯이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또다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그를 구하러 달려갔던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처럼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아브람과 어찌 동행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도 바로 이러한 마음만 가지게 되면 누구나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게 되고 축복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3. 아브람과 멜기세덱과의 만남
본문을 보면 소돔왕이 적의 연합군을 파하고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오던 아브람을 영접합니다. 그런데 어떤 앞뒤 상황 설명도 없이 갑자기 살렘 왕 멜기세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멜기세덱과의 만남이 갑자기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이 안에는 커다란 영적 비밀이 담겨 있으므로 하나하나 설명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멜기세덱에 대해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 민족에서 제사장이라고 하는 직분이 정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브라함 시대에서 한참 뒤인 모세의 형 아론으로부터였지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 셋째였던 레위의 계보를 좇아 나온 후손 중에서 아론을 시작으로 하여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제사장 직분을 수행케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제사장의 직분이 생겨나기도 훨씬 전에 오늘 본문에는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등장하고 있지요.
사도 바울은 바로 여기에 대해 히 7:10에서 설명하기를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만났을 그 당시에 제사장이 배출되는 레위 지파의 조상인 레위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말씀이지요. 이는 다시 말해 멜기세덱은 육적인 계보를 좇아 세워진 제사장들과는 달리 그에게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주어진 데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히 7:11에서는 여기에 대해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말씀하고 있지요. 반차란 품계 또는 신분, 등급의 차례를 뜻합니다. 여기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이란 바로 대제사장이시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단번에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인류 사이에 있었던 죄의 담을 헐어 주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이어지는 히 7:15-17에서는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서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않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라 했지요.
예수님께서 레위 지파의 반차를 좇지 않고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나셔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으셨던 근거를 바로 멜기세덱에게서 찾고 있는 것이지요. 시 110:4에도 장차 이 땅에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해 예언하기를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4. 살렘왕 멜기세덱은 과연 누구인가?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시요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신 예수님께 견줄 만한 인물인 멜기세덱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만약 멜기세덱이 피조물 중에 하나라면 어찌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다 말할 수 있겠는지요? 반차란 앞서도 설명했듯이 품계, 신분, 등급의 차례를 뜻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반차를 좇았다고 할 수 있으려면 멜기세덱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못지 않은 위치에 계신 분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분이 누구이실까요?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과 동등한 반열에 서실 수 있는 분이라면 그분은 당연히 성령님이심을 알 수가 있지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혹여 생각을 동원하시는 분들은 본문에 분명 "살렘 왕 멜기세덱이라고 했는데 어찌 그분을 성령님이라고 하십니까?" 하고 물으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살렘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살렘이 히브리어로는 안전한, 평화로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육적으로는 훗날 예루살렘이 되는 도시의 지명을 나타내지만 영적으로 살렘은 아버지의 나라를 뜻합니다. 시 76:1-2에도 보면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장막이 살렘에 있다 말씀하지요.
또한 시 135:21에는 "예루살렘에 거하신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예루살렘이란 육적인 지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을 뜻하는 말로서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강의 성" 또는 "살렘의 성"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계 21:2에 보면 이처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을 이 땅의 성인 예루살렘과 구분하기 위해 새예루살렘이라 표현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살렘 왕이란 단순히 이 땅의 육의 도시를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시는 성령님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멜기세덱이 왜 성령님이신지에 대해 좀더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에는 멜기세덱에 대해 조금은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고 있지요.
히 5:10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하여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셨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히 5:11에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즉 히브리서의 저자 사도 바울은 멜기세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말하였을 때 듣는 사람 편에서 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말을 아끼고 있는 것입니다.
벧후 3:16에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는 말씀처럼 영의 지식이 없고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자칫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풀어 화(禍)를 자초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 사도 바울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감 가운데 멜기세덱에 대해 깨달을 수 있도록 히 7장에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4절에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하면서 이어지는 7절에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말씀했지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본문 19-20절에 보면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말씀합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축복을 빌어 주고 있고 아브람은 이러한 멜기세덱에게 자신이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고 있지요. 히브리서 7장에서는 바로 이 장면을 설명하면서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복을 빌어 준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브람은 장차 믿음의 조상이요, 음부에서도 머리로서 구약시대에는 구원받을 영혼이 죽으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영적인 수준이나 천국에서의 서열을 생각할 때 감히 피조물로서 아무나 "그보다 뛰어나다" "더 높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아브람을 축복할 만큼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라면 누구이겠습니까? 더욱이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십의 일조를 드리고 있지요. 십의 일조라는 것이 아직 율법에 의해 정해지지도 않았던 때였지만 아브람은 마음의 주관을 받아 이처럼 멜기세덱에게 십의 일조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아브람은 멜기세덱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도 되지요.
히 7:3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해 매우 결정적이면서도 중요한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 했는데 이 조건에 맞는 피조물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히 7:24에 보면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하여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제사장의 직분이 영원할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그리고 히 10:21에는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하여 주님께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큰 제사장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 역시 항상 제사장으로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것입니다. 방불(彷佛)하다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는 뜻으로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멜기세덱을 이렇게 표현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요. 이미 창세기 강해를 통해 영적인 말씀을 들어오신 분들은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아시지만 이러한 영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만약 성령님에 대해 밝히 말해 준다면 이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엉뚱한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을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만 하고 정확한 표현을 피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처럼 멜기세덱에 대해 밝히 깨닫고 있었던 히브리서의 저자였기에 히 1:6에 보면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하여 주님을 맏아들(firstborn)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왜 주님을 맏아들로 표현했는지, 또한 예수님을 독생자라 표현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오늘은 멜기세덱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드렸는데 아마 영적인 것을 사모하시는 분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 시원하게 풀리는 분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깨우치게 되면 깊은 영적인 분야에 대해서도 성경 안에서 얼마든지 해답을 찾아갈 수가 있지요. 다음 시간에도 계속해서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이 나갈 텐데 여러분이 다음 시간의 말씀을 듣게 되면 성경을 통해 더 밝히 확증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당부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영적인 말씀을 들으실 때는 결코 사람의 생각이나 지혜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2:12-13에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지혜 가운데 풀려고 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깨우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영의 지식들을 알고 영의 세계에 대해서도 알아야 영으로 들어갈 수가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도 밝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큰 능력이 되고 믿음이 되어 신속히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의 사람들로 온전히 나오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8-05-07 오전 11:59:39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