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94)
서 론 / 홍수의 시작과 함께 거두어진 창조의 근본된 빛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까지 이 땅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둘러놓으신 창조의 근본된 빛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이 땅과 그 안에 속한 모든 것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 들어 있었지요. 물론 빛이 거두어진 후에도 천하만물은 모두가 하나님의 주관 아래 놓여있지만, 특별히 빛이 둘려 있는 동안에는 그 빛 안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비롯하여 그 안에 있는 모든 식물과 동물과 사람까지도 영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영향력으로 인해 당시에는 자연 환경도 생물이 살아가기에 너무 좋았고, 동물들도 매우 온순하였으며,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들의 수명도 지금보다는 훨씬 길었습니다.
그런데 홍수의 시작과 함께 빛이 거두어지자 이때부터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 버렸지요. 빛이 거두어지면서 하나님의 능력도 거두어지자 이 땅과 땅에 사는 모든 만물들은 근본 육의 속성대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은 하나님께서 둘러주신 빛으로 인해 드러나지 못하고 잠재되어 있던 육의 속성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 땅에는 육적인 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새로운 육의 질서가 자리잡게 되었고, 동물들도 근본에 내재되어 있던 육의 속성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지요. 물론 아담의 범죄 이후로 사람들은 점점 악해져왔지만 홍수 후에는 근본에 내재되어 있던 육의 속성들까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더 빠르고 깊게 악으로 물들어갔던 것입니다.
본 론 / 홍수 심판의 영적인 의미
1. 인간 경작의 시작
하나님의 인간 경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때부터가 바로 본격적인 경작의 시작이었지요. 창 3:23에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을 시작하신 근본 목적은 사람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로 본성 속에 있는 육의 속성들까지도 벗어 버림으로 온전한 영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홍수와 함께 빛이 거두어지면서 비로소 본성 속에 있던 육의 속성들까지 개간하는 본격적인 인간 경작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한 가장 두드러진 변화가 바로 수명의 단축입니다. 빛이 둘려져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영의 흐름을 탔기 때문에 사람들의 수명도 매우 길었지요. 사람들의 노화 속도가 원래 육의 법칙보다는 훨씬 늦어질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빛이 거두어지고 나니 노화의 속도가 원래 육의 법칙대로 진행되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이 육에 물들어 갈수록 노화의 속도 역시 빨라지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창세기 11장을 보면 '사람들의 수명이 어떻게 단축되어 가는가' 하는 과정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홍수 이후 겨우 300여 년이 지난 아브라함의 대에 와서는 홍수 이전에 구백 세가 넘던 사람들의 수명이 이미 이백 세도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경우는 좀 달랐지요. 노아만은 빛이 거두어진 후에도 새로운 육의 법칙에 적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전에 빛으로 둘러져 있던 당시의 법칙에 적용을 받았습니다. 홍수 이후에도 삼백오십 년을 더 지내며 구백오십세를 향수할 수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아들 '셈'에 이르러서는 이미 새로운 육의 법칙에 적용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수명이 육백 세로 급격히 줄어들었지요.
2. 이 땅에 살던 에덴 동산의 사람들에 대한 심판
이처럼 하나님께서 지구를 두르고 있던 빛을 거두시고 홍수의 심판을 내리신 데에는 당시 이 땅에 내려와 살던 에덴 동산의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생령으로 지음을 받았던 에덴 동산의 사람들은 비록 이 땅에 내려와 살고는 있었지만 이 땅에도 하나님께서 둘러주신 빛이 존재하는 한은 계속해서 영의 흐름 속에 살아갈 수가 있었지요. 그들은 빛의 공간인 에덴 동산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이 땅이 빛으로 계속해서 둘려 있는 이상은 비록 에덴 동산에서처럼 영생하지는 못한다해도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 생명이 연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이 땅이 계속해서 빛으로 둘러있고 홍수의 심판도 없었다면, 당시에 이 땅에 내려와 살던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생명을 연장하며 이 땅에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생명을 연장하며 살아가기에는 이미 너무나 악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악으로 물들어 육체가 되어버린 그들을 더 이상 빛의 공간에 머물게 하면서 생명을 연장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공의의 법칙에 맞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빛을 거두시고 홍수의 심판을 통해 이들도 함께 멸하셨던 것이지요.
창 6:3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신 말씀이 바로 장차 있을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빛으로 둘러진 공간 안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생명을 연장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이 육체가 되어버림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한정시키실 수밖에 없으셨지요. 그렇다고 그들의 삶을 꼭 일백 이십 년으로 한정지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 일백이십 년은 그들에게 남은 한정된 시간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로서 제시해 주신 것이라 했지요. 즉, 일백이십이라는 숫자에는 빛의 수인 12(십이)와 관련하여 '빛과 어둠을 나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홍수의 심판을 통해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이 땅의 모든 어둠을 멸하셨던 것이지요.
3.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이루어진 홍수 심판
본문 4-5절에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지금 노아에게 앞으로 칠일 후면 이 땅에 홍수의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신데 이는 역으로 말하면 앞으로 심판의 순간까지는 아직 "칠일"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여기에 아버지 하나님의 정확한 공의가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의 심판이 있기 전에 이미 여러 차례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돌이키지 않고 악을 더하므로 결국 홍수의 심판에 이르고 말았지요. 이미 심판을 돌이킬 수 있는 한계선을 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세상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칠일'이라는 시간을 주고 계십니다. 완전수인 7만큼의 날을 더 주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것이 왜 하나님의 공의일까요? 칠일이라는 시간을 더 주셨음에도 결국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으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도 누구 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이의(異議)도 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회개할 기회를 여러 차례 주셨지만 다시 한 번 회개의 기회를 주시므로 "나는 회개할 기회가 없어서 못했습니다" 라는 변명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요나서에 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던 니느웨 백성들에게도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선지자 요나를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시고 '사십일'이라는 유예 기간까지 주시지요. 만약 요나를 보내시지도 않고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돌이킬 시간마저 주지 않으신 채 곧바로 니느웨 백성들을 심판하셨다면 혹여라도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면 저는 회개하고 돌이켰을 것입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요. 이처럼 유예기간을 주시면서까지 마지막 기회를 주셨으니 이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해 이유를 달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았지요. 왕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과 그에 속한 짐승들까지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회개하니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려던 계획을 거두셨습니다. 철저하게 통회자복하게 됩니다.
이처럼 심판을 내리시는 것도, 심판을 거두시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정확한 공의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들이지요. 바로 홍수의 심판이 있기 칠일 전에 노아에게 다시 한 번 "지금부터 칠일이면" 홍수의 심판이 있게 될 것이고 그것을 통해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 버리시겠다 하신 말씀도 마지막 순간까지 공의 가운데 심판을 피할 기회를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데에는 한없는 긍휼과 용서의 마음 또한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에게 사십 일의 시간을 주신 것이나 홍수의 심판이 있기 전에 칠 일의 시간을 더 주신 것 모두가 어찌하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심판에 이르지 않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지요.
이때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홍수가 있기 칠일 전부터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선택받은 짐승들은 이미 방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칠일 동안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하여금 그래도 다시 한 번 세상의 사람들을 향해 "이제 곧 홍수의 심판이 다가온다"고 외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이는 곧 방주의 문이 이미 닫혔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왜 끝까지 칠일이라는 마지막 기회는 주셨으면서 이미 방주의 문은 닫아 버리신 것일까요? 왜 노아로 하여금 마지막 순간까지 방주의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게 하신 것이 아니라 미리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이를 통해 마지막 때에 있을 7년 환난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장차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시게 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홀연히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맞아 7년 혼인잔치에 들어갑니다. 반면에 이 땅에서는 그때부터 칠년 동안 7년 대환난이 이어지게 되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때 곧바로 믿는 사람들은 천국으로 들이시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에 던지실 수도 있지만 이처럼 7년 환난을 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7년 환난을 통해 이삭줍기 구원이라는 마지막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지요.
설령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구원에 이를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던 사람이라도 7년 환난 동안 생명을 던져 신앙을 지키게 되면 그나마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성령이 거두어진 후이므로 더 이상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 끝까지 신앙을 지켜야만이 이삭줍기 구원에 이를 수가 있지요.
따라서 홍수의 심판 때와 마지막 심판 때를 비교해 보면 홍수가 있기 칠일 전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받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방주 안에 들이신 것은 장차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구원받은 우리들이 휴거되어 미리 7년 혼인잔치에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구원의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지요. 7년 환난을 통한 이삭줍기 구원이 있듯이 방주의 문은 이미 닫혔지만 아직 홍수가 시작되기 전까지 7일이라는 마지막 기회의 시간을 더 주셔서 만약 그 안에라도 누군가 돌이킨다면 그에게는 방주의 문이 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딤전 2:4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한 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마지막 기회라도 놓치지 않고 회개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그를 버려두시겠습니까? 다만 이때는 이미 공의의 선을 넘은 후이므로 마치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7년 환난 때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노아의 외침은 없었지요. 물론 7년 환난 때에는 많은 전도자들이 나오지만 그럼에도 오직 자신의 의지로 구원에 이르러야 하듯이 방주의 문이 닫힌 후에는 누구의 도움으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돌이키는 자에게라야 구원의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셨음에도 결국 누구 하나 회개하고 돌이켜 방주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는 7년 환난 때에도 비슷하지요.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 같지만, 엄청난 환난과 핍박 속에서 결국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구원에 이르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혹여라도 7년 환난에 떨어진다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하지요.
그런데 오늘날의 신앙생활에서도 종종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은 상황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한 공의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데에 목적이 있으시지요. 그래서 공의의 선(線)을 넘은 사람에게도 끝까지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홍수가 있기 전에 칠일이라는 시간을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마지막 기회를 주셔도 돌이키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이미 공의의 선(線)을 넘은 상태이므로 이때 회개하고 돌이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되기 전에 미리 여러 차례 기회에 기회를 주고 또 주십니다. 이때 신속히 돌이켰으면 좋을 텐데 '앞으로 기회가 또 있겠지' 하는 이러한 안일한 생각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미루고 미루다보면 결국 공의의 선(線)을 넘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도 하나님께서는 목자를 생각하시고 택하신 제단을 생각하사 끝까지 기회를 주시지만 그때는 이미 늦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명심하셔서 혹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것이 있다면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미루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에 주시는 기회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전에 칠일이라는 시간을 다시 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시간 동안 누구도 돌이키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주신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변명할 수 없도록 하시려는 정확한 공의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여러분 중에는 마지막 기회의 순간에까지 이르는 분이 결코 한 사람도 나와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 만민의 성도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없을까'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던 노아처럼 하나님 앞에 흠도 점도 없이 나와 당당히 새예루살렘을 침노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4. 믿음으로 홍수 심판을 면한 사람들
이어지는 6-9절에서는 이제 노아의 나이 육백 세가 되던 해에 홍수를 칠일 앞둔 시점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방주가 완성되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외치고 또 외치게 하셨지만 노아의 말을 믿고 순종한 것은 단지 그의 가족들뿐이었지요.
히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말씀한 대로 노아의 가족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뚜렷한 홍수의 증거들이 없는 상황에서도 아버지인 노아의 말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에는 순종의 행함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노아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수많은 세월 동안 방주를 지어왔던 것도 또 그의 가족들이 아버지 노아의 말을 듣고 노아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믿음에서 나온 행함이었지요. 그리고 결국 이 믿음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노아와 그 가족들 외에도 만약 누군가가 노아의 말을 듣고 믿어서 방주 안에 들어오려 했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너는 안 돼" 하고 막으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셔서 누구는 구원받게 하시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지요. 모든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 가운데 결정됩니다. 그런데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지요. 그것은 바로 세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곧 그동안 세상에서 취했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버려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취해있는 사람은 결코 그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방주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입술로는 "믿습니다" 고백해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짝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방주에 타지 않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한 발은 방주 안에 한 발은 세상에 놓고 있는 것과 같지요. 정말 '믿는다'면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믿는 만큼 세상을 버릴 수 있는 것이고, 이렇게 세상을 버리는 만큼 구원의 방주 안에도 확실히 들어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방주의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지만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실제로는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벧후 1:10-11에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말씀한 대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를 부르신 아버지 하나님 안에 더욱 굳게 거하시므로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방주 안에서의 생활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시며 다시 한 번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채 천국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니 더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외치고 또 외쳐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은혜받고 응답받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이번 천국잔치에는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는 분들에게 더 큰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먼저 일찍 와서 앞자리에 앉고 본당에 앉는 것도 좋지만, 낙심자, 초신자들을 돌아보며 새로 온 영혼들이 은혜받을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해 줄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더 아름다운 마음이라 할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교회 앞마당은 새신자나 초신자에게 주차공간으로 내어줄 수 있는 마음, 식당 사용이나 기타 모든 분야에서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 이런 아름답고 선한 마음으로 성회에 참석할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로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부탁의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그래도 금요철야 예배에 나오시는 분들은 그만큼 믿음이 있고 교회의 일꾼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머리되시고 믿음 있는 분들이 먼저 본이 되어주시고 앞장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해주시기를 바라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5-04-30 오후 1:16:27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