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88)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 동산으로부터 이 땅으로 쫓겨 내려온 후에도 이 땅과 에덴 동산을 연결하는 영계의 문은 한동안 그대로 열려 있었습니다. 예전에 아담이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을 모두 다스리며 왕래하던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에덴 동산의 사람들은 제한적으로나마 이 땅에 내려올 수가 있었지요. 그러나 이로 인해 이 땅과 에덴 동산의 질서가 문란해지는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바로 에덴 동산의 남자들이 이 땅에 내려와 이 땅의 여인들을 아내로 삼았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들 사이에서 2세가 태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에덴 동산 사람들의 후예들은 당연히 이 땅의 사람들과는 구분이 되어졌습니다. 생령인 에덴 동산 사람들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이 땅의 사람들보다는 뛰어났지요. 그러다보니 이들은 당시 이 땅에 살던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히 드러나게 되었고 이들이 바로 용사요, 고대의 유명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 세대로 마쳐지게 되었다 했지요. 그것은 이 땅에 태어난 에덴 동산 사람들의 후예들 역시 점차 죄악에 물들어가게 됨에 따라 육체의 사람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육이 들어옴에 따라 생령인 하나님의 아들들로부터 받았던 신령한 영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니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생령으로서 이 땅에 내려왔던 하나님의 아들들과 그들의 후예로 태어난 2세들까지도 세상의 죄악 가운데 물들어가면서 당시의 세상은 온통 죄악으로 관영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죄악의 결과로서 이 땅에는 홍수의 심판이 내려졌던 것인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심판 이후로는 이 땅과 에덴 동산을 연결하는 영계의 문을 닫아 버리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문이 닫힌 것은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제한적으로 열려 있던 영계의 문이 이때부터는 더욱 제한되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이 엄격한 통제 하에 왕래할 수 있게 되지요.
그렇지만 이들에게도 많은 제약 조건이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홍수 이전에는 에덴 동산의 사람들이 이 땅에 내려와 몇 날을 보낼 수도 있었고 이 땅의 사람들과 대화도 할 수 있었으나 홍수 이후로는 이러한 일들이 일체 금해집니다. 이 땅에 내려와서도 이전처럼 드러내놓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수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UFO를 타고 이 땅에 내려왔어도 잠시 잠깐만 머물며 살피다가 다시 돌아가지요.
에덴 동산의 사람들이 왜 이 땅에 내려오고자 하는지는 전에도 설명을 드렸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이 땅의 삶은 호기심의 대상이라 했습니다. 이 땅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또 자신들과 같은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후예로 태어난 이 땅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요. 물론 에덴 동산에서도 이 땅을 살필 수가 있지만 직접 내려와 보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에덴 동산의 사람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순수해서 호기심도 많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편안한 문명의 세계를 뒤로하고 정글이나 오지 등을 탐험하며 그곳의 사람들과 삶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보는데 에덴 동산의 사람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이후로는 에덴 동산의 사람들이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이나 이 땅에 머무르며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엄격하게 제한되었기 때문에 이 땅의 사람들에게서 에덴 동산의 사람들과 UFO의 존재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에덴 동산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 자신들의 존재를 밝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리면 좋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권능으로는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실 수가 있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즉 공의의 법칙에도 합당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가장 적당한 시점이 있는데 아직은 그 시점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만약 UFO가 이 땅에 내려와 자신들의 존재를 밝히 드러내게 되면 이 땅의 사람들 중에 선한 사람들은 영의 세계와 하나님에 대해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행하게 되면 원수 마귀 사단 편에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은 공의에 어긋난다고 하며 송사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무 때나 크신 권능을 나타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은 공정한 조건 하에서의 인간 경작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공의에 비추어 볼 때에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 적당한 때와 조건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누군가 합당한 자격에 의해 주어진 권능으로서 당당하게 UFO를 끌어내릴 수 있는 때이지요.
아담도 죄를 짓기 이전에 공의의 비추어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을 때에는 마음대로 영계의 문을 열고 닫으며 이 땅과 에덴 동산을 오고 갈 수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 공의의 법칙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그가 권능으로 UFO를 불러 내렸을 때는 이것이 공의의 법칙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이미 자격을 갖추었다 해서 아무 때나 UFO를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는 어느 시점에 이러한 일이 나타나야 그것이 영혼 구원을 위해 가장 큰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지, 그 최적의 시기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때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정해진 일들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좀 더디게 돌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나중에 이루어질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지름길이 될 수가 있는 것이고 사람 편에서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아야 하지요. 그동안 왜 UFO가 그처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며 또 왜 밝히 우리 앞에 드러내지 않는가 하고 의문을 가지셨던 분이 있었다면 오늘 설명을 통해 풀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본론
1.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본문 11절을 보면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노아의 홍수를 앞둔 시점에 이르러서 이 땅이 얼마나 죄악으로 관영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때에'라 하신 것은 이 땅의 많은 자손들이 퍼지게 되면서 그들의 악이 공의의 법칙에 적용될 수밖에 없는 한계선에까지 이르게 된 때를 말합니다. 더욱이 '온 땅'이라 말씀하신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어느 한 지역이나 일부가 아니라 이 땅이 전체적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선을 넘은 상태였지요.
또한 '하나님 앞에 패괴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 가운데서 벗어난 삶을 살므로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선을 넘었다는 의미이며 '강포가 땅에 충만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영위하며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 살아감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들의 좋을 대로 살아가고 있었으며 스스로의 삶을 찬양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등 심히도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노아의 홍수 때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정반대의 삶 속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물들어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시고 바라시던 존재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잃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2절에는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말씀했습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이 땅에서 경작 받게 된 사람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그 마음이 점점 죄로 물들어 가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비진리를 받아드리게 됨으로 아담이 처음 가지고 있던 영의 마음은 사라지고 대신 육의 마음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이 육의 마음은 원수 마귀 사단에 의해 조종되며 여기로부터 결국 비진리의 행함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2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말씀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생각과 마음과 행함 사이의 상호 관계성에 대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사단이 먼저 사람의 생각을 통해 그 마음 안에 있는 비진리를 발동하게 하면 마귀의 조종에 의해 이것이 행함으로 나오게 되지요. 그래서 가룟 유다의 경우도 사단이 육신의 생각을 통해 그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심어주니 이것이 마음 안에 있는 비진리의 마음들 즉 배신과 간사함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 등을 발동시켜 결국은 스승을 파는 마귀의 행함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비진리의 마음이 많은 사람일수록 사단이 주는 육신의 생각에 쉽게 이끌려서 마침내는 마음 전체를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처럼 마음까지 내어주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육체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바로 본문에 하나님께서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향해 패괴하다 하신 것이 이렇게 마음까지도 어둠의 세력에게 내어주고 말았던 당시 사람들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었지요. 전도서 3:18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는 말씀과 같이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어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2.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세상 속에서도 꿋꿋이 의를 지키며 살아가던 노아를 택하여 그를 통해 새로운 경작을 시작하시지요. 그래서 13절에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노아에게 앞으로 있을 심판에 대해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과 함께 멸한다'고 하는 것은 당시 이 땅에 살던 육체의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주관하는 원수 마귀 사단의 권세 또한 무너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수 마귀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이루었다고 생각하던 어둠의 세상이 홍수의 심판과 함께 무너진다는 의미이지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창세기 강해 초반부터 말씀 드렸듯이 인간 경작은 공의 가운데 시작이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루시퍼를 우두머리로 하는 어둠의 세력들에게도 어둠의 권세를 주심으로 그들이 인간 경작의 시간 동안 하나님과 겨룰 수 있는 동등한 조건 하에서 인간 경작이 이루어지게 하시지요. 그리고 이때 루시퍼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힘과 권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호언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 경작이 시작된 이후 루시퍼는 자신의 수하에 있는 어둠의 세력들을 동원하여 어찌하든 인간들을 죄악 가운데로 빠뜨리도록 만들지요.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 자신의 주관 하에 있는 어두움 가운데 살게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어찌 보면 루시퍼가 원하는 대로 되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점점 죄악에 빠져들었고 의인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그러니 루시퍼가 얼마나 의기양양했겠습니까? 세상이 온통 자신이 주관하는 어둠의 세상이 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결국 공의의 심판에 의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면 루시퍼는 자신이 하나님을 이겼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공의 가운데 시작한 인간 경작이 실패로 끝났으니 자신의 힘과 권세가 하나님보다 더 뛰어나다고 했겠지요. 따라서 루시퍼의 입장에서는 홍수의 심판으로 인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는 것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이런 루시퍼의 궤계를 모르실 리 없는 것이고 이때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계획이 있으셨지요. 그것이 바로 노아를 통한 새로운 인간 경작인 것이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노아라는 인물이 나오기까지 그의 조상의 때부터 특별한 은혜 가운데 섭리해 오셨습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는 공의의 심판 속에서도 살아남을 만큼 흠과 티가 없이 온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홍수의 심판 속에서도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살아남아 새로운 인간 경작의 장을 열어가게 되었고 반면에 그동안 루시퍼가 구축해 왔던 어둠의 세상은 홍수의 심판과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이 세상이 마치 자기 세상이라도 된 것처럼 좋아하고 있던 루시퍼와 어둠의 세력들에게 모든 역사를 주관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심어준 것입니다. 루시퍼는 열심히 사람들을 죄악으로 물들여서 이 세상을 자기 세상으로 만들어가므로 마치 자신이 승리하는 것으로 알았겠지만 결과를 보니 하나님의 승리였던 것이지요.
본 교회도 이러한 일들을 몇 차례 겪어 왔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악한 사람들을 주장하여 본 제단을 핍박하고 무너뜨리려 할 때 당장은 원수 마귀 사단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요. 그러나 결과는 항상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항상 승리해 왔고, 이를 통해 만민의 제단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도해 가시며 섭리해 가시는 제단임을 나타내 보이셨고, 드디어는 세계 만방에 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에게도 어둠의 권세를 주셔서 동등한 조건 하에서 인간을 경작해 가시지만 결국 모든 것의 주권자가 되시며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주셨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데에는 공의와 함께 사랑이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죄악에 물들어 살던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도 아니요 더 이상 긍휼과 자비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그냥 놔두심으로 단지 그들의 삶을 연장시켜 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지요. 오히려 그들을 신속히 정리하고 새로운 세상에서 노아를 통해 새롭게 인간을 경작해 가시는 것이 장차 이 땅에서 경작 받게 될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 마리의 양을 키우는 사람이 그 중에 전염병이 걸린 양들이 있다고 할 때에 그 양이 불쌍하다고 해서 가만히 놔두는 것이 사랑일까요? 다른 양들과 앞으로 태어날 양들을 위해서 전염병에 걸린 양들을 정리하는 것이 양을 치는 목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사랑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시에 이미 사람의 본분을 떠나 짐승보다 못한 상태가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계속해서 심판을 뒤로 미룬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공의의 법칙에 맞추어 정리한 후에 새롭게 인간 경작을 시작하는 것이 인간 경작의 관점에서 볼 때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홍수의 심판은 단지 죄를 벌하는 공의의 심판의 차원을 넘어 인간 경작의 마지막까지를 염두에 두신 사랑의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3.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이어지는 14-16절을 보면 노아의 방주가 어떠한 규모로 지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여기서 나오는 규빗은 길이의 단위로서 한 규빗은 성인의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개인적인 차이가 조금씩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시대마다 쓰이던 규빗의 단위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한 규빗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46cm에서 56cm 사이가 됩니다. 따라서 노아의 방주의 규모를 오늘날의 길이 단위로 환산하면 한 규빗을 가장 작게 잡아서 46Cm라고 해도 길이가 138m 폭이 23m 높이가 14m 정도가 되지요. 1규빗을 53cm로 할 때는 길이가 160m, 폭은 27m, 높이는 16m가 됩니다.
이는 길이로 볼 때 축구장의 1.5배 정도이고 면적은 농구장의 20배 정도가 되며 기차의 표준화차 568량과 맞먹는 용량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천 5백여 년 전에 이만한 크기의 방주가 지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노아의 방주의 안전성입니다. 오늘날의 지식이나 기술로 볼 때에도 노아의 방주에 적용된 설계 비율이 너무나 안정적인 비율이라는 사실이지요. 이렇게 설계된 방주는 큰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도 빨리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높은 안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노아의 방주에 적용된 설계 비율에 따라 전함을 설계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전함은 지금까지 건조한 전함 중에서 가장 견고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하지요. 그러니 노아의 방주가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어졌으며 또 세상을 뒤엎는 엄청난 홍수 속에서도 충분히 건재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주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당시의 기술이나 지식이 에덴 동산의 사람들의 영향으로 인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뛰어났다는 점을 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방주의 설계 비율과 재료 등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를 비롯하여 수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다 들어가야 하고 40주야로 내리는 그 엄청난 비를 견뎌내며 382일 동안에 방주 생활을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비율과 설계와 재료로 얼마나 크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하게 아셨던 것이지요.
여기서 왜 382일이라는 숫자가 나오느냐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아와 가족들은 비가 내리기 이미 7일 전부터 방주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나이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이 비가 내리면서 홍수가 시작되어 노아의 나이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에 노아와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오게 됩니다. 참고로 노아는 물이 완전히 거친 것을 확인하고도 57일 간을 방주에 더 머물렀습니다. 또 홍수 기간은 비가 시작된 때로부터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때까지로 계산하여 정확하게 만 1년 10일이며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에서 생활한 기간은 미리 들어가 있던 7일을 더하여 만 1년 17일이 됩니다. 따라서 382일이라는 날짜가 나오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노아의 방주는 이처럼 육적으로 볼 때 놀라운 점들이 많지만 영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 잣나무를 사용하라 하셨는지 역청으로 그 안팎을 칠하라 하신 데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방주 안을 상, 중, 하 세 층으로 나누게 하신 데에는 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 방주 곳곳에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의미들과 함께 노아의 방주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설명들은 다음 시간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정확한 공의 가운데 행하시기 때문에 누구도 그 앞에서 시시비비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보아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일부 몇 사람들이 악을 행한다 해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다섯 명의 의인조차도 없을 정도로 죄악이 관영해 있었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누구에 대해서든지 끝까지 긍휼과 자비를 베풀기 원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한계선을 넘게 되면 거기에는 공의의 심판이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의의 심판 안에는 동시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다 보니 온전한 주일성수도 못하게 되고, 기도하던 사람이 기도 쉬는 사람이 되며, 사명 감당하던 사람이 사명을 놓는 경우들이 생기지요. 이런 경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지만 그러다 결국 공의의 선을 넘게 되면 외면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원수 마귀 사단이 각종 시험 환란과 재앙을 가져다 주는 것을 보게 되지요. 공의의 법칙에 따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내어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세상으로 빠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 어떠한 공의의 심판도 없이 그냥 놔두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원수 마귀 사단에게 사로잡혀 멸망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그냥 가만히 놔두시는 것이 결코 사랑이 아니지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자 때로는 시험 환란과 재앙 중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사람이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에 내 자녀라 해서 무조건 지켜 주시고 막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공의의 법칙에 맡기심으로 이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주시지요. 바로 히브리서 12:6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말씀한 대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가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공의로 역사하시는 것이며 공의 속에는 결국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아 감사의 조건 속에서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설령 징계를 받는다 해도 그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변함없이 느끼고 감사할 수 있는 참마음으로 일구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7-12-27 오후 1:24:14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