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80)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는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이 마침내 범죄 사실을 시인하고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고백하며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인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셨을까요? 또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본론
1.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 가인
우리나라 속담 중에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지요. 죄를 지은 사람 쪽에서 먼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알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가인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스스로 죄책감으로 인해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잠언서 28:1에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말씀한 대로 가인은 살인죄를 범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를 입힐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오늘날도 이런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거짓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들도 거짓말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들도 시기하고 질투한다고 판단 정죄해버리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처럼 가인은 자신의 악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외에도 가인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를 입을까 하여 두려워하였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약 40-50년 전만 해도 만약 한 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을 경우, 마을 사람 전체가 나서서 그 사람을 마을로부터 쫓아내는 일들이 종종 있었지요. 예전에는 주로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종친이나 친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마을 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행한 사람은 마을 어른들에 의해 엄히 다스려져서 마을로부터 쫓겨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다시는 마을에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의 본을 삼았는데 가인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당시의 사람들은 가인이나 아벨과는 혈육지간이었는데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지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가인의 범죄 소식은 너무나 큰 충격과 놀라움이었습니다. 처음 접하는 살인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지요.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가인에 대해 의분이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당시 죄를 범한 사람을 치리하던 나름대로의 규율도 있었을 것이니 가인은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형제들로부터 지탄받으며 해를 입을 수도 있을 만큼 중한 죄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살인자 가인에게 베푸신 사랑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인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이미 수차례 권면하시며 회개할 수 있는 기회까지 여러 차례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악을 행하였으니 그냥 외면해 버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며 가인에게 표를 주사 누구를 만나든지 죽임을 면케 하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구약시대를 철저한 율법에 의해 치리되는 시대로 알고 있는 것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논리가 정확하게 적용되던 시대이지요. 그래서 레위기 24:17을 보면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는 아직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오시지 않았으므로 자기 의지만으로는 마음에 할례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요. 따라서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다해도 행함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 죄 있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율법을 주시며 이것을 어겼을 경우에는 매우 엄하게 벌하셨지요.
만약 마음에 할례하지 못한 당시의 사람들에게 용서와 긍휼만을 베푸셨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함으로 거듭 범죄하다가 마침내는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무섭고 두려울 정도의 엄한 율법을 주셨던 것이요,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 그나마 자신을 행함의 죄로부터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인 역시 자신의 죄에 대해 당연히 그 값을 치러야 했을 것이고 더욱이 그는 인류 최초의 살인이자 형제를 살인했다는 점에서 그 죗값을 더 중하게 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가인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켜주시고 가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벌을 칠 배나 더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에 대해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공의는 신성, 하나님의 사랑은 인성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아버지 하나님은 신성과 인성이 정확하게 평형을 이루시는 분으로서 어느 한 편으로도 치우침이 없으시지요. 따라서 공의를 행하실 때는 신성적인 면만 나타나고 사랑을 행하실 때는 인성적인 면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는 신성이 앞서시고 어느 순간에는 인성이 앞서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신성과 인성이 조화를 이루시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성품은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심판을 행하실 때에도 용서를 베푸실 때에도 기본에는 항상 사랑이 있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죄인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이지요. 신약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 줄곤 선포되는 내용도 결국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입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고 원수까지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정말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까지도 끝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가인의 사건을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15절을 통해 깨우쳐 주시고자 한 내용은 우리들이 죄를 범한 사람을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의 허물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일시에 손가락질을 하며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외면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자신에게 직접 해를 입힌 것이 아닌데도 이러하니 만약 자신에게 직접 해라도 입힌 사람이라면 과연 그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마태복음 6:14-15에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7:1-3에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하셨으니 설령 죄가 있고 허물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용서해 주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요.
더욱이 야고보서 2:13에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다른 사람에 대해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긍휼없는 심판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설령 범죄한 사람을 본다해도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겠습니까? 결코 내 기준에 맞추어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서 4:11에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하신 말씀을 명심하여 누구도 비방하거나 판단, 정죄해서는 안 되지요. 더욱이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직접 들은 것도 아니라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판단하시고 재판하시는 이는 오직 한 분 아버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선으로 보고, 선으로 듣고, 선으로 말할 수 있는 선의 마음, 진리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설령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 해도 그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악으로 갚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알아야 하지요.
3.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는 무엇인가?
그러면 하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주신 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받은 표로 인해 그의 생명을 보존할 수는 있었지만 이 표가 좋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담아주신 표가 아니라 죄와 수치를 나타내는 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신다는 의미도 담겨 있지만 동시에 그가 어떤 죄인인지를 알 수 있는 표였습니다.
가인은 평생동안 이러한 표를 지니고 살면서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할 수 있었고 마음에 새로운 각오를 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가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전에 지었던 죄를 상기시켜 주었고 그럴 때마다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으리라 다짐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표는 그의 평생에 지워지지 않는 죄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표를 스스로 받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문신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가인이 받았던 표가 영적으로 볼 때 부끄러운 자신의 과거 즉 자신이 죄인임을 나타내듯 문신 또한 영적으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라고 드러내는 표이지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문신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레위기 19:28에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말씀하고 있는데 문신을 하는 것은 당시 이방인들이 했던 풍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도 장차 있을 7년 환난 동안에도 사람들 중에 이마나 손에 표를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 표는 곧 짐승의 표로서 이 표를 받는 사람은 반드시 사망으로 가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계시록 14:11에도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말씀합니다.
문신이 짐승의 표와는 다르지만 몸에 어떠한 것을 새겨 넣는다는 점에서 영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문신 중에는 여러 가증한 동물의 문양을 새겨 넣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혹여 문신이 있는 분들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근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 한 때의 실수로 또는 영적인 의미를 잘 몰랐던 이유 등으로 인해 문신이 남아 있는 분들의 경우 이제 주 안에 들어와 과거로부터 깨끗이 돌이켰으면 됩니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지우는 것이 좋겠지만 설령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지우지 못했다 해서 주님께서 "너는 여전히 합당치 않다" 하시지는 않지요. 이미 과거를 회개하신 분들은 상관없겠지만 지금까지 문신에 관한 영적인 의미를 모르고 계셨던 분은 이제라도 문신으로 인한 영적인 담을 헐어야 합니다.
4.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게 된 가인
16절을 보면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했습니다. 여기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에서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이 비록 범죄하여 이 땅에 쫓겨 내려와 살게 되었지만 아담은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살았으며 가인도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했지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범죄한 가인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 속에 거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 속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애굽에 열 재앙이 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지키신 고센 땅에는 아무런 재앙도 임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 안에 거할 때의 축복은 엄청난 것이지요. 이사야 43:2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말씀하신 대로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일년 내내 재앙이나 사고를 만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며 설령 본인의 실수로 사고를 만나다 해도 지켜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주의 성수와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않는 분들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수가 없지요.
이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롯이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거할 때에는 소유가 넘칠 만큼 축복을 받았으나 아브라함을 떠나 자기 보기에 좋은 곳으로 가니 결국 모든 소유는 물론 아내까지도 잃게 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 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가인이 거하게 된 에덴 동편 놋 땅은 어떠한 곳일까요? 먼저 놋 땅이 에덴 동편에 있다고 해서 놋 땅을 둘째 하늘에 있는 곳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첫째 하늘에 내려와 살게 된 사람이 다시 둘째 하늘에 올라가 살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왜 놋이 위치한 땅을 에덴 동편이라 표현한 것일까요?
전에 창세기 강해를 통해 설명드린 대로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을 오고 가려면 마치 통로와 같은 곳을 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의 곳곳에도 바로 이러한 통로로 들어가는 문들이 있지요. 아담도 이 땅에 내려올 때에 이 통로를 통해 내려왔으며 아담이 이 땅에 처음 정착한 곳이 바로 이 통로를 지나 내려온 그곳이었습니다. 다시 에덴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담은 에덴으로 통하는 문이 존재하던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지요. 그곳은 아담에게 있어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에덴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에덴 동편이라 한 것은 바로 이 장소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에덴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장소, 아담이 처음 정착해서 살던 장소를 기준으로 동편에 있는 곳을 가리켜 에덴 동편이라 표현한 것이지요. 아담이 비록 이 땅에 내려와 살게 되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모든 기준은 에덴이었던 것이고 이러한 이유에서 가인이 거하게 된 놋 땅도 에덴 동편이라 표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놋이라고 하는 지명에 담긴 의미는 황무지, 불모지라는 뜻으로서 가인은 자신에게 임한 저주대로 밭 갈아도 그 효력을 주지 않는 땅에 거하게 되었지요.
이어지는 17절을 보면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이미 성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의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한 지혜와 지식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살던 당시 가인은 매우 뛰어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문명을 영위하던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많은 것을 전수 받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짧은 시간 안에 문명을 이루어갈 수가 있었지요. 아무리 뛰어난 지식과 지혜가 있다 해도 하루 아침에 수준 높은 문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개인과 같은 생활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인의 아들은 에녹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 받은 에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가인의 아들 에녹을 통해 가인의 후손이 어떻게 이어지게 되며 아담은 또 누구를 통해 후손을 이어가게 되는지를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요한일서 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말씀하셨으니 정녕 마음 안에 성령께서 계시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랑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내 마음 안에 사랑이 얼마나 임해있는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잘 대해주고 순종 잘하는 사람만을 사랑했는지, 아니면 설령 여러분에게 해를 입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셨는지요? 베드로전서 4:8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말씀하셨으니 가인에 대해 끝까지 인내하시며 기회를 주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한 영혼을 사망으로부터 건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임했을 때에 정녕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마음에 열심히 이루어 요한일서 4:12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는 말씀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7-12-27 오후 1:24:47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