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69)
서론
아담은 이 땅의 흙으로 지음을 받은 후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령인 아담은 온전한 영의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영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기운인 생기가 빠져나가면 다시금 흙의 성질을 가진 육의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영이라고 하면 되는데 죽은 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생령이라고 말한 것이지요.
아담은 비록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의 지배자로 있지만 온전한 영의 세계인 셋째 하늘의 존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마음 안에는 온전한 영의 존재와 같이 되고 싶어하는 동경심과 같은 것이 있었지요. 여자도 마찬가지 마음이 있었기에 사단은 오랜 세월 동안 아담과 여자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한계성에 관한 부분을 자극하는 미끼를 던졌습니다. 그리하여 선악과를 먹기만 하면 그들도 온전한 영의 존재 즉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본론
1. 영이 죽고 혼의 작용이 시작된 아담과 하와
결국 아담과 여자는 선악과를 따먹었고 이들에게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영이 죽게 된 것입니다. 영이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여러 시간에 걸쳐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처럼 영이 죽게 되면서 생겨난 중요한 변화가 바로 혼의 작용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전에는 오직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가르침 받은 진리 즉 영으로만 생각하고 영으로만 행동해 왔는데, 이제는 자신에게 입력된 지식에 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혼의 사람이 되고 만 것이지요.
그러면서 사람은 점점 아버지 하나님께서 처음 주셨던 진리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사람의 혼의 작용을 주관하여 비진리 가운데로 빠져들게 했기 때문이지요. 비유를 들면, 그 동안 중앙방송으로부터 오던 강력한 전파가 흐려지고 대신 새로운 지방방송의 전파를 받아들이게 된 것과 같습니다. 물론 전에도 지방방송의 전파는 있었지만 그 동안은 중앙방송의 전파가 워낙 강하고 전파를 받는 편에서도 주파수를 오직 중앙방송에만 맞추었기 때문에 지방방송이 전혀 틈탈 수가 없었지요. 그러다가 이제는 중앙방송이 약해진 틈을 타서 지방방송이 침투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담이 생령일 때는 온통 영의 기운에 싸여 혼의 작용이라는 것이 일어날 수 없었지만 영이 죽어 영의 기운이 빠져나가게 되자 영이 세력이 약해지면서 혼의 작용이 시작된 것이지요. 여러분도 영의 힘이 더 강할 때는 혼의 작용이 그만큼 덜 일어납니다. 물론 이 때 혼의 작용이라 말하는 것은 육에 속한 혼의 작용을 뜻합니다.
우리가 온전히 영으로 일구게 되면 혼이 작용을 해도 영에 속한 혼의 작용만 하게 되지요. 마음이 영으로 일구어진 상태에서는 혼도 영의 지배를 받아 영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영혼이 잘 됐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뜻만 좇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만 좇는 영에게 혼이 순종을 하니 이 혼을 영에 속한 혼이라 말하게 되고 영혼이 잘 된 사람은 또한 육도 바로 순종해서 영혼육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다 순종해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반대로 영의 힘이 약해지고 육의 힘이 강할 때는 어떻습니까? 육에 속한 혼의 작용이 활발해져서 바로 육신의 생각이 발동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곧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이로 인해 많은 죄를 낳아가게 되지요. 영의 세계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때에 영으로 생각하고, 영으로 받으면 전혀 오해되지 않을 것도 혼의 작용에 의해 육신의 생각이 동원되면 오해와 오류를 낳고 더 나아가 판단과 정죄까지 낳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도록 만드는 혼의 작용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선악과를 먹음으로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죄 가운데로 빠져들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육에 속한 혼의 작용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담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해도 육에 속한 혼의 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비진리가 나오지 않지요. 즉 모든 것을 영으로 생각하면 문제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의 작용이 시작되면서 육으로 생각하게 되니 여기서부터 비진리가 나오게 된 것이지요.
다시 말해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느끼게 만든 육에 속한 혼의 작용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영으로 생각하면 부끄럽고 창피할 것이 없는데 육적인 혼의 작용을 통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니 벌거벗은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과의 실제적인 의미는 사람으로 하여금 육에 속한 혼의 작용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결국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게 만드는 것이요, 온갖 비진리들이 마음에 들어와 근본 흙의 속성과 섞이게 되면서 점점 죄악으로 더 물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2. 혼의 작용으로 육신의 생각이 동원된 아담과 하와
7절에 눈이 밝았다는 것도 같은 의미이지요. 눈이 밝아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혼의 작용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모든 것을 진리로만, 영으로만 바라보았기에 어떠한 육신의 생각도 동원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혼의 작용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역사를 많이 받아들일수록 많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게 되지요.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에 영으로 바라보느냐, 육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때로는 죄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여자가 발가벗은 서로를 보면서 영으로만 생각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서로에게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형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사람이 육으로 볼 때는 어떨까요? 바로 음욕과 간음이 나오게 됩니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 영으로 바라보면 마음에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지만 육으로 바라보니 이내 죄가 발동되더라는 말입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게 되면서부터 이처럼 영으로만 바라보던 것들이 육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한 가지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여러분과 평소에 잘 지내던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보고 지나가면서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인상을 쓴다고 합시다. 이 때 이 상황을 영으로 바라보는 것과 육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육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이내 판단과 정죄가 나오지요. "저 사람 뭔가 화나는 일이 있나?" 또는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들을 하며 자신 역시 상대에게 감정을 품게 되거나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생각에 너무 골몰해 있나 보다." 하며 선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영과 육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육과 영 중에 어느 편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범사에 육에 속한 혼의 작용을 통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죄를 범할 것이 아니라, 영으로만 생각하고 영으로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영으로 바라보았지만 경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선악을 분별하는 가운데 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곧 경작 받지 않은 아담으로서는 결코 뚫을 수 없었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두심으로 인간 경작을 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고, 이러한 인간 경작을 통해 상대성을 체험함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가운데 영을 취할 수 있는 온전한 영의 자녀를 얻기 원하셨던 것이지요.
3. 여호와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낯을 피하여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
8절을 보면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했는데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날이 서늘하다"는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늘하다는 말의 의미는 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약간 더 쌀쌀한 느낌을 나타내지요.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서늘하다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에덴동산에도 온도의 변화가 있어서 그 차이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춥다, 또는 덥다고 느낄 만큼은 아니지요.
에덴동산은 항상 사람이 살기에 가장 알맞은 온도와 습도 바람 등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서 기후 변화에 따른 불편함 같은 것은 없습니다. 또한 에덴동산은 지구처럼 밤과 낮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빛으로 둘러 있어서 항상 낮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지요. 다만 에덴동산에 사는 사람들도 때를 좇아 쉼을 얻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있는데 바로 이 때 약간의 기온의 변화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이제 쉼과 휴식의 시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 '이제 밤이 되어가는구나' 하는 것을 알고 밤에는 잠을 자는 것처럼,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약간의 기온의 변화를 통해 이처럼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날이 서늘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휴식의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 주는 징조입니다. 이 땅으로 말하자면 저녁 때가 되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에덴동산은 우리가 사는 이 땅과 달리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날이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낮과 같이 밝은 상태에서 기온의 적절한 조절에 따라 지금이 활동할 시간인지, 쉬어야 할 시간인지를 구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온이 변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서늘하다고 느낄 만큼 온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며 포근한 바람 속에서 쾌적함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알맞은 휴식의 환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이 땅과 에덴동산과는 전에 설명드린 대로 시간의 흐름도 다를 뿐만 아니라, 시간의 의미와 기온의 의미 또한 계절의 의미 등도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에덴동산에 쉼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에 아담과 하와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둘째 하늘에 있는 에덴동산에 직접 내려오신 것일까요? 지금까지 창세기 강해를 잘 들어오신 분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전에 설명 드렸듯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둘째 하늘에 내려오는 것을 매우 꺼리셨습니다. 둘째 하늘에는 에덴동산도 있지만 그 동편에는 악의 영들이 거하는 공간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을 처음 만드실 때에는 친히 셋째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지만 그 이후로는 본체가 직접 내려오신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에게 진리의 지식들을 가르쳐 주시고 대화하실 때에도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에 있는 창과 같은 통로를 이용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낯을 피하였다고 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영의 분리를 통해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은 영의 분리가 가능하다 했습니다. 그리고 분리된 영이 보고 느끼는 것은 본체에도 동일하게 전달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을 분리하신다 해서 또 다른 하나님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분리된 영은 본체가 직접 가지 못하는 곳에 본체를 대신하여 보내심을 받는 것이며 분리된 영은 하나님께서 거두시면 다시 본체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리된 영이라 할지라도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동안은 본체의 역할을 대신 감당하는 것이기에 분리된 영이 말하고 듣고 보며 느끼는 것이 본체가 직접 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의 분리된 영이 에덴동산에 내려 오셨다 해도 아담과 하와는 아버지 하나님을 직접 대하는 듯한 상황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분리된 영이 둘째 하늘의 에덴동산에 내려오려 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에만 영의 분리를 하시기 때문에 분리된 영을 보내시는 경우는 본체가 직접 가시는 것과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가지지요.
이렇게 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분리된 영이 에덴동산에 내려와 거니시며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들이 숨었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것이요, 그로 인해 자신들에게 다가올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통해 매우 단순한 진리 한 가지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빛과 어두움은 함께 공존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빛이 임하면 어두움은 물러갈 수밖에 없으며 어두움이 빛 앞에는 나올 수는 없지요.
요한복음 3:20-21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빛은 빛을 좋아하게 되어 있고 어두움은 어두움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당연히 빛이신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며 반대로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사람은 빛을 두려워하여 피하게 되지요.
4.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부르시며 찾으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어지는 9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담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셔서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아담을 부르시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지만 아담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려는 것이지요.
이는 다시 말해 아담이 직접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아뢰며 스스로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기를 원하시는 마음에서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왜 아담이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아담의 입장이 되어 한 번 더 들어주시려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에 대해 하나님의 권세로서 당장에 죄를 물으시고 죄 값을 주실 수 있지만 이처럼 다시 한 번 확인하시며 기회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어찌하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주기 원하시는 마음이지요. 베드로후서 3:9에도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먼저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배신하거나 힘들게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피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더우기 자신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며 큰 사랑을 주었음에도 상대가 배신하고 나를 힘들게 했을 때에는 그에 대한 감정이 더해지는 것을 봅니다. 먼저 찾아가서 손을 내미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먼저 아담을 찾아오셔서 그에게 어찌하든 기회를 주시고자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말할 수 없는 권세와 영광을 주었고 무엇 하나 부족됨이 없이 해 주었음에도 결국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말았던 아담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냥 버리신 것이 아니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 인생들을 대하고 계신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교회를 치리해 오면서 이미 제가 상대의 범죄 사실을 알고 있고 또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통해 어떤 사람의 범죄한 사실에 대해 들었다 해도 제 임의대로 상대를 판단하거나 정죄 내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확연하게 드러난 사실에 대해서도 반드시 본인에게 직접 변론할 기회를 주었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주었지요. '저가 왜 그랬을까?' 탓하는 마음이 아니라,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하며 상대를 이해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범죄한 사람에 대해 강압적이고 피동적으로 이러한 잘못을 했으니 회개하라 한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 스스로가 나와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지요.
뿐만 아니라, 제가 누구의 허물을 안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 본 적도 없으며 아버지 하나님과의 사이에 범죄한 일이라면 굳이 제 앞에 나오지 않아도 모른 체하며 그가 아버지 앞에 용서받기를 기도해 주었습니다. 죄의 담으로 인해 눌려 있고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한 번이라도 눈길을 더 마주쳐 주고 그가 힘을 내어 나오기를 더 기도해 주었습니다.
또한 저를 배신하고 찌르며 해를 가한 사람이라도 그를 미워해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지요. 제 편에서는 항상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언제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며 돌아온 사람을 볼 때는 내 부모 형제 자녀가 죽음에서 돌아온 것보다 제 마음은 더 기뻤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주님의 마음이며 인생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으로 아담을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바라시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미 아담은 혼의 작용이 발동되면서 점점 더 비진리의 모습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담이 어떻게 점점 육신의 생각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온 영으로 이루기 전에는 감히 그 사랑을 안다 말할 수도 없지요. 이처럼 놀라운 사랑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저와 여러분은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내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27에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자신의 이웃은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은 없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는데 원수도 아닌 사람끼리 서로 감정을 맺고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지는 않습니까.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는 오히려 드러내려 하지는 않는지요. 또 상대가 잘못했을 때 어떻게든 기회를 주고 만회할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단번에 잘라 버리는 모습은 없었습니까. 나를 힘들게 하고 찌르는 사람이라도 먼저 다가가서 손 내밀기보다는 오히려 상대가 손을 내밀기 위해 다가오는 것도 내 편에서 피하지는 않았는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혹여라도 이런 모습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안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1-15 오후 9:49:55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