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68)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서 1:15을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원인을 매우 간단 명료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욕심에 대해 '무엇을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욕심으로 인해 자신이 지켜야 할 선(線)을 넘으면서까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며 누리고자 하면 결국 죄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론
1. 사단의 미혹을 받아 마음을 내어주면 욕심이 생겨
여자가 뱀의 미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 것도 여자의 마음에 욕심이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미혹에 그만 마음이 동요되었던 것이지요. 피조물의 입장에서 감히 아버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신성에 도전하려는 마음이 그 안에 싹트게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여자의 이러한 마음을 호기심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처럼 엄하게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분명 자신의 위치와 본분을 넘어서는 욕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욕심이 결국은 "정녕 죽으리라" 경계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마음에서 덮어버리고 말았지요. 마음 전체로 볼 때는 비진리의 마음이 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처럼 사단의 미혹에 마음을 내어주니 순간에 진리의 마음까지도 다 덮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으며 자기의 가진 것 안에서 누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욕심 있다'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욕심의 의미가 좀 다릅니다. 영적으로 욕심이란 자기의 지켜야 할 선(線)을 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의 가진 것을 내어주지 못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100개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99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한 개만 남았습니다. 이때 나에게 마지막 남은 하나를 누군가가 원할 때 그것까지도 기꺼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정녕 마음에 조금의 욕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깊은 차원의 욕심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선하다고 하는 사람도 자신의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침해당하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내면에 감추어 있던 욕심의 마음이 발동되지요. 자신의 소유와 이익, 그리고 자기의 영역이 침해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욕심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욕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바로 '자기' 또는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없으면 욕심도 생기지 않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100개 전부를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다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또는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자기 생각, 자기 의, 자기 틀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이런 사람은 욕심이 생길 리도 없고 결국 욕심으로 인한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가장 귀한 독자 이삭이라도 하나님께서 달라 하시니 기꺼이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전에도 떠나라 하니 그대로 떠났고,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변론하지도 않았으며 자기 의를 주장하여 불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이었기에 그에게는 당연히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고, 하나님 앞에서도 온전히 행할 수가 있었지요. 이처럼 자기 생각도, 자기 틀과 자기 의도 다 버렸을 때, 이런 사람에게는 욕심 자체가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울 왕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말렉과의 전쟁에 나서는 사울 왕에게 아말렉의 모든 것을 멸하라 명하십니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가축까지도 다 멸하라 하셨지요. 그런데 사울의 생각에는 가축 중에 좋은 것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리는데 쓰는 것이 더 좋아 보였습니다. 자기 보기에는 그것이 더 의로와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낳고 맙니다. 사울의 마음에는 이미 욕심이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2. 욕심을 버리려면 자기 생각과 자기 의를 버려야
이처럼 자기 생각, 자기 의가 있을 때 이것이 곧 욕심이며 이러한 욕심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면 욕심을 버려야 하는 것이고 욕심을 버리려면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원리를 깨달을 때 사단의 미혹을 파악하고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사단이 사람을 미혹할 때 직접적으로 '죄를 지어라' 하고 미혹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오늘 본문에 뱀이 여자를 미혹하는 장면을 보아도 뱀이 여자에게 "선악과를 따먹어라" 하고 직접 말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여자로 하여금 마음 안에 '욕심'이 생기도록 교묘하게 덫을 놓아가고 있지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사단의 미혹에 빠져들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내 것이니까' '이것은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이니까' '이것은 내가 보기에 정당한 것이니까' '이것은 내가 보기에 분명히 옳은 것이니까' 이처럼 '내 것' 또는 '자기'라는 기준에 맞추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심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내 것을 주장하고 내 생각, 내 의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나의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내 생각과 내 의에 아무리 맞지 않아 보여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럴 때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시고 역사해 가십니다. 자신이 보기에 아무리 좋은 것,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버리라 하시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혹여 자신의 틀과 생각 또는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막상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는 현실에 처하게 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틀에 맞추어 자기 유익에 맞게 해석해 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그 말씀을 해석하는 방향이 각기 달라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자기 편에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 틀과 자기 의, 자기 욕심과 유익에 맞추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화평함이 깨지고 부딪힘과 갈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기 틀과 의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경우들을 보게 되지요. 예를 들어, 자기만이 생각하는 틀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고 규정해 놓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규정해 놓은 틀에서 벗어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알게 되면 일순간 자기 생각 속에서 판단이 나오게 되고 충만함이 떨어지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변질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깨끗하고 순결하신 분이시다' 규정해 놓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일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던 선과 의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때 그 동안 자신이 생각하던 선과 의의 기준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기준을 맞추면 되지요. 하지만 자신의 잘못된 틀을 바꾸기보다는 자기 생각 속에 판단을 하고 때로는 원망과 불평까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과 의에 대한 기준이 맞는 것이며 자기 생각이 맞는 것이겠습니까? 이사야 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말씀하셨으니 내 생각이 아무리 옳은 것 같고 내 기준이 아무리 맞는 것 같아도 결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과 비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자기 생각과 틀에 맞추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말씀을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3. 시험을 참지 못하여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한 욥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틀이 있었고 그 틀 안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지요. 이러한 자신의 틀로 인해 욥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라 본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모여 잔치를 하고 나면 욥은 항상 자녀들의 명수대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지요. '혹여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욥기 1:5에 보면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말씀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욥에게 시험이 찾아오니 처음에는 자신에게 찾아온 시험을 참았습니다. 마음 중심에서 감사함으로 참은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있으므로 감히 절대자 하나님에게 원망이나 불평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시험이 자신이 참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자 그때부터는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그 동안 생각하고 있던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의 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지요. 나중에는 오히려 욥 자신은 의로운 사람인데 하나님은 의로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분으로 오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기 9:22-23에는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말하고 있고, 욥기 27:2에는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이라 했으며, 욥기 34:5-6에는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노라" 고백했습니다. 전에는 그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던 욥이 이제는 자기 생각과 틀 속에서 하나님을 판단하고 원망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충만하던 은혜가 떨어지고 하나님을 떠나는 모습까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에게 어떤 재앙이나 시험이 왔을 때 왜 자신에게 재앙이 왔고 시험이 왔는지를 돌아보고 말씀에 비추어 원인을 발견해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그러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은 의로운데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셨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또는 영계의 깊은 비밀한 내용이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대해 들었을 때, 그 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맞지 않는다 해서 오해하고 '잘못 되었다' 판단하기까지 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결국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을 봅니다.
4. 사단의 미혹을 받아 욕심이 잉태하면 불순종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과연 하나님보다 더 의로울 수 있겠습니까? 어찌 피조물인 사람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겠는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만 해도 사람으로서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고 자신이 깨달은 것이 전부라 생각하며 아버지 하나님 앞에 육신의 생각을 동원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을 한 번 보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각과 틀에 맞나, 맞지 않나를 먼저 판단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아멘과 예로 순종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틀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을 깨뜨리기까지 연단을 겪어야 하고 그래서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는 자가 되었을 때 아버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인정받고 사랑 받았던 것을 봅니다.
또한 목자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와 선의 틀을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에 목자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씀을 자기 생각과 지식에 맞추어 판단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고 계십니다.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자신들의 보기에 모세의 행동이 의롭지 못하자 모세를 비방하며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의와 선의 기준에 맞추어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비방하니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셨습니까?
민수기 12:6-8에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하시며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미리암과 아론의 생각에는 자신들이 옳고 모세가 그릇되게 보였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람,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보장받는 사람에 대해 자기의 틀과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칫 자신의 생각과 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판단하고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게 되면 사단은 점점 육신의 생각을 사로잡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의 충만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던 마음도, 목자를 사랑하던 마음도 식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계속 사단의 음성을 들어나가면 나중에는 마음까지도 내어주어 마침내는 제단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와 생각 그리고 자기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고 허망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의지 자체가 없이 로보트처럼 하나님 앞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되 억지로가 아니라 자유의지 가운데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자기 의가 있고 자기 틀이 있으면 자유의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4-5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말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여자의 마음에 자기 생각과 자기 의를 가지도록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욕심이 잉태하게 되니 마침내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의 열매를 낳고 말았던 것이지요.
5.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틈타면 범죄
이어지는 6절을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말씀하고 있는데 미혹을 받아들이는 여자의 마음 안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틈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먹음직도 하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에 해당하고, 보암직도 하다는 것은 안목의 정욕,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것은 이생의 자랑에 각각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요한일서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말씀한 대로 원수 마귀 사단이 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들어온 것이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무엇인지는 여러 차례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이 시간에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마음 안에 받아들이게 된 여자는 결국 자기 욕심 가운데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그런데 여자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함으로 그로 하여금 함께 범죄하도록 만들지요. 이때 물론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어 먹게 만든 여자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여자의 말에 솔깃하여 넘어가 버린 아담 자신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담은 여자의 머리요,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은 자이며 지배하고 다스리고 정복할 권세를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신이 행한 잘못의 책임을 전적으로 여자에게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므로 이미 혼의 사람이 된 아담은 점점 혼의 작용을 거듭하면서 육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여자로부터 선악과를 먹어보라고 하는 제의를 받았을 때 어찌해야 했습니까? 단호하게 책망했어야 했고 어찌하든 여자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권면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아무런 반항도 없이 스스로 미혹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진리를 단호히 물리칠 뿐 아니라, 상대가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해 주어야 합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비진리가 발동하여 함께 비진리 가운데로 빠져들거나 또는 사망으로 가는 형제를 보면서도 사랑이 없으므로 모른 채 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15-17을 보면 죄를 범하는 형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결론
빌립보서 2:6-8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조차도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실 수 있었지요.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버릴 때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도 순종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만일 '자기'가 살아있고, 자기 '의'가 살아있으며, 자기 '틀'을 버리지 않고 있으면 어떠한 형태로든 불순종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철저히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신 주님을 본받아 아버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온전한 순종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1-15 오후 9:49:55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