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8)
오늘은 십계명 중 제7계명으로 “간음하지 말지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그 의미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행함으로 범하는 간음’을 금하셨습니다
‘간음’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부부간이 아닌 남녀가 성적 관계를 맺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위적인 간음은 대표적인 육체의 일로서 구원조차 받지 못할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했지요.
물론, 아직 진리를 잘 모르는 초신자라면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3단계 이상에 들어서서 어느 정도 진리를 아는 사람이 이런 현저한 육체의 일을 행할 때는 회개의 영조차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철저히 회개하며 금식하며 몸부림치면서 매달려야 회개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당연히 간음을 완전히 버려야 용서받을 수 있지요.
잠언 6장 32절에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했고, 레위기 20장 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여 엄격히 경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혼인 관계가 아닌 남녀 간의 일뿐만 아니라, 짐승과 혹은 동성 간의 범죄에 대해서도 성경에서는 엄격히 금하고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은 드라마나 영화에 비윤리적인 간음에 관한 것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보고 들어도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녀 사이에서도 ‘앞으로 결혼할 사이라면 괜찮다.’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는 더욱 엄격하게 육체적인 죄들을 금하고 계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혹여 세상 풍조를 좇아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 없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마음의 간음’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말씀하셨습니다. 행함으로 간음한 것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이미 “간음했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의 일이 그런 것처럼 사람이 행함으로 범죄하기까지는 먼저 마음에 죄악을 품게 됩니다. 마음으로 미워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고 마음에 분을 품었기에 혈기 내고 욕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마음에 음욕을 품을 때는 결국 행위적인 간음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만 품고 있어도 이미 간음이요 죄의 뿌리는 같은 것이지요.
설령 행함으로 범죄하지 않았다 해도 거룩해야 할 마음에 음욕을 품고 있다면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척하고 있어도 음욕을 품고 음란한 것을 보고 들으며 생각한다면 어찌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마음에서까지 간음을 버릴 수는 없다. 버리고자 노력할 뿐이다.”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면 반드시 마음의 죄성까지도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까지 사하시고자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고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 마음에 있는 죄성까지 뽑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그래서 마음에서 죄성 자체를 뽑아버리면 이후로는 아예 비진리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듣는다 해도 이에 대해 느낌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진리가 아닌 것은 떠오르지도 않지요.
물론 버려 나가는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죄성이 또 나오고, 또 나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녕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해 죄악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똑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파를 벗기다 보면 한 겹, 두 겹 벗겨도 다시 비슷한 모양의 속껍질이 나오지만 계속 벗겨나가다 보면 마침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지요.
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내가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여전히 죄악을 못 버렸구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버리고자 노력하는 만큼 내 마음이 변화되고 있음을 확실히 믿으며 결국은 온전히 성결될 것을 소망하므로 더 힘내어 달려갈 수 있지요. 버린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대로인 것이 아니요, 예전에는 그런 악이 없었는데 새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마음에 있는데도 알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 발견한 것이고, 그래서 결국 한 걸음 더 온전함에 근접하는 것이니 오히려 더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버려 나가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는 혹여 생각 속에 간음이 순간 틈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간음했다고 정죄하지는 않으십니다. 생각 속에 틈탄 것을 계속 받아들여서 상상하고 발전시켜 나갈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 깨닫는 즉시 회개하며 온전히 성결 되고자 계속 노력해 나갈 때는 더욱 은혜와 능력을 주시지요. 마침내는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3. ‘영적인 간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설명한 육체의 간음과 마음의 간음은 육적인 의미의 간음입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영적인 간음인데,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지요. 육적인 간음 역시 근원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하고 세상 정욕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여 믿음이 있다고 해도 마음에서 탐심을 버리지 못하면 세상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골 3:5~6).
제2계명을 설명할 때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은 영적으로 우상이라고 설명했지요. 그래서 탐심이 있으면 영적으로 우상 숭배를 낳게 되고, 이는 더 나아가 영적인 간음이 됩니다. 그러면 제2계명에 나오는 ‘우상 숭배’와 제7계명의 ‘영적인 간음’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계명에서 영적인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 신으로 섬기는 경우가 육적인 의미의 우상이라면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세상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때 이것이 영적인 의미의 우상입니다.
그런데 초신자 때는 아직 믿음이 약하므로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실까? 지옥이 있을까? 부활이 정말 있을까?” 이렇게 의심이 남아 있으니, 세상을 버리고 말씀 가운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지요. 그래서 여전히 돈이나 명예를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등 영적인 우상들을 섬기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말씀을 듣고 기도해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고 성경의 말씀들이 참이라는 사실과 천국과 지옥이 마음에 믿어집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하는 줄 알고 그렇게 노력해 가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이렇게 분명한 믿음이 생겼는데도 여전히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어둠에 속한 것들을 계속 취해 나가면 받은바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며 영적인 간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우상 숭배와 영적인 간음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엄격하게 말하면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말씀하기도 하지만,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도 말씀합니다. 서로 간에 마음 다해 사랑하기로 언약한 부부와 같은 관계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긴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이야 원래 하나님을 잘 모르니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 너무나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고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 주셨지요. 그런데도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욕심을 따라 미혹되니 이방인들의 우상을 받아들였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대상 5:25)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가 영적인 간음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렘 3:8)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북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므로 영적으로 간음하다가 하나님께 버림받고 멸망했는데 남 유다가 이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간음하는 죄를 범해 하나님의 진노를 산 이스라엘은 결국 이방인들의 칼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했지요. 신랑 되신 주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성도들이 정결한 신부로서 단장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가르치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주를 믿고 성령을 받아 천국과 지옥을 마음에 믿으면서도, 주님을 “나의 신랑.”이라 말하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며 비진리와 타협해 나간다면 이는 곧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이 됩니다(약 4:4). 하나님과 원수 되게 행하며 주님을 배신하고 간음한 사람이 주님의 신부라 말할 수 없지요. 장차 주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간음이 육적인 간음보다 더 무서운 죄라고 한 것입니다. 비유 들어, 동생이 형에게 욕하고 침 뱉었다면 그나마 회개하고 돌이킬 때 형이 용서해 줄 여지가 조금은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면 이는 너무나 패륜적인 행동이요, 용서받기가 심히 어려운 일이지요.
이처럼 사람 사이에 육적인 간음을 행한 것도 용서받기 어려운 범죄이지만 영적 간음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배신하면 그 죄질이 더 중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적 간음이 관영한 이스라엘에 대해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말라 하셨고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지라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지요(렘 11:11~14).
이처럼 오늘날도 신앙 안에서 영적인 간음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기도해도 응답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니 점점 더 세상에 물들게 되며 육적인 간음을 비롯하여 사망에 이르는 죄들을 범해 나가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6장, 10장에 나온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현저히 못 박게 되고 결국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고전 3:16~17). 그러니 육적인 간음은 물론 영적인 간음과도 전혀 상관없이 오직 진리만 사모하여 마음에 채워나가시므로 온전한 주님의 신부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흠도 점도 없는 어린양의 신부로서 가장 아름답게 단장하시므로 기쁨으로 혼인 잔치에 참석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4-10-17 오후 4:52:43 Posted
2024-10-25 오전 10:51:29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