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다스려야 할 몸의 행실 (5)
이 시간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살펴보며, 마음을 진리로만 채울 수 있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람이 다스려야 할 몸의 행실 중 생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에서 영의 생각으로 진리를 행한 선한 사람과 육신의 생각, 악한 생각을 하고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육신의 생각에서 더 나아가 악한 지혜, 궤계를 동원한 사람들은 당장은 잘되는 것 같으나 결국 사망의 길로 간 것을 보았습니다. 그 끝이 참으로 비참하였지요. 그러니 우리는 영에 속한 생각, 선한 생각만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원하는 선한 생각보다 악한 생각이 먼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비진리에 속한 생각을 차단하고 진리에 속한 생각만 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마음 안에 있는 비진리를 모두 빼내 버리고 오직 진리로 채우면 됩니다. 그러면 사단이 조정할 수 있는 비진리가 없기에 비진리의 생각이 들지 않지요.
마음 안에 비진리가 있을 때는 사단이 생각을 주관하여 육신의 생각, 악한 생각을 하게 되고, 마음에 비진리가 없고 진리만 가득하면 사단이 역사할 수 없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생각하거나 악한 감정을 갖거나 비진리를 행했을 때 ‘내게 주어진 환경이 힘들고 어려워서 내가 어쩔 수 없었다.’ 하실 게 아닙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하는 선택을 할 수 있지요. 마음에 비진리가 있을 때 비진리의 생각이, 진리가 있을 때 진리의 생각이 나오게 됩니다. 마태복음 9장 4절에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하시며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오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반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동정녀 마리아는 누가복음 2장 19절에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말씀하신 대로, 천사가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 모든 것을, 또 탄생하실 구세주인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하였던 말들을 마음에 담아 믿어드렸고, 예수님을 잘 보필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생각과 긴밀한 연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눈, 귀, 입, 자세까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로 마음을 일구면 생각뿐 아니라 몸의 행실도 변화될 수 있지요. 우선 마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간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살펴보며 마음을 진리로만 채울 수 있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을 낱낱이 분석하여 진리로만 가득한 아름다운 마음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마음의 정의
마음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사전에서는 마음을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이라 정의하며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나 태도”라 합니다. 또 “사람의 생각, 감정, 기억 따위가 생기거나 자리 잡는 공간이나 위치”라 정의하지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의 의미는 육적인 의미와는 다릅니다. ‘영 자체와 그 안에 들어 있는 영의 지식’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영 자체’와 ‘그 안에 들어 있는 영의 지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첫 사람 아담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흙으로 빚으신 후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 즉 살아 있는 영의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의 지식 곧 영의 지식을 심어주셨지요. 아담은 영의 지식으로만 채워져 있었고, 영 자체가 곧 마음이었기에 영과 마음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을 한 이후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사단이 혼을 통해 비진리를 넣었습니다. 이에 영의 지식들이 빠져나가고 그 공간을 비진리가 채우게 되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영의 기운은 완전히 소멸될 수 없는 근본의 능력이므로 ‘생명의 씨’로 마음 안에 남아 영의 흔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불순종 이후 마음은 생명의 씨를 혼이 감싸고 있는 자체가 되었습니다. 즉, 사람의 마음이 진리 자체일 때는 ‘영’이라고 하지만, 육으로 변질되어 하얀 마음과 검은 마음이 섞여 있을 때는 ‘마음’이라고 표현하지요.
사람의 마음을 다시 영으로 회복하려면, 비진리를 주관하는 원수 마귀 사단으로부터 공급받는 혼의 작용을 차단하고, 성령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진리의 지식으로 마음을 채우면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진리의 지식으로만 채우면 온전한 영이 될 수 있지요.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서 비진리를 다 뽑아버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온전히 진리로 이룰 때 그 마음이 영이 될 수 있습니다.
2. 마음의 구성요소
보통 마음은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는 여러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은 크게 3가지로 마음의 구성요소를 구분하고 있지요.
로마서 7장 22-23절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고백하지요.
여기서 ‘속사람’이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명백한 진리의 마음, 곧 하얀 마음을 의미합니다. ‘내 마음의 법’은 양심을 의미하며, ‘죄의 법’이란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 곧 원수 마귀 사단으로부터 심겨진 검은 마음을 의미하지요.
이 마음에서 우리가 변화시켜야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죄의 법, 즉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은 물론, 내 마음의 법인 양심에서도 비진리를 찾아 온전한 진리, 하나님의 의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명백한 비진리는 진리와 완전히 반대됨으로 오히려 쉽게 발견하여 버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19-20절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말씀하시며, 사도행전 5장 17절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한 대로 이러한 악들, 명백한 비진리는 우리의 행함과 모습 속에 쉽게 드러나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은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은 설명하지 않고 내 마음의 법인 본성과 양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그 안에서 비진리와 잘 섞여 있는 여러분의 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본성과 양심 안에 있는 비진리
본성이란 ‘각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근본된 성질’을 말합니다. 본성은 부모로부터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기’뿐만 아니라, 후천적으로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양심은 ‘본성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마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양심은 선이나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판단의 주관적인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양심에 꺼리는 것은 악이고, 거리끼지 않는 것은 악이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양심은 자기 나름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와 나라, 문화와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납니다. 또 세상이 악해질수록 사람들의 양심도 점점 더 비진리에 물들고 악에 대해 무뎌집니다.
따라서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잣대가 될 수 없기에, 항상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본성과 양심에는 자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의와 틀’이 있기에 그 안에 들어 있는 악의 모양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의 양심, 의와 틀과 하나님 선의 차이를 느껴볼 수 있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원수를 갚아야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소설이나 무협 소설을 보면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은 자식 된 도리로 의롭다, 옳다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기에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지요.
다른 예로, 만약 친한 친구가 범죄했는데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몰려 누명을 썼을 때, 친구의 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명 쓴 사람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킨다면,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롭다 할 수 없지요.
또 거짓말에 대한 평가도 세상과 진리는 다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는 친하지 않은 사람의 집에 방문하였을 때 “식사하였는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방문한 집에서 식사를 준비해 주실까 미안한 마음에 “식사하고 왔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예의처럼 생각하던 때가 있습니다.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좋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지요. 그러니 “먹고 싶지 않다.”거나 “이후에 식사 약속이 있습니다.”라고 한다든가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남의 물건을 빌려 쓰고 돌려주지 않거나, 허락 없이 남의 것을 사용하고도 사소한 일이기에 ‘도적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요.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악이 자라나 자기의 유익만 구하거나, 도적질로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성과 양심까지 온전히 선으로 바꾸려면 사소한 것이라도 진리에 위배되는 것은 당장 고치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성 속에서 나오는 의와 틀을 살펴보겠습니다. A는 엄한 부모 밑에서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하지 않고 성장하였습니다. B는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하고 리더십 있게 행동하는 성격을 가졌지요. 이 둘은 각기 다른 부모와 환경에서 성장하였기에 다른 본성과 양심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A와 B가 같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이들이 진리로 변화되기 전 의견이 다를 경우, 상대가 이해되지 않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A는 B를 보며 ‘저 사람은 자신의 의견만 옳다고 하네. 나는 양보하는 건데 큰소리 내지 않으니까 나를 무시하나?’ 하며 불편해합니다. B는 상대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거나 협조하지 않으면서 괜히 눈치 보게 만든다.’ 하면서 싫어하지요.
이렇게 ‘나만 옳다’ 하는 자기 의가 있으면 상대를 판단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사람 사이에 의견과 성격이 다를 때 다툼, 혈기, 불편함, 판단, 정죄, 미움 등 마음에 있는 악이 쉽게 드러나지요. 이때 자신만 옳다 하지 말고 의와 틀, 마음의 비진리를 발견해야 신속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 안에 명백한 비진리를 항상 경계하고 계십니까? 비진리와 진리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은 얼마나 살피고 계시는지요? 내 양심이 진리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항상 겸비하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살펴, 불같이 기도함으로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마음도 신속히 변화되고 선과 진리의 생각으로 더 온전할 수 있습니다.
2025-02-28 오후 10:24:58 Posted
2025-03-07 오후 1:05:48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