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 난 지혜 (7)
오늘은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 양순의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참으로 기이한 사건이 나옵니다. 바벨론 제국의 왕 벨사살이 잔치를 벌이다가 하나님을 심히 만홀히 여기는 행동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그릇, 은그릇에 술을 부어 마시며 자기들의 우상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왕궁 벽에 글씨를 쓰고 사라집니다. 이를 본 왕은 너무 놀라 두려움에 떨며, 이것을 해석하는 사람에게 큰 상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읽을 수도 없었고, 해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다니엘을 떠올리고 그를 불러옵니다. 그 글씨를 본 다니엘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읽으며 그 의미를 설명했는데, 벨사살 왕이 하나님 앞에 심히 교만하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으므로 그 나라가 메데와 바사에 넘겨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왕은 다니엘이 해석을 잘해준 것에 만족하여 영화로운 자주 옷과 금사슬을 주고, 나라의 셋째 치리자, 즉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이 지혜로운 다니엘의 말을 정말 믿었다면, 교만으로 인해 멸망을 선고받았으니 먼저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벨사살 왕은 다니엘의 해석에 만족하여 큰 상을 준 후에,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여깁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향락을 즐기고 잔치를 벌였지요. 그러니 다니엘서 5장 30절에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그날 밤, 적군이 침략해 와서 죽임을 당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로써 미리 경고해 주셨고, 다니엘이 놀라운 지혜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벨사살 왕은 그 지혜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으니 아무런 유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지혜를 듣고 기뻐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은 미련한 자의 길로 갔지요.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여 책도 많이 읽고, 지혜로운 사람들을 가까이합니다. 믿음 안에서도 하나님의 지혜나 영적인 세계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어찌하든 더 많이 들으려 합니다. 그런데 듣기만 해서는 그 지혜가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안다고 해서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고, 행하며 자신을 변화시켜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으로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다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향이 말과 행함의 선한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라 말씀드리면서 세 가지 특징에 대해서 알려 드렸습니다. 특히 양순을 마음에 이룬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 아니라 마땅히 행할 것 이상으로도 행한다고 했는데, 이 시간은 세 번째 특징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 아니라 마땅히 행할 것 이상으로도 행한다”는 말씀을 이어서 설명하겠습니다.
1. 양순의 마음이 풍성히 임한 사도 바울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의 행함과 고백을 보면 양순의 마음이 풍성하게 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알기 전에도 구약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에는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린 것은 물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까지도 누리지 않았지요.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는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것은 우상의 제물로 상에 올렸던 고기를, 성도들이 먹어도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는 우상 숭배가 성행했습니다. 자연히 우상의 제사상에 올렸던 고기를 시장에서 파는 경우가 많았고, 성도들은 ‘우상의 제물로서 상에 올렸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궁금해했지요. 성도가 시장에서 고기를 사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우상의 제단에 올렸던 것이었다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는 것인지 궁금해했던 것입니다.
만약 우상의 제사에 올렸던 것인 줄 알았다면, 안 먹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서 나온 고기인지 시장에서 일일이 확인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형편상 먹어야 할 상황이라면 믿음으로 먹어도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음식으로써 먹는 것일 뿐, 우상 숭배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는 디모데전서 4장 4-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했지요.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우상의 제단에 올렸던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꺼려질 수도 있습니다. 또 믿음 있는 성도가 우상의 상에 올렸던 제물을 먹을 때, 보는 사람 편에서 범죄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음식을 먹는 것만 보고서 우상 숭배에 동조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판단, 정죄하는 것이지요. 혹은 ‘사도 바울 같은 분도 우상의 제물을 먹으니까 나도 괜찮겠지.’ 하면서 먹을 수도 있지요. 우상의 제물이 아니라 음식물로 생각하고 먹으면 상관이 없지만, 여전히 우상의 제물로 생각하고 양심에 걸리면서 먹으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23절에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한 대로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행하는 것은 스스로 송사 거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러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양심이 점점 무뎌질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는 정말 죄를 범하면서도 ‘이러면 안 된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수가 있게 되지요.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을 잘 알기에 “나는 믿음이 있으니 마음껏 우상의 제물을 먹겠다.”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얼마든지 믿음으로 먹을 수 있지만, 혹시라도 이를 본 사람이 실족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자신은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고기를 영원히 안 먹는 일이 있더라도 영혼을 실족시키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했던 것이지요.
2.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
사도 바울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 해도, 또 당연히 할 권리가 있어도 스스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버려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울을 크게 기뻐하심으로,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바울에게 더 큰 권능을 행하게 하셨고, 밝은 영감과 지혜를 더하셨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복음이 전해지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성경이 확정된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 신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궁금하게 여기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앞서 말한 우상의 제물뿐만 아니라, 결혼이나 이혼, 가정과 일터에서의 문제, 성령의 은사에 대한 것들, 성찬식을 할 때의 문제 등 많은 질문이 있었지요. 이런 하나하나의 문제들에 대해 지혜와 명철로써 명쾌한 답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이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지요. 또 큰 권능의 역사를 통해 말씀을 보장받고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생명을 낳고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방향으로 양 떼를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때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평소에도 진리 가운데 행하려고 하지만, 이웃이 내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덕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왜 저러나?” 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는 것입니다. 또 상대가 잘못하여 따질 만한 일이 있어도 그냥 웃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이웃 상점의 주인을 전도하려 할 때는 다른 곳보다 더 비싼데도 굳이 그 가게를 찾아가 사는 경우도 있지요. 이런 것도 어찌 보면 양순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자체에 양순이 임하면 전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항상 선을 택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혹은 누가 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하면 이런 유익을 얻을 수 있겠지, 상대도 선하게 반응하겠지.’ 계산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가득한 선이 말과 행함 가운데 저절로 배어 나오는 것입니다. 양 떼 앞에서 본이 되어야 하는 주의 종이나 머리 된 일꾼들은, 더욱 더 양순을 이루어야 합니다. 뭇사람의 본이 되어야 하기에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굳이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경우
반대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음 안에 육을 버리지 못했으면서 겉으로만 거룩한 척 외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아니고, 믿음 안에서 능히 취할 수 있는 것이라 해도 상대를 위해 스스로 절제할 때가 있다는 의미이지요. 바울과 같이 큰 권능을 행한 사도조차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했지요. 성도들에게 “나를 본받으라” 말할 정도로 담대한 바울인데, 그 담대함의 이면에는 철저히 근신하며 스스로 죽어지는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되, 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나는 진리 안에서 믿음으로 한다.’ 할지라도, 다시 한번 살필 수 있으면 더욱 복된 일이지요. 이처럼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자신을 점검해 나갈 때,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쪽을 택해 나갈 때 여러분은 더욱 온전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대를 위해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너무 많은 제약을 받는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모든 성도들에게 당장 온전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스스로 묶어서라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을 택할 수 있다면, 이것이 참 지혜입니다. 마음에 사심이 없는 만큼, 모든 것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명철을 얻게 되지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로 인해 기쁨을 얻으실 때 그냥 기뻐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삼십 배, 육십 배, 백배 이상의 넘치는 축복으로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이 땅에서 취할 수 있었는데도 주님을 위해 취하지 않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다 기억하신다 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만들어진 집과 상급을 볼 때, 내 작은 소망까지도 기억하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와 사랑을 고백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눈앞의 좋은 것들보다도 영원하고 참된 천국의 것을 사모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진정한 축복을 취해 나갈 수 있는 지혜로운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6-08-19 오후 7:09:10 Posted
2026-09-29 오후 10:41:22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