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7)
오늘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하신 제6계명을 통해 육적인 살인뿐 아니라 영적인 살인도 하지 말아야 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이 중한 범죄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남의 생명을 해치는 것만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해치는 자살 역시 살인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에 대한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지요. 낙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중에 있는 아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에 대한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살인이 왜 나쁜 것인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살인이 죄인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 하신 것은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로 사람의 육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것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살인’ 또한 금하시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영적인 살인이란 무엇일까요?
1. 영적인 살인이란, 진리에서 벗어나는 말과 행동으로 영혼을 실족시키는 것
실족이란 ‘발을 잘못 디딘다’는 뜻인데 신앙 안에서 누군가를 실족시킨다는 것은 상대를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 영혼을 해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는데 예배에 빠져도 될까요?”하는 상담을 받았다고 합시다. 이때 “중요한 일이라면 주일을 어겨도 어쩔 수 없지요.”라고 가르쳤다면 사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니 영적인 살인이 됩니다.
혹은 기관 회비 등 교회 재정을 맡은 사람이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수중에 이 재정밖에 없어서 “며칠 안에 금방 채워 넣을 수 있으니 잠깐 써도 될까요?” 하고 질문했을 때 “다시 채워 넣기만 하면 상관없어요.”라고 가르친다면 하나님의 뜻을 정반대로 가르치므로 상대를 실족시키는 것이지요.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해 함께 구덩이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상대에게 비진리를 가르쳐 주므로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영적인 살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초신자나 양 떼로부터 신앙 상담을 받았을 때 그에 맞는 답을 모르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잘못된 답을 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양 떼의 형편을 어렵게 하고 크게 연단 받도록 하는 일들이 종종 있지요.
바른 상담을 해줄 자신이 없다면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하고 기도해서 정확한 주관을 받든지, 답을 알만한 분들에게 질문해 답해주거나 정확한 답을 해줄 수 있는 분을 양 떼에게 권하면 됩니다. 자신이 해준 답이 진리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상대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만드는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입 밖에 내면 안 될 말, 악한 말을 전해 상대의 영혼을 실족하게 하는 것도 영적인 살인입니다. 악한 말로 남의 허물을 판단 정죄하고 사단의 회를 만들어 수군수군하는 것, 이간질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하지요. 이로써 형제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하거나 판단 정죄하거나 악을 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주의 종이나 교회에 대해 비방하는 말을 전해 많은 사람을 실족시킨 경우도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계수하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 속에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90년대에는 원로 목사님의 간증 수기에 주님께서 언제 오신다고 적혀 있다, 자칭 구세주라 한다는 거짓을 목회자들이 전해 타 교회 성도들이 그대로 믿고 이단이라 판단 정죄하는 일들이 있었지요. 우리 교회 내에서도 사실이 아닌 악한 말들을 전해 그것을 듣고 판단 정죄하여 스스로 실족했을 뿐 아니라 그 말을 전하므로 다른 사람들까지 실족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시험 환난에 빠져야 했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할 때까지 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많이 보았지요.
그런데 어떤 경우는 상대가 실족시킨 것이 아니고 자신의 악으로 인해 스스로 실족을 당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로만 행하셨지만 악한 유대인들이나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빛이신 예수님을 인해서도 실족했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실족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악으로 인해 실족했던 것입니다.
혹여 상대의 허물을 보고 실족한다면 자기 안에 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령, 신앙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구습을 버리지 못한 사람을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래? 저런 사람 때문에 교회 안 나가겠어.” 하며 실족한다면, 이는 판단 정죄하는 자기 악으로 인해 스스로 실족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이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비진리를 행해 실망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내에서 상대를 믿고 보증을 서주었는데 그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결국 자신의 믿음이 참믿음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보증을 서지 말라고 항상 단에서 가르치고 믿음의 형제간에는 금전 거래를 금하라 했는데 상대가 말씀에 불순종하고 보증을 요청한다면 진리로 분별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분별도 못 하고 자신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보증을 서서 상대에게 피해를 보았다면 이는 실족할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할 내용이지요.
또한 사람을 보고 판단 정죄하므로 실족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악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실족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녕 선한 마음이요 참믿음이 있다면 상대의 부족한 모습을 보았다고 해도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기도해 줄 뿐입니다. 어떤 사람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반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믿음이라 하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과 주님을 바라보고 믿었다면 이런 것으로 실족할 이유가 없는데 사람을 보고 신앙생활 했으니 실족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걸림이 되므로 실족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빛 가운데 행치 않고 어둠 가운데 살아가기에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스스로 찔림이 되어 악을 발하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지요. 예를 들어, 단에서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 나올 때 “목사님이 내 말씀을 하시네, 나를 찌르시네.”하고 마음이 상해서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교양과 세상 지식 등에 맞지 않는다 해서 실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온전한 십일조를 해야 축복받는다고 했는데 이런 말씀을 전하면 교회에서 물질을 강조한다며 불편해하고 실족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역사를 말하면 육신의 생각 때문에 믿지 못하므로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 하면서 마음에 걸림이 되고 실족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씀하셨고(마 11:6),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하셨습니다(요 11:10). 자기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 있다면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 실족하지 않을 것인데 자신이 어둠 가운데 거하므로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실족하는 것 자체가 그 자신의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이고 결국 마음에 악이 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진 형제를 실족시키는 사람 편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그 말씀이 진리라 해도 상대 믿음의 분량에 맞추어 지혜롭게 전해야 합니다. 이제 갓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구원받으려면 술 담배를 끊으세요.” 한다거나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주일에는 절대로 가게를 열면 안 됩니다.” 하거나 “기도 쉬는 죄를 범하면 하나님 앞에 담이 됩니다. 매일 성전에 나와 기도하세요.” 이렇게 가르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마치 젖먹이 아기에게 갑자기 고기를 먹인 것과 같습니다. 억지로 순종한다 해도 마음에 짐이 되고 “신앙생활은 무척 어려운 것이구나.” 하면서 자칫하면 아예 교회에 나오기를 포기해 버릴 수도 있지요.
마태복음 18장 7절에 “실족게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했습니다. 자기편에서는 상대를 위해 말했다고 하지만 상대의 믿음에 맞지 않는 말로서 결과적으로는 상대를 실족게 하고 영적으로 살인하게 되니 그에 따른 보응으로 여러 가지 연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정녕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한다면 말 한마디를 해도 삼가 절제하여 상대를 실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은혜와 덕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이 진리를 가르친다 해도 ‘상대에게 짐이 되고 찔림이 되게 가르치는지’ 아니면 ‘소망을 주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되게 가르치는지’ 이것이 중요하지요. 꼭 실족시킨 것은 아니지만 자기 생각을 주장하며 상대를 지적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결국 상대를 실족시키는 큰 죄로 나올 수 있음을 알아 항상 곱고 아름다운 말을 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가르치셨지만, 누구도 실족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인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가르치셨고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셨지요. 이러한 예수님으로 인해 무수한 영혼이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2. 영적인 살인이란, 형제를 미워하는 것
요한일서 3장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했습니다. 단지 마음에 미워하는 것뿐인데 어째서 살인과 같은 죄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살인이라는 죄악도 근본적으로 미움이라는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으로만 미워했다고 해도 그 미움이 점점 발전하면 행함으로도 상대에게 악을 행하게 되고 결국 살인까지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로 살인죄를 범한 가인의 경우도 그 죄의 뿌리는 미움에서 시작되었지요.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사랑하지 못하므로 아벨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으로 인해 심히 시기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동생을 사랑했다면 동생이 하나님께 사랑받는다 해서 시기할 이유가 없지요. 자기 자신이 사랑받는 것처럼 기뻐하면서 자신도 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 하나님께 사랑받고자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불순종한 자신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데 순종한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자, 아벨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기회를 보아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여러 악을 행하게 됩니다. 분이 나서 욕하고 다투기도 하고 상대가 잘되면 시기 질투하기도 하며 판단 정죄하여 상대의 허물을 전하기도 하지요. 거짓으로 속이므로 손해를 입히기도 하고 아예 원수를 맺으므로 서로 상종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미움으로 인해 상대에게 악을 행하는 것들이 결국은 영적으로 살인이라는 말씀입니다(마 5:21~22).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에 스스로 마음에 할례 하여 성결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우리 마음에 성령이 오셨고 죄성까지 버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지요. 그러니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행함으로 살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미움이라는 죄의 뿌리까지 마음에서 벗어 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악들을 벗어버리고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나갈 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며 그 사랑의 증거를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므로 장차 새 예루살렘까지 인도하시고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4-10-10 오후 4:30:57 Posted
2024-10-18 오후 2:20:20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