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10)
오늘은 십계명 중 제9계명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거짓 증거란, 한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하므로 어떤 것을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 증거가 얼마나 나쁜지 확연히 드러나는 대표적인 경우는 재판입니다. 증인의 말이 직접적으로 판결에 영향을 주어 결과로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거짓 증인으로 인해 무죄한 사람이 큰 손해를 입을 수 있고 심지어 생사가 달라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증언하는 사람도, 증언을 듣고 판결하는 사람도 모두가 신중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9장 15~20절에 보면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남을 정죄하지 말며 여러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정황을 바르게 분별해야 함을 말씀하시며, 거짓 증인에 대해 그로 인해 상대가 받을 뻔한 형벌을 거짓 증인 자신이 받도록 하셨지요.
그런데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렇게 공식적인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일상생활 속에서의 사소한 거짓말도 다 버려야 하지요. 상대에게 심각한 손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작은 거짓말 역시 비진리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사실을 말해야만 할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때 이것이 거짓된 행함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범한 잘못에 대해 다른 사람이 누명을 쓰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될까 봐 모른 척한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상대의 잘못으로 자신이 오해받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사실을 말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라 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거짓입니다.
혹은 물건 값을 지불할 때 주인이 착각해서 거스름돈을 더 많이 주거나 어떤 물건을 계산하지 않은 것을 알았는데 아무 말 없이 받아온다면 이 또한 정직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삶 속에서 너무나 쉽게 거짓을 내면서 그 입술로 “주님 사랑해요.” 한다면 어찌 그것이 진실이라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 자체가 정직하여 말과 행실이 다 참되고 진실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하얀 거짓말’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욕심이나 상대를 해치려는 악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위하는 마음에서 거짓말을 할 때가 있지요. 일상적인 예를 들면, “식사하셨습니까?”하는 질문을 받을 때, 먹지 않았는데도 상대가 자신에게 마음 쓰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에서 “먹었습니다.”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도 “아직 식사는 안 했지만 지금 식사를 안 해도 됩니다.”라든가 “돌아가서 바로 식사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라고 지혜로운 답변을 해야지, 상대를 위해서 거짓말했다는 것이 습관이 되면 내 유익을 위해서도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러한 경우도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무고히 죽이고자 할 때 주변 사람들이 다윗을 살리기 위해 사울을 속여야 했습니다. 사무엘상 20장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자신이 다윗을 들에 숨겨 두었으면서도 사울에게 “다윗이 형들을 만나러 갔다.”고 말합니다. 사울 왕이 살기가 등등하여 다윗을 찾기만 하면 즉시 죽이려고 하니 무고한 다윗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기에 요나단의 입장에서는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요나단으로서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다윗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좇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며 중심에서 선한 의도로 말한 것일 때는 하나님께서도 무조건 “거짓말을 했다.” 하고 정죄하지는 않으십니다. 하지만 더 온전한 선의 차원에 이르게 되면 이런 상황조차도 생기지 않게 되지요. 굳이 하얀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라도 상대를 감동하게 하므로 그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좇는 마음으로 거짓말을 하고 나서도 “나는 선한 의도로 했다. 상대를 위해서 했다.”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2. 거짓 증거란, 어떤 말을 더하거나 빼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느낌 속에 말을 더하거나 빼서 엉뚱하게 전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나마 좋게 전하는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나쁘게 전하여 오해를 빚으니 문제입니다.
상대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고 해도 억양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고 장단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왜 그래?”하는 것도 걱정스럽게 “왜 그래?”하는 억양이 다르고, 화가 나서 “왜 그래!”하고 말하는 억양이 다릅니다. 물론 녹음기처럼 상대의 말을 똑같이 전달하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말한 사람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비록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해도 은혜와 덕이 되지 않고 진리가 아닌 말이라면 전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남의 말을 전했다 해도 듣는 사람 편에서는 마음이 상하므로 사람들을 이간하는 결과가 되어 버릴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하지요. 마태복음 12장 36~37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말씀합니다.
3. 거짓 증거란, 상대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 판단하고 헤아리며 비판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거나 말을 들을 때 보고 들은 그대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맞춰 상대의 마음이나 의도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마음이라서 그 말을 했을 것이다.” 하거나 “분명히 이러이러한 의도가 있어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지요.
가령,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어려워하므로 가까이하지 못할 때 윗사람은 자기 생각에 맞춰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저가 나에게 불편한 마음이 있는가 보다. 내가 전에 지적한 것이 서운해서 그러나 보다.” 하는 것이지요. 눈이 나쁘거나 딴생각하며 걷다가 아는 사람을 못 보고 지나쳤는데 상대는 ‘나를 보고도 모른 척하고 지나갔어. 나에게 감정이 있나 봐.’ 생각하기도 합니다.
몸이 아파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보고 “엄살이 참 심하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도 같은 병으로 아파 봤는데 “겨우 그 정도로 엄살 부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 부닥쳤다고 해도 사람마다 받게 되는 느낌과 생각이 다르고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사람마다 감당할 힘이 다릅니다.
또한 아무리 눈치가 빠른 사람도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친한 사이라고 해도 상대의 마음을 다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한집에 살아온 가족이나 부부 사이에도 서로를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런데도 자기 기준에 맞춰 상대를 오해하고 판단하므로 감정을 품거나 상대를 비방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상대는 전혀 그런 마음이 아닌데도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굳게 믿으므로 사실이 아닌 말을 전하게 되고 이것이 결국 거짓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실이 아닌 말을 전하는데 그 말만 듣고 동조하므로 남을 판단하고 허물을 말하는 사람 역시 거짓 증거에 동참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자기 기준에 맞춰 상대를 판단하고 비방하는 사람은 자신이 상대를 정죄하는 그 정죄가 오히려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비진리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악을 발했다면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상황에 부닥칠 때 그들도 자신과 같은 악을 발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속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의심하며 어떤 장면을 보고 나쁜 생각이 들었다면 ‘상대도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으니, 상대의 행동을 오해하여 “저가 나를 무시한다. 교만하다.” 말하는 것이지요.
상대의 허물을 말하며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이 상대보다 더 큰 악을 행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자기 악을 버리고 성결될 때라야 다른 사람의 잘못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마 7:1~5, 12). 그러나 사실 마음의 악을 다 벗어버리면 상대방의 허물을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것을 보기 원하며 상대에게 허물이 있다고 해도 덮어주려고 하지요. 형제를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은 곧 재판장이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큰 악입니다(약 4:11).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은 사람이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 말씀을 판단하는 말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한계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한 의도가 없을 때도 사소한 거짓말을 종종 합니다. 예를 들어, 자기 생각 속에서 사실과 다르게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경우가 그러하지요. 상대가 “아주 많이 먹었다.” 하면 “다 먹어버렸다.” 전하기도 하고, “조금밖에 안 남았다.” 하면 “하나도 안 남았다.” 전하는 것입니다. 혹은 겨우 두세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서 동일한 의견을 말하는 것을 듣고서 “모두가 다 그렇게 말하더라.” 전하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때로는 남의 말을 전할 때 자기 생각에 맞춰 아주 엉뚱한 말로 전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전에, 원로 목사님께서 여러 사람과 한 상에서 식사하시던 중에 “상이 초라하네.”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반찬의 종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각각의 그릇에 담긴 반찬의 양이 적다는 의미였지요. 많은 사람이 함께 먹고 있으니, 그릇마다 반찬이 좀 넉넉하게 담겨 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어떤 분이 전달하기를 “원로 목사님께서 밥상에 고기반찬이 없다고 하셨다.” 전달한 것입니다. “상이 초라하다.”는 말이 그분에게는 “고기반찬이 없다.”는 말로 해석되었기에 하지도 않은 말을 전하면서도 스스로 거짓말하는 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일은 어찌 보면 사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쁜 마음으로 남을 해치려고 일부러 거짓말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악하게 판단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을 더하거나 빼는 거짓된 모습이 자신에게 있다면 더 근본적인 문제를 깨달아 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더하거나 빼서 전달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더 많은 것을 듣기 원하는데 자신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해도, 오직 알고 있는 그대로만 말할 뿐이지 자기 생각과 느낌을 더해서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일도 없지요. 오직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실 그대로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라 해도 자신의 말에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이는 곧 자신의 마음이 진리로 채워지지 않았고 거짓의 속성이 남아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거짓의 뿌리를 다 뽑지 못한 사람은 어떤 긴박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남을 해롭게 하는 거짓말도 능히 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사소한 것이라도 흘려버리지 말고 발견하는 대로 철저히 벗어버리므로 온전케 변화되는 계기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거짓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결한 마음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길을 밝히 비추시고 어려운 일마다 방패가 되어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여러분의 삶 가운데 모든 좋은 것을 아낌없이 부어 주시기를(시 84:11)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4-10-31 오후 4:37:21 Posted
2024-11-08 오후 4:44:09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