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다스려야 할 몸의 행실 (2)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에 대하여, 오늘은 예수님의 눈과 귀, 입과 자세는 어떠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3. 예수님의 눈
1) 예수님은 영혼들을 향한 긍휼의 눈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니실 때 많은 무리가 모여들어도 우쭐하거나 그들의 왕이 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랑과 긍휼함으로 병든 자를 치료하고, 영적인 말씀을 먹이셨지요.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굶주림까지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큰 권능을 행하는 예수님이지만, 인생들의 먹을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는 사랑의 마음과 섬김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부와 명예, 권세가 있고 인정받는 사람들은 나보다 못하고 없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하대하며 그들의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은 병들고 가난하고 헐벗은 영혼들을 바라보셨고, 마음에 담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나요? 가난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눈은 아니었는지요? 정죄하거나 째려보는 눈, 미움과 악이 가득한 모습은 없었는지요? 우리의 눈은 주님의 눈과 같이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으로 대하는 따뜻한 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어드린 믿음의 눈을 가지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 때,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료할 때도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기도하셨지요. 이는 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심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기사와 표적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하늘에 대해 많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의 삶을 보는 영적인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셨지요. 제자들에게 누가복음 10장 23절에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말씀하시며 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고 이로 인해 천국의 삶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복됨을 알려 주셨습니다.
3) 예수님은 상대를 믿음으로 바라봐 주는 영적인 눈, 사랑의 눈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멀리하는 이방인이나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 마음과 중심을 보시고 치료해 주시며 만나주셨지요. 세리 삭개오가 돌이킬 것을 아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구원을 베풀었으며, 연보궤에 아주 적은 두 렙 돈을 넣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그 중심을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적을 때도 앞으로 변화될 모습을 바라보셨지요. 예수님은 모든 것을 오직 진리와 사랑, 긍휼과 선으로 보셨으며 무엇을 보시든 그 겉모양이 아닌 그 속에 담겨 있는 영적인 의미들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귀
악한 자들이 “귀신 들렸다, 바알세불 지폈다”, “사단의 역사다” 하는 등 헐뜯는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분별해 들으시며 들을 것과 버릴 것을 확실하게 진리로 구분하셨지요. 듣는 대로 마음이 상하고 낙심하며 힘들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하신 말씀대로 악한 말은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셨지요. 오직 진리로 들으니 악한 말에 대해 시시비비하고 변론하신 것이 아니라 선으로 수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선으로 듣고, 선으로만 생각하니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선은 항상 악을 이깁니다. 선으로 행할 때 원수 마귀가 일곱 길로 물러가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지요. 예수님께서는 악과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셨지만 돌이킬 수 있도록 선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고 악한 마음으로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악으로 대항하지 않고, 마가복음 2장 17절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며, 진리로 그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송사하기 위해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자를 데리고 왔을 때도, 마태복음 12장 11-12절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는 그 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육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진리로 분별하며 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마친 후, 마귀에게 세 번의 시험을 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히 분별하여 물리침으로 멋지게 승리하셨지요.
우리의 귀도 예수님과 같이 진리로만 분별하여 정확히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나를 칭찬하고 감언이설로 유혹할 경우 미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귀가 얇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남의 말을 쉽게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비진리의 말에도 얼마든지 현혹되어 육으로 물들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하와의 경우, 그 귀와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뱀의 간교한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지요.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은 어떠한 말이든 진리로 바꾸어 들을 수 있는 선한 귀를 가지셨기에 오직 진리와 선의 말씀으로 상대를 깨우쳐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귀 역시 예수님을 닮아 좋은 것만 듣되 설령 나쁜 것을 들어도 진리로 바꿀 수 있는 영적인 선한 귀가 되시기 바랍니다.
5. 예수님의 입
예수님의 입술의 말 또한 선과 사랑, 진리였습니다. 불필요하고 무익한 말을 하지 않음은 물론 많은 말을 하지도 않으셨지요. 오직 생명을 살리는 말씀과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 입술이었습니다. 온유하고 자상하신 모습으로 영적인 말씀을 지혜롭게 비유를 통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악한 자에게도 악으로 대항치 않으시며 오직 진리와 선으로 말씀하셨지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올무를 잡고자 여러 가지 말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악한 의도를 아시면서도 결코 찌르거나 변론하지 않으셨습니다. 미운 감정이나 불편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선하고 지혜로운 말씀으로 일러 줄 뿐이었지요. 그래도 깨우치지 못할 때는 다투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셨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몇 마디 말씀하신 것 외에 어떤 변론도 하지 않으셨지요. 애매히 고난을 받으면서도 아무와도 다투지 않음은 물론, 그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리실 뿐이었습니다.
또한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으로 은혜를 끼치고 새 힘과 소망과 감동함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듣기에 좋은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심령을 변화시키는 날 선 검과 같은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지요.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말은 범사에 유익만 주는,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같이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선한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도 꼬투리 잡는 말, 판단 정죄하는 말, 거짓된 말이었지요. 바로 상대를 죽이는 말이었습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잠언 10장 19절에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고 농담이나 불필요한 말을 자주 하는 것도 무익하며 비진실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단물만 내는 입술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 입으로 기도하는 모든 소원이 신속히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6. 예수님의 자세
마태복음 12장 19-21절에서 예수님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셨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셨지요. 또한 예수님은 다투지도, 들레지도 아니하였으며,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에서도 얼마나 흠이 없고 온전하셨는지를 나타냅니다. 참으로 교양이 있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린 소자나 어떤 사람도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지요.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먼저 물을 달라고 청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을 알기에 여인은 깜짝 놀라지요. 이 장면만 보아도 예수님은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에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척박하고 먼지가 많은 이스라엘의 지역 특성상 유대인들은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풍습이 있었지만 그런 일은 주로 하인들이 합니다. 그런데 스승인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지요. 이에 수제자인 베드로는 민망해하며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리이다” 말합니다. 자신이 아는 예법과 교양으로는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행하신 이유는 장차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알리고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할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주님의 섬김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마음으로 깨달아 복음을 전할 때 희생하고 섬기는 자세로 모든 일을 이루어 가길 원하신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과 이번 시간은 예수님을 비유로 사람이 다스려야 할 몸의 행실을 여섯 가지로 설명해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님의 몸의 행실은 모나거나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오직 우리가 본받고 따라가야 할 표본이 되어주셨지요. 바로 지극한 선과 겸손함, 그리고 영적인 사랑으로 가득한 내면으로부터 나온 행실임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항상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변화됨으로 주님으로부터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는 칭찬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25-02-06 오후 4:40:30 Posted
2025-02-18 오후 3:54:08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