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53)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령 즉 살아 있는 영으로 지음을 받은 첫 사람 아담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영계의 법칙에 따르면 "죄의 삯이 사망"인데 에덴 동산에 사는 아담에게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사망이 그를 주장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으므로 에덴 동산에서 이 땅으로 쫓겨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고 그때부터 사람은 죄로 인해 오는 갖가지 저주에 놓이게 되었지요. 질병, 재앙, 가난 등의 저주가 찾아왔고 그로 인한 고통과 슬픔과 절망 등을 겪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사람에게 모든 질병이나 연약함 또한 저주가 왔기 때문에 반대로 죄에서 떠나게 되면 자연히 질병을 비롯한 모든 저주가 떠나가게 되지요. 물론 자신의 죄가 아닌 부모나 조상의 죄로 인해 저주가 오는 경우도 있지만 설령 이러한 경우라 해도 자신이 죄에서 온전히 떠나 영으로 들어오면 어떤 문제라도 해결 받을 수가 있습니다. 육의 법칙에 매여 있지 않고 영의 공간에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죄에서 온전히 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육의 법칙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노년에 회춘했던 것을 볼 수 있으며 죽는 날까지도 어떠한 질병이나 노쇠함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지요. 일백 칠십 오세라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기한이 차자 기운이 진하여 숨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몸에서 기운이 빠지면서 마치 잠이 들듯이 편안하게 숨을 거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은 그렇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 론 /
1.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한 이삭
1절에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다" 말씀하고 있지요.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그만큼 몸이 쇠퇴하였고 강건한 몸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이지요.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린 아브라함은 죽음을 맞는 날까지 강건할 수 있었지만 아직 악의 모양이 남아 있고 온전하지 못한 이삭은 육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삼 1:2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과 같이 육을 벗고 영혼이 잘되어지는 만큼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되지요. 반대로 육이 남아 있는 이상은 육의 지배를 받으므로 육의 법칙에 따라 여러 가지 육의 현상들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삭처럼 나이가 들면 눈도 어두워지고 몸이 쇠하여 이곳저곳이 불편하게 되지요.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기도 하구요.
스승인 엘리야 선지자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아 여러 가지 놀라운 권능을 행했던 엘리사 선지자도 온전히 벗어내지 못한 악의 모양이 있었기에 그의 죽음이 평안한 것이 아니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왕하 13:14에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하여 엘리사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음을 말씀하지요. 바로 자신을 놀리던 아이들에게 저주하여 암콤으로 하여금 사십이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처참히 죽이게 했던 모습이 엘리사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온전치 못한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는 그처럼 놀라운 권능을 행했음에도 결국 자신은 병이 들어 죽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신에게 어떤 질병이 찾아왔다거나 강건하지 못함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면 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고 자신 안에 있는 악의 모양을 발견하는 귀한 시간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왜 노년에 이처럼 몸이 쇠하고 눈까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는지는 지난 말씀들을 통해 알 수가 있지요.
에서와 야곱을 차별하여 사랑하는 모습, 하나님의 말씀을 더 명심하지 못하고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하고자 했던 모습, 더 온유함으로 가족들을 품지 못했던 모습, 바로 이러한 부족된 모습들이 있었기에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같이 강건한 노년을 맞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이때라도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부족한 것을 발견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삭은 끝까지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해 가지요. 몸이 쇠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삭은 장자 에서를 불러 그에게만 축복을 빌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2. 자기 몸의 노쇠함으로 죽음을 느낀 이삭
2-4절에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했지요. 이처럼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모른다고 고백한 것은 자기 몸의 쇠하여짐을 보면서 죽음이 가까운 것을 느낀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죽음이 가까운 것을 주관받음에 있어서도 그의 아비인 아브라함과 비교할 때는 전혀 다른 차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을 앞두고서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주관받고 미리 주변을 정리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이때 아브라함이 자신의 죽음을 주관받은 것은 몸이 쇠하거나 몸에 어떤 현상들이 나타난 것을 보고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주관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강건하였기에 아브라함이 자신의 죽음을 주관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관하심이었지요. 그러나 이삭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관해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나타나는 육적인 현상들을 통해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죽음에 대해 미리 주관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 31:2에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날 일백이십 세라 내가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여 자신의 수명이 어느 때까지인지를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여호수아를 미리 후계자로 세우고 그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으며 백성들을 위해서도 축복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하늘로 승천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음에 주관받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지요. 그래서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붙좇는 엘리사를 붙좇지 못하게 말리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끝까지 따라붙으니까 결국은 갑절의 영감을 받는 축복도 받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이 자기를 산 채로 들려 올리실 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게 될지를 마음에 주관받고 있었구요. 이처럼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상(身上)에 대해서도 밝히 주관 받았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관해 주신 차원이 아니라 육적인 상황과 현실을 통해 주관받은 것이었지요.
3. 에서에게만 축복하려는 편협된 사랑을 가진 이삭
이삭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주관을 받았을 때 그 이후에 취한 행함도 아비인 아브라함과 전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전에 후처를 통해 낳은 자녀들까지도 생각해서 그들에게 재물을 주어 동방으로 떠나보냈지요. 모든 자녀들을 골고루 살피고 사랑하는 마음이었기에 정통성을 잇는 것은 이삭을 통해서였지만 나머지 서자들에게도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삭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사랑하던 에서만을 생각했지요. 그래서 에서에게 특별히 별미를 만들어 오라 하여 그에게만 마음껏 축복하려 했습니다.물론 에서가 장자이기에 그에게 더 많은 복을 빌어줄 수는 있지만 이삭은 에서와 야곱 모두에게 복을 빌어주려는 마음이 아니었지요. 그 마음을 바로 27:33 이하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설명이 되겠지만 야곱이 어머니인 리브가의 말대로 간교한 꾀를 써서 에서를 대신하여 이삭으로부터 축복의 기도를 받고 난 후 에서는 뒤늦게 별미를 준비하여 이삭 앞에 나왔지요. 그러나 이미 자신이 받아야 할 축복은 야곱에게 돌아가고 난 후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아버지 이삭에게 자신에게도 복을 빌어 달라고 간청을 하지요. 하지만 이미 이삭은 모든 축복을 야곱에게 빌어 주었기에 뒤늦게 온 에서를 위해서는 빌어줄 복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7절 후반절에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며 안타까워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이에 에서는 38절에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며 소리를 높여 웁니다. 결국 이삭이 에서를 위해 축복을 빌어주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야곱을 위해 빌어준 것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요. 이미 야곱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기에 설령 에서를 위해 똑같은 복을 빌어준다 해도 그 복이 에서에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은 이러한 영계의 법칙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마음에서는 안타까울지라도 에서를 위해 야곱과 똑같은 복을 빌어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야곱이 간교한 꾀를 써서 에서에게 빌어줄 복을 가로채지 않았다면 결국 이삭은 에서에게만 마음껏 축복해 주고 야곱에게는 그럴 마음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결과적으로는 야곱이 축복을 받았지만 이삭의 마음은 에서와 야곱에게 골고루 축복을 빌어줄 마음이 아니라 에서에게만 마음껏 축복해 주려는 편협된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이삭은 끝까지 자기 생각 가운데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일을 이루려 했지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마음에 주관을 받아 에서에게 축복을 빌어주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이삭의 편협된 마음 때문에 가족들 사이에도 편이 갈리게 된 것이고 결국 에서와 야곱의 형제 사이는 원수지간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지요. 따라서 여러분은 빌 2:14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말씀대로 범사에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따라 선을 좇아서 누구도 원망이나 시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4. 별미를 통해 축복이 임하는 영계의 법칙을 깨달아야
이처럼 이삭은 장자인 에서를 더욱 사랑했기에 축복도 에서에게만 마음껏 빌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서에게 축복을 빌어주려고 할 때에 먼저 자신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서 가져오도록 하지요. 굳이 별미를 만들어 오라 하지 않고서도 에서를 위해 축복을 빌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이삭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도 대충 음식을 만들어 오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즐기는 특별한 음식 즉 별미를 만들어 오라 명하였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축복이 어떻게 임하는지 이에 대한 영계의 법칙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삭은 아비로서 그것도 에서를 너무나 사랑하는 아비로서 얼마든지 에서를 축복하려는 마음이었지요. 하지만 그냥 무조건 축복을 빌어준다고 해서 그 복이 임하는 것이 아님을 이삭은 알았습니다. 반드시 심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마음의 중심을 담아 드리는 믿음의 행함이 바로 심는 과정을 통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심는다고 하는 행함 안에는 그가 얼마나 마음과 뜻과 정성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왔는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먹을 양식으로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오도록 했던 것 역시 이러한 믿음의 행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행함을 통해 심었을 때 비로소 엘리야가 빌어주는 축복이 그 가정에 임하여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지요.
또한 빌 4:18-19에도 보면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사역을 위해 심었을 때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해 축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했지요. 사도 바울을 위해 심은 것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되었기에 사도 바울은 그들을 위해 축복을 빌어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심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아뢸 때나 문제를 해결받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녕 하나님 앞에 축복받고 응답받을 만한 믿음이 있고 하나님 앞에 마음과 정성을 가지고 나온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심는 행함이 따르게 되지요. 그리고 이때 별미 즉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을 심을 수 있는 믿음이라면 이는 더욱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독자 아들 이삭을 드렸던 아브라함을 인정해 주셨던 것이지요. 또한 자신의 모든 마음과 정성을 담은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씻어 드렸던 마리아의 행함 역시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심지 않고 거두기를 바라는 것은 영계의 법칙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마음과 정성도 없는 모습이지요.
그러므로 갈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경우는 심고도 거두지 못할 때가 있지요. 물론 믿음으로 심은 것은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해도 반드시 때가 되면 거두게 되는데 문제는 내 편에서는 심었다고 생각하는데도 하나님 편에서는 인정해 주지 않으실 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심는데도 몇 가지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먼저는, 마음에 정한 대로 기쁜 마음을 가지고 즐겨 심어야 합니다.
고후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많이 심었다 해도 그것이 처음 정한 것에서 변개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레 27:9-10에 보면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생축으로 생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말씀하고 있지요. 이는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드리기로 서원했을 때 혹 나중에 더 좋은 것으로 드리려 할지라도 이전에 드리려던 것까지 모두 드리라는 뜻입니다. 한번 드리기로 정한 것은 결코 변개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이처럼 더 좋은 것으로 드리려 할 때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처음 드리려던 것보다 못한 것으로 드리려 한다면 이는 더더욱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또한 예물을 드리면서도 아까워하는 마음이나 인색한 마음 혹은 억지로 드리는 마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을 받으실 수가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예물의 많고 적음을 떠나 기쁜 마음으로 즐겨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축복이 임하는 것이구요.
다음으로, 심을 때는 반드시 믿음으로 심어야 합니다.
히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심어야 풍성한 수확과 함께 하늘에도 상급이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믿음대로 역사해 주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한 것은 당장에는 눈에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때가 이르면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가장 좋은 시기를 기다렸다가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심지 못한 사람은 심고도 이내 축복이 오지 않으면 의심하게 되고 심지어 입술로 나에게는 축복이 안 오나 보다 하며 복을 쏟는 말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심은 사람은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 해서 실망하거나 입술로 축복을 차버리는 말을 하지 않지요. 인내하며 축복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며 축복이 오기까지 결코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믿음을 기뻐하시지만 결국 많이 심었을 때에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지요. 더욱이 많이 있어서 많이 심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없는 중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 믿음이기에 이는 분명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됩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심어야 축복받는다는 법칙을 알았을 때 엄청난 부채가 남아있음에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어떻게든 많이 심으려 했지요. 믿음이 왔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믿음대로 역사해 주셔서 저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알맞은 시기에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벼는 봄에 심고 보리는 늦가을에 심듯이 심는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되지요. 또한 씨앗의 종류에 따라 각각 심어야 하는 땅도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도 심어야 할 시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때는 이것이 축복받을 기회인 것을 깨달아 성령의 주관에 순종하여 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지요.
또한 같은 물질을 심는 경우라 해도 어떠한 목적으로 심느냐에 따라 그에 따르는 축복이 다릅니다. 기왕이면 같은 물질이라도 더 크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쓰인다면 그로 인한 축복과 상급도 더 크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이러한 몇 가지 법칙들만이라도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믿음과 정성으로 심는다면 하나님의 종을 통해 축복을 빌어줄 때에 마음껏 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법칙은 바로 심을 때 거둔다는 것이며, 야곱이 비록 간교한 꾀를 쓰기는 했지만 이삭이 즐기는 별미를 준비하여 그 앞에 나갔을 때 이삭이 그것을 맛있게 먹고 마음껏 복을 빌어주었던 것이지요. 그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결 론 /
오늘은 은사집회가 잇는 날인데 본문 말씀을 통해 치료받고 응답받을 수 있는 비결 두 가지를 배우셨습니다. 첫 번째는 질병이나 문제가 찾아오는 근본 원인이 죄에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응답받고 축복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심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 15:26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셨지요.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치 않았으며,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질병이 오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질병을 치료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었던 것을 회개하고 돌이켜 죄에서 떠나면 되는 것이지요. 창 3:14 후반절에 하나님께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뱀은 원수 마귀 사단을 가리키며, 그들에게 흙을 먹으라 하신 것은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 그 중에서도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그들의 권세 아래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죄 가운데서 떠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빛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빛의 공간에 거하게 되므로 원수 마귀 사단이 더 이상 역사할 수 없지요. 이는 꼭 질병의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저주와 재앙에도 동일하게 해당되지요. 바로 죄에서 돌이키고 떠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받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응답해 주시지요.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죄의 담으로 인해 심은 것이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이제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게 되면 이전에 심은 것까지도 열매로 맺히게 됩니다. 또한 마음에 소원이 있어서 아뢸 때도 내 마음을 담아 하나님 앞에 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이 곧 믿음이기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하면 응답은 주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간단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축복과 응답의 법칙을 깨달아 여러분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 자녀들에게 무엇이나 주기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29:56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