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52)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만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증거로서 확증해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성경 상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함께하시는 증거들이 반드시 따랐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을 분별할 수가 있지요. 마 7:20에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말씀하심과 같이 열매를 보면 그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열매로 분별한다고 하는 것이 자칫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예를 들어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그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도망을 가야 했을 때 이러한 상황을 육으로 보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제 더 이상 다윗 왕과 함께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야 했던 것은 그가 이전에 행했던 범죄에 대한 보응이었으며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께서도 그를 외면하여 연단 가운데 놓이도록 허락하실 수밖에 없으셨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연단을 허락하신 것조차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런 경우에는 단지 외적으로 보여지는 현상만을 가지고 그것을 열매인 것처럼 판단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중에 좀 혼동이 된다 생각하실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열매로 분별하라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은 당장 보여지는 열매만 가지고는 분별할 수가 없는 경우도 있으니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분하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과 악이 없다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비록 연단 중에 있어도 그들의 마음은 어찌하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것이었고 악이 없으며 결국 변화되어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장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증거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열매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순종으로 연단을 잘 통과하여 결국에는 아름다운 열매로 나와지더라는 말이지요. 아브라함도 비록 연단을 받기는 했지만 그 모든 과정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받은 연단이기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연단 받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연단이 왔음에도 여전히 불순종을 해 나감으로 변화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버림받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분별할 때도 비록 그가 연단 중에 있다 할지라도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목자의 말씀에 순종하려 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불순종해 나가고 있는가 이것을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드린다 하여 여러분에게 사람들을 보면서 늘 이런가? 저런가? 분별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이 혹여라도 미혹되지 않도록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며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누구도 판단하거나 헤아려서는 안 되지요.
약 4:11에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칫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율법의 틀이나 자기 생각과 의 가운데 사람을 판단하게 되면 이는 곧 스스로 재판장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본 론 /
1. 연단을 선으로 통과하여 축복받은 이삭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의 경우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가 우물을 파는 곳마다 다툼이 생겨서 이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던 것이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받지 못해서가 아니지요. 그러나 이것을 육의 사람들이 볼 때는 마치 불통한 것처럼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이 왜 저렇게 우물 하나를 얻지 못해서 이리저리 방황해야 하는 것일까? 하며 수군거리고 헤아리며 판단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의 사람들은 똑같은 상황을 봐도 자기 생각 가운데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선으로 바라봐 주게 됩니다.
이삭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연단을 선으로 잘 통과하였기에 그 결과는 축복이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이삭은 자신에게 어려움이 왔을 때에 왜 나에게는 정착할 만한 변변한 땅도 하나 없을까? 왜 내가 우물을 파는 곳마다 이런 시시비비가 생겨서 떠나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았기에 창 26:22 후반절에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며 감사의 고백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을 좇아 순종하는 이삭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축복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보장하심 가운데 얼마나 크게 축복을 받았고 그의 권세가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이지요. 전에는 자신들보다 강성해지는 이삭을 보며 시기하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에 이삭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떠나라 했던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지금에 와서는 직접 이삭을 찾아와 화친할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가 있는 이삭을 찾아온 아비멜렉
그렇다면 아비멜렉이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요? 본문 28절에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고백하고 있듯이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하시는 많은 증거들을 보면서 두려워졌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신이 예전에 이삭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땅에서 떠나라"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마치 이삭을 자신들의 땅으로부터 쫓아내듯이 내어 보냈던 것이 혹여라도 이제 와서 자신들에게 해(害)가 되어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와 근심이 있었지요. 자신들이 보기에 이전보다 너무나 강성해진 이삭이 지금 와서 그때의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멜렉 왕은 친구와 군대 장관까지 데리고 이삭 앞에 직접 나와 화친을 요청하게 된 것이구요.만약 이삭이 평범한 하나의 족장 정도로서 부와 권세를 가지고 살아갔다면 아비멜렉 왕이 이처럼 찾아올 리가 없지요. 따라서 아비멜렉 왕이 이삭을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이삭의 부와 권세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커졌다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아비멜렉이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비멜렉에게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구요. 예전에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과 이삭 역시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인해 이처럼 존귀한 자로서 인정받게 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처럼 이삭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인정했다는 것은 아비멜렉이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계신데 그분은 대단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며 그분께서 이삭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인정했다는 의미가 되지요. 이는 곧 이삭이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담대히 전하고 알렸음을 말해 줍니다.
이삭은 비록 이방인들 사이에 살았지만 그들에게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떠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자신 있게 말했던 것입니다. 내가 이방인들 속에 살면서 혹여 그들과 다른 신을 섬긴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면 나에게 어떤 해(害)라도 오지 않을까하여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전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렸던 것이지요.
오늘날은 이삭과 같은 상황이 아닌데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에 다니고 있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같이 담대히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할 수 있고 나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자랑할 수 있는 자녀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보다 오히려 그냥 잠잠히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하지만 마 5:11-12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설령 주님으로 인해 핍박과 어려움이 온다 해도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축복과 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혜롭지 못해서 일부러 핍박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만 다니엘 선지자나 그의 세 친구들과 같이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내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도 그렇게 하는데 여전히 핍박이 물러가지를 않습니다" 이처럼 말할 분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런 분은 우선 내가 너무 지혜롭지 못해서 이러한 핍박이나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며 또한 내가입술로는 주를 믿는 사람이라 하면서도 혹여 말과 행동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정녕 세상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를 발하게 되면 설령 당장에는 핍박과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를 나타내 주심으로 결국은 주변에서도 인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가 나지 않는 모습이라면 이런 사람은 아무리 핍박과 어려움을 받아도 그것이 주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없기에 하늘에 상급도 되어지지 않습니다. 핍박과 어려움이 물러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만을 가리게 되지요.
그러나 이삭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임을 주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나타났기에 왕이라 할지라도 그를 찾아와 머리 숙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핍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 잠시 이삭을 홀대했던 것까지도 어찌하든 풀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보게 되지요. 이러한 아비멜렉을 대하는 이삭의 모습은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3. 아비멜렉을 선대하는 이삭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당신이 예전에 어찌하여 나에게 그리하였는가" 하며 호통을 친다거나 예전의 일에 대해 보상해 주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아니면 서운해 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들을 선대하여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는지요? 눅 6:35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설령 나에게 해(害)를 주었고 나를 핍박하며 어렵게 했던 사람이라도 당연히 선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을 사랑하며 선을 좇는 사람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계속해서 이삭이 하나님께 축복받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삭에게는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있었지요. 하지만 이러한 언약의 말씀이 있다 해도 이삭 스스로가 축복받을 그릇을 준비하였기에 그 언약의 말씀이 임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선을 좇는 마음과 연단 중에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순종의 모습, 또한 주변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이라 인정받을 수 있는 모습 등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는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물론 여러분이 축복을 받고 형통함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만민의 양 떼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분야에서 지킴을 받고 있고 때로는 여러분의 믿음 이상으로 형통함을 받고 있음을 깨달아 보아야 하지요. 아브라함과 이삭 간에 육의 부모 자녀로서가 아닌 영적인 관계성을 깨달아 봄으로써 여러분이 만민의 양 떼로서 받아가고 있는 영육간의 축복의 비결을 깨우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아 부모의 근심이 된 에서
이어지는 34-35절을 보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했지요. 이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 말씀하신 것이 단순히 외적인 상황만을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에서의 중심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에서가 비록 장자의 명분을 죽 한 그릇에 팔았다 해도 그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백성 가운데서 아내를 택했어야 하지요. 자신을 장자의 명분을 이어갈 사람으로 여겼다면 이방 여인 중에서 아내를 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정통 계보를 잇기 위해 본토 친척의 집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이삭의 아내를 구해온 것을 에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렇다면 장자로서 자신이 어찌 행해야 할지를 알아서 정통성을 잇고자 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럼에도 에서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택했고 이러한 모습은 당연히 이삭이나 리브가에게 근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삭도 예전에 자신의 이복형인 이스마엘이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너무나 잘 알기에 또한 에서의 행동이 장자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며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나는 것임을 알기에 에서를 보면서 마음에 근심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에서는 훗날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돌이키려는 행함을 보이게 됩니다.
창 28:6에 보면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했던 것이지요. 더욱이 8절에 보면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했습니다. 그제서야 에서는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깨닫고 9절에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했지요. 그래서 그나마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마엘을 찾아가 그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지요. 처음에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를 삼고자 할 때 왜 이삭이나 리브가가 말리지 않았겠습니까? 야곱에게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권면했던 것처럼 당연히 에서에게도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전했겠지요. 그럼에도 에서는 그 순간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택했던 것이고 자신이 집안의 장자로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5. 마음 중심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의 차이
그러니 이러한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장자의 명분이 옮겨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요. 비록 야곱이 간교한 꾀를 써서 형으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는 했지만 그래도 야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모의 권면에도 순종했구요. 이처럼 에서와 야곱 둘 모두가 같은 부모를 통해 태어났고 같은 환경 속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모습이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왜 같은 목자 아래서 가르침을 받고 같은 제단에서 신앙생활 해 나가는데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하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기까지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중심의 차이 때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의 차이 때문이지요. 똑같은 시간을 기도하고 똑같이 사역을 해도 어떤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열매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도 곁에 두고 가르쳤던 열두 명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는 베드로와 같은 제자가 있었는가 하면 가룟 유다와 같은 제자도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의심 많은 도마도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구요. 이 역시 중심의 차이인 것이며 얼마나 중심에서 영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잠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는다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더 사랑해 주시고 누구는 덜 사랑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 주십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편애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하나님은 공평하게 전 인류를 만민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셨던 것이구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다 사랑하시고 공평하게 사랑을 주기 원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도 공의의 법칙에 맞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을 수도 있고 덜 받을 수도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중심을 인정받을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에서의 입장에서는 왜 나에게 와야 할 축복이 동생 야곱에게 가는 것일까? 하며 원망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왜 야곱이 더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중심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심을 닮아 가고자 해야 하는데에서는 그렇지를 못했기에 결국 에서에게 가야 할 축복이 동생 야곱에게 돌아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내용은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람의 중심이라는 것이 본래 타고 나는 면도 있지만 태어나 성장하면서 형성되는 면도 있습니다. 또한 주 안에서는 태어나 자라고 성장하면서 이미 굳어져 버린 중심까지도 변화시킬 수가 있기 때문에 어떠한 중심을 가지고 태어났느냐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지요. 예전에 중심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중심이란 "마음이 굳혀진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이 매 순간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한 번, 두 번 계속 쌓여서 굳어지다 보면 그것이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음을 쓰는 것은 결국 행함을 통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며 핑계를 대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마음에 있다면 반드시 행함으로 나오게 됩니다. 적어도 행함으로 나타내려는 노력이나 애쓰는 모습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비록 작은 행함 하나에서도 나타날 수가 있지요. 마음을 담은 행함 하나하나를 쌓아 갈 때에 그것이 결국에는 중심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를 한 번 할 때에도, 예배를 한 번 드릴 때에도, 또한 봉사를 하고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쌓아 가느냐에 따라 마침내는 중심도 변화될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나는 원래 중심이 안 좋으니까 하며 타고난 중심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마음을 어떻게 선으로 영으로 쌓아 가느냐가 결국에는 자신의 중심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큰 것부터 먼저 바라보지 마시고 여러분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일 하나하나를 먼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참 순종이라는 것은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라 했지요. 순종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하는 것이구요. 그러려면 큰 것에도 당연히 순종해야겠지만 먼저는 작은 일에서부터 순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처음부터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중심이라면 좋겠지만 작은 일 하나부터 온전히 순종해 나가는 사람은 점차 큰 일에도 순종할 수 있고 마침내는 순종할 수 없는 것에도 순종할 수 있개 되지요. 그러니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매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나가심으로 아브라함과 같이 온전한 순종의 사람으로 나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30:01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