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48)
서 론 /
사람이 아무리 부와 명예와 권세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더욱이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발 사태와 같은 상황을 만나기도 하지요. 이는 한 나라의 왕이나 권세자 또는 귀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들에서 사람들은 전능자를 찾고 그 능력을 구하게 되지요.
성경에는 자신의 능력이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문제를 해결받고 응답 받는 장면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집안의 모든 태가 닫혔던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태가 열리는 응답을 받았지요.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 앞에 나왔을 때 문둥병을 치료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와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람 요셉으로 인해 7년간의 흉년의 재앙도 이겨낼 수가 있었구요.
아비멜렉이나 나아만 또한 애굽 왕 바로는 모두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역사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을 보장해 주셨고 더불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셨던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주에는 중동 출장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일반 계층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런 분들이 제 앞에 나오는 것은 이미 저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고 저를 통해 나타나는 권능을 믿기 때문이요 또 축복의 기도를 받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저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보면 도저히 제 앞에 나올 수 없을 만한 분들이 저를 찾아와 기도를 받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중동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본 교회에 주신 이사야 60:3에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하신대로 모든 것이 지금 이루어져가고 있지요. 더욱이 이번 출장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핵심에 가까이 다가서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고 우리를 돕는 분들이 얼마나 든든한 힘이 되어줄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중동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 늘 마음에 품고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본 론 /
1. 이스마엘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신 하나님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씨인 이삭을 낳기 전에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로부터 얻은 아들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계속해서 아브라함과 함께 산 것이 아니라 이삭이 젖을 뗄 무렵에 사라에 의해 하갈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지요. 그후 이스마엘은 바란 광야에 거하면서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12절부터 이스마엘의 후예에 대해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대로 이루진 것입니다. 창세기 17:2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하고 약속의 말씀을 주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며 마음 아파하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번 창세기 21:13에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에게도 창 21:18에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약속하셨구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아들들을 통해 그 족속대로 열두 방백을 이루는 큰 민족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마엘이나 하갈만을 놓고 본다면 그들이 결코 이러한 축복을 받을 자격은 못되었지요.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곁을 떠난 이후 점점 하나님과는 멀어져만 갔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살면서 그처럼 아브라함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지만 하갈과 이스마엘은 하나님을 계속하여 섬긴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삶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니 이스마엘은 이방 애굽 여인을 아내로 취했던 것이구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셨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지키시고자 집을 떠난 이스마엘이 하나의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 그를 지키시고 붙드셨으며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번성케 하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약속의 씨인 이삭은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성장해 갔지요. 그리고 이삭이 장성하여 40세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고향 출신 여인인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이스마엘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던 것과는 전혀 달랐지요.
2. 이삭과 아브라함의 믿음 차이
그런데 이삭에게도 믿음의 연단이 오게 됩니다. 결혼한 지 20년이 다 되도록 후사가 없었던 것이지요. 물론 100세가 돼서야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오래 기다렸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결혼한 지 20년이나 되어 60세가 다 된 이삭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1절에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게 되지요. 이 말씀 자체로만 보면 이삭은 참으로 믿음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보장받는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에 대해 보고 듣고 배웠기에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풀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이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지요. 그러나 이삭의 이러한 모습을 아브라함의 모습과 비교해 본다면 많은 것을 깨우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기까지 많은 인내의 세월을 보내야 했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말씀을 듣고도 25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것도 젊은 나이가 아닌 100세나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처럼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없었을까요? "하나님, 저에게 후사를 주신다 약속하신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후사가 없습니다. 저에게 약속하신대로 후사를 주시옵소서" 얼마든지 기도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무조건 믿음으로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신앙이라면 이삭처럼 능히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도 있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응답을 주실 때까지 잠잠히 참고 인내하며 기다렸지요. 그것은 바로 자신 편에서 응답의 때를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때가 오기를 오직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처럼 참고 인내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나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의 씨이기에 그를 통해 후사가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다리면 언젠가는 반드시 후사를 주실 수밖에 없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고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이삭에게 후사를 주실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한 것이고 또 이삭에게도 약속한 바입니다. 다만 그 시기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요. 이삭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그 시기가 오기까지를 기다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20여 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응답이 없자 결국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 것이지요. 이때 이삭이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자체는 분명 믿음의 열매이지만 그럼에도 이삭은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겼다면 잉태케 해달라고 기도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섭리하신 모든 일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하나님 편에서 먼저 역사하실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의 신앙과 이삭의 신앙을 통해 신앙의 차원을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우리 일꾼되시는 분들도 하나님의 일을 놓고 있을 때에 분별하셔야 하구요. 이삭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신앙 자체만 놓고 본다면 뛰어난 믿음이지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과 비교해 볼 때에 더 깊은 차원에 이르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만약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왔을 때 그것을 믿음으로 기도하여 응답받고 해결받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좀더 깊은 차원에 들어가게 되면 문제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이면(裏面)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볼 수 있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당장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만이 최선책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의 사업터에 일이 해결될 듯하면서도 안 되고 있다고 할 때 당장 급한 마음에 이 일이 잘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지요. 이때 정말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지만 이때 좀더 깊은 차원을 보는 사람이라면 당장의 문제 해결보다는 왜 이 일이 될 듯 하면서도 안 되는지 원인을 깨닫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하거나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하여 가만히 앉아 응답이 오기만을 기다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깨달아야 정확한 해결책이 보인다는 뜻이지요.
제가 중동에 출장을 가는 것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인데 한 번, 한 번 발걸음을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일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한 명을 만나는 것도 또한 사람을 만나서 기도를 해주는 것도 사람의 생각이나 계획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요. 만약 사람의 생각을 동원한다면 그곳에 가서 문제 있는 사람들을 되도록이면 많이 만나서 기도해주므로 그들이 응답받고 치료받아 소문에 소문이 빨리 퍼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또는 당장에 우리에게 유익이 될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은혜를 입도록 하여 우리에게 물질적인 유익이 되도록 할 수도 있구요. 만약 저를 만나기 원하는 사람을 다 만나준다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씩 기도해 주고 문제 해결해 줄 수 있는 길들이 얼마든지 있지요. 제가 믿음으로 그렇게 기도해 나간다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믿음대로 역사해 주실 것이구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저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 하여 무조건 나 보기에 좋을 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기다려야 하는 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루에 한 명을 만난다 해도 저는 나머지 시간을 호텔 방에 홀로 앉아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했을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주관하셔서 제 앞에 나오도록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찾아 나서지 않아도 목적하신 목표에 가장 빠르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을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만드시고 인도해 가시더라는 말이지요. 그 시간이 육으로 보면 때로는 길고 현실은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믿음으로 그렇게 맡겨왔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바로 이러한 깊은 섭리를 알았기에 자기 믿음과 자기 생각에 따라 하나님께 구한 것이 아니라 잠잠히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삭은 때를 기다린다고는 했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맡겼던 것이 아니었지요. 이것이 바로 이삭과 아브라함의 신앙의 차이입니다. 물론 응답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도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이었지만 끝까지 하나님만을 믿고 바라며 그분의 뜻대로 인도받기를 원했던 아브라함의 신앙에 비하면 그만큼 온전치 못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지요.
3. 이삭의 기도를 들으시고 리브가를 잉태케 하신 하나님
그런데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리브가가 잉태하게 된 것이 이삭에게 잉태케 하는 축복권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간혹 기도하여 잉태케 하는 축복권을 가진 사람이 여러 명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경에서 잉태의 축복권을 가진 선지자는 오직 엘리사 한 사람 뿐이었지요.
왕하 4:16 전반 절에 "엘리사가 가로되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했던 말이 그대로 응하여 17절에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돌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외의 다른 경우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직접 잉태의 축복을 주신 것이지요. 이삭의 경우도 그에게 잉태의 축복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어차피 이삭을 통한 후사는 나와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잉태를 못하다가 서원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잉태의 축복을 받은 경우이지요. 삼상 1:5-6에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말씀한 대로 한나로 하여금 성태치 못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지요. 태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는 오직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상 1:19-20에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했지요.
그런데 혹자는 삼상 1:17에서 하나님 앞에 서원 기도를 하는 한나를 본 엘리 제사장이"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했던 말을 가지고 이것이 엘리 제사장의 축복으로 한나가 잉태한 것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엘리 제사장이 축복을 빌어준 것은 한나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일반적인 의미에서 축복을 빌어준 것이었지요. 이는 한나가 아이를 낳은 후 삼상 1:27에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고백했던 것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얻기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심으로 한나로 하여금 잉태하여 아이를 낳게 하신 것이지요.
이외에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잉태하여 낳게 된 삼손이나 세례 요한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친히 잉태의 축복을 말씀해 주시며 잉태케 역사해 주신 경우들입니다. 그러니 결국 잉태를 주관하시고 잉태의 축복을 주시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있는 것이며 잉태의 축복권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엘리사의 경우도 잉태의 축복을 빌어준 것이 단 한 번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지극 정성을 다해 자신을 섬겼던 여인이었기에 그 마음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으로 잉태의 축복을 빌어주었던 것이구요.
그런데 본 제단에서는 잉태의 놀라운 역사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나타나고 있고 조금만 믿음을 내보여도 역사해 주고 계시니 이것이 얼마나 크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인지를 마음 중심에서 깨달을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이어지는 본문 22-26절에 보면 이삭이 리브가를 통해 낳은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이 나오게 됩니다. 앞으로 전개될 창세기의 내용을 암시하듯 에서와 야곱은 이미 태중에서부터 서로 싸우며 서열 다툼을 하고 있었지요. 에서는 그 마음에 인내함이 있었으나 25:27절에 "들사람이 되었다" 말씀한 대로 성격이 거칠고 급한 면이 있었지요. 그러니 결국은 폭발하여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리브가의 성격을 닮았는데 25:27절에 "종용한 사람"이라 말씀한 대로 그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이었으나 그 속에 간사하고 교활한 마음이 있었지요.
이처럼 성격부터 차이가 났던 에서와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다툼이 일어났는데 이에 리브가가 어찌할지를 하나님께 여쭙자 23절에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지요. 하나님은 이미 이렇게 낳기 전에 응답해 주셨다 이 말입니다. 이미 복중에 있을 때 누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함을 받게 될지가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해 놓으시고 인도해 가시는 분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지하시는 가운데 중심을 보고 택하시는 것이며 택하신 대로 이끄시기 위해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이때 결국 스스로가 연단을 통과하여 변화되어 나옴으로 하나님께서 예지하신 가운데 택하신 대로 쓰임받게 되는 것이지요. 에서와 야곱의 경우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태중에서부터 그들의 중심을 보셨던 것이며 이때 어떤 그릇이 연단을 통해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 쓰일 수 있는 곧고 바른 중심을 가졌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토질과 성격 그 그릇 등을 두루 살피셔서 그에 맞는 연단을 허락하여 변화시키시지요. 만약 하나님께서 에서를 택하셨다고 할 때에 그에게 장차 야곱이 받아야 했던 20년 간의 연단을 허락하셨다면 과연 에서가 그것을 잘 통과했을까요? 그의 성격으로는 그 세월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간사하고 교활한 면은 있었으나 능히 20년의 연단을 통해 결국에는 지렁이 같은 야곱으로 나와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장차 에서와 야곱 사이에 일어날 장자권의 분쟁을 생각해 볼 때에 이삭이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말씀을 마음에 명심했다면 장차 형제간에 일어날 비극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들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내를 통해 받았음에도 거기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가 이렇게 오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삭과 아브라함의 신앙의 또 한 가지 커다란 차이점이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일 5:14에 보면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르게 분별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을 비교해 봄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바르게 기도하여 구하는 것인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어렸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한 채 자기 생각과 뜻 가운데 구해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해(害)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장하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의 신앙과 같은 모습으로 구한다면 이때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가 없지요. 여러분은 영으로 온 영으로 사모하여 들어오는 분들로서 기도를 한 마디 올림에 있어서도 무엇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가를 바르게 분별하여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때와 기한은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가장 합당한 시점을 정하여 주시는 것이 우리에게도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 편에서 정하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성숙된 신앙의 모습도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루리라 하셨을지라도 응답이 주어지는 그 순간까지는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여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아름답게 응답되는 여러분의 삶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30:18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