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47)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조금의 생각 동원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좇아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 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아무래도 약속의 씨인 아들 이삭의 장래이지요. 이삭을 통해 그의 후손들이 뭇별과 같이 창대하게 번성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기에 이러한 섭리를 이룸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큰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 일은 바로 이삭의 아내될 사람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삭이 결혼을 해서 후사를 낳고 그들이 번성하며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야 아브라함으로서도 안도의 마음이 들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으며 당시의 상황에서는 집안의 가장 중대한 일이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처럼 중요한 일을 맡아서 이루어낸 것이 그의 늙은 종이었지요. 그것도 단순히 시키는 일을 해내는 차원이 아니라 주인인 아브라함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뜻에 맞추어 일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늙은 종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단순히 집에서 부리는 종으로서의 존재를 넘어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어떠한 어려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벗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었지요. 이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약 2:23에 보면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했습니다. 또한 출 33:11 전반절에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으로서도 하나님과 벗이요 친구의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이런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 성경 안에서 이에 대한 많은 답을 찾을 수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악이 없는 그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훨씬 높은 영의 차원에 계신 분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을 내가 살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육의 차원의 한계에서 바라본다면 이해되지 않는 분야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되는 일이겠습니까? 또는 홍해를 가르라고 하는 말씀이 사람의 이론으로 이해되는 일이겠는지요? 그런데 모세나 아브라함은 육의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도 아무런 이유나 변명을 하지 않고 오직 아멘과 예만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마음에 악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늘 선으로 영으로 바라 볼 수가 있었지요. 그들의 마음이 선하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무슨 명령이나 지시를 하셔도 그들에게는 조금도 걸림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깊은 것이라도 말씀해 주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도 진정한 친구 관계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설령 부모에게도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일을 솔직히 털어놓고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바로 진정한 친구 사이이지요. 그리고 친구 사이에 이렇게 비밀이 없이 어떤 것이라도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서로 간에 무슨 대화를 한다 해도 서로가 오해하지 않고 상대를 이해해 줄 것이라는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사이에서도 마음에 악이 전혀 없고 진리로만 채워진 사람은 그 마음이 영의 차원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의 차원을 이해할 수가 있지요. 어떤 일을 할 때도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서 그에 맞추어 드릴 수가 있는 것이구요. 이런 사람을 찾으셨을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며 기꺼이 벗과 같은 관계로서 대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하나님과 이러한 벗의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이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벗과 같은 늙은 종이 곁에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이 땅에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복된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에게도 육의 죽음이라는 순간이 다가오게 됩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을 통해 나와진 후손들과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 론 /
1. 생전에 서자들을 모두 독립시켜 떠나보내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사라가 세상을 떠난 후 그두라라는 후처를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두라에게서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여섯 명의 자녀를 더 낳았지요. 이들이 비록 아브라함의 정통 계보를 잇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후손들도 장차 나름대로 민족을 이루며 인간 경작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전에 이처럼 후처를 통해 낳은 아들들을 모두 독립시켜 떠나보내는 것을 볼 수 있지요.
5-6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준 것은 이삭이었지만 서자들에게도 나름대로 재물을 주어 이삭과는 떨어진 곳으로 가게 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이렇게 한 것일까요? 이는 이삭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후처를 통해 낳은 자녀들로 인해 어떠한 식으로든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이렇게 한 것이 예전에 사라가 생각을 동원하여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이삭으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만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전에 사라가 이스마엘을 이삭으로부터 멀리 떠나보내도록 했던 것은 혹여라도 이스마엘로 인해 자신이 낳은 아들인 이삭이 약속의 씨로서 정통계보를 잇는 데에 있어서 지장이 있을까 하는 육신의 생각 때문이었지요. 또한 이스마엘로 인해 자신이 낳은 아들 이삭이 해라도 입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서자들을 이삭으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하는 것은 육적인 생각이나 염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차피 정통 계보를 이어가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인도함을 받아가게 될 민족은 오직 이삭을 통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그러므로 비록 자신이 낳은 자녀들이지만 이삭을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은 정통계보를 잇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삭을 통해 나온 후손이 아닌 다른 자녀들을 통해 나온 후손들은 점차 시간이 지나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마침내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민족으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자녀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있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살아가는 삶에 대해 배웠지만 이제 아브라함이 죽고 난 후에 시간이 지나면 점차 하나님을 경외함도 사라지고 하나님과는 멀어지게 되고 말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 아브라함이 육적인 정 때문에 이삭과 다른 서자들이 계속해서 함께 살도록 했다면 지금 당장은 좋게 보일지 몰라도 훗날 그들의 후손들이 서로 섞여 살게 되면 자칫 이삭을 통해 나온 후손들의 정통성마저도 훼손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삭의 후손들이 아무리 정통성을 지키며 살려고 해도 하나님과 멀어져만 가는 다른 후손들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이삭의 후손들까지도 물들어 갈 수 있는 것이지요.
2.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정통계보를 이어가기 원하시는 이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계보의 정통성을 그대로 잇기 원하시는 근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섬김이 그대로 이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정통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서자들과 그의 후손들로 인해 정통계보를 이어가야 하는 이삭의 후손들까지도 하나님에 대한 마음과 섬김이 변질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코 그러한 일이 생겨서는 안 되지요.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너무나 잘 아는 아브라함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생전에 미리 정통계보를 이어야 하는 이삭과 그렇지 않고 결국 정통성에서 벗어나게 될 서자들을 서로 떨어뜨려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육과 영이 함께할 수 없는 것과 같지요.
고후 6:14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았기에 육적인 정에 끌려서 서자들을 자신의 삶의 터전에 묶어 놓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떠나 나름대로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일굴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이삭과 나머지 서자들을 서로 차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지요. 그래서 이삭에게 모든 소유를 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얼마의 재물은 구별하여 그것을 서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이삭은 어차피 정통 계보를 이어 그 가문을 이어가야 하는 자녀이기에 그 살림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아브라함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를 그대로 맡길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하여 정통계보를 잇지 못할 나머지 서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도 나름대로 정착할 곳을 찾아 살아갈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재물을 주어 보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003년도에 "육과 영을 가르신다" 말씀하셨고 금년에는 영의 주도적인 흐름 가운데 육과 영이 더욱 분명하게 나누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은 육으로, 영은 영으로 더 치우쳐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분들은 생각 가운데 왜 굳이 육과 영을 나누어야 하나? 그냥 함께 가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너는 육이다, 너는 영이다" 이렇게 나누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육은 육의 길로, 영은 영의 길로 택해서 가는 것입니다.
마치 본문에서 정통성을 잇는 이삭과 그렇지 않은 다른 자녀들이 함께 섞일 수 없었던 것처럼 육과 영은 나눠지게 되는 것이며 영에 속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는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사람들은 영에 속한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하여 육을 완전히 제해 버리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육에 속해 있던 사람이라도 영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주고 계시지요. 지금이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육에서 영으로 옮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꼭 정통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원칙은 없지요. 다만 하나님께서는 예지예정하시는 가운데 그들이 장차 어떠한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주관하사 그들로 하여금 이삭을 떠나도록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정통성을 잇지 못하는 서자로 태어났다 해도 그들이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배우고 가르침 받은 것을 명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사는 삶을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서자니까 그래도 안돼"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행함을 보시고 비록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함받은 것은 아니라 해도 어떻게든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축복 안에 살아가도록 역사해 주셨을 것입니다. 결국 택함받지 않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과 행함이 안 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정해 놓고 강제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셔서 자유의지 가운데 선택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스스로 그 기회를 잡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달아 반드시 영의 흐름에 동참하여 하나님께 속한 영의 공간 안에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윗음부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된 아브라함
7-8절에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다 하여서 어떤 병이 들거나 연약했던 것이 아니었지요. 그의 영혼이 잘되어졌으니 늘 강건한 축복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도 정해진 때가 되어 육의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했지요.
아브라함이 왜 육의 죽음을 맞아야 했는지는 전에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들림받은 에녹이나 엘리야, 또한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가 없으며 그의 시체를 놓고 마귀와 천사장 미가엘이 서로 다투어 변론을 하는 장면이 유다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세 선지자와 비교할 때 그 역시 죽음을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굳이 육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것은 그가 죽은 후에 윗음부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육의 죽음을 맞는다 해도 그것이 죄의 삯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진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강건한 삶을 살았던 것이고 이제 때가 되어 죽음을 맞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의 온몸에서 기운을 다 빼시므로 자연스럽게 숨을 거두도록 하셨던 것이지요.
더욱이 아브라함은 자신이 죽을 때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 정리를 다 마치고 죽음을 대비하였으며 평안한 가운데 숨을 거두었지요. 죽음이라는 과정을 두렵거나 공포 가운데 맞이했던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맞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자신이 감당해야할 사명을 온전히 마쳤고 잠시 후면 뵙게 될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하며 모든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했던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이 죽음을 맞는 순간에 회고하며 고백했던 내용
이제 잠시 아브라함이 죽음을 맞던 순간에 그 마음에 회고하며 고백했던 내용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말씀해 주신 내용이지요.
"내가 이와 같이 살아 숨쉬는 동안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인도하셨고
내가 죽음을 앞두며 모든 것을 정리함에 있어서 내 마음을 주관하시고
내 마음에 행복을 느끼게 하시며 내 마음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이 길을 맞이하게 하시는 아버지 앞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나이다.
오늘날까지 내가 이와 같은 복을 받으며 살아 온 것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인도하셨음이나니 내가 그 사랑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너무나 충만하였고
부족함이 없었나이다. 이제 죽음을 눈앞에 보는 이 시점에 있어서까지도
나를 주관하시고 나를 그 품에 안으시니 감사와 영광을 드리나이다.
내가 아버지 보시기에 온전한 믿음을 내보인다 하였으되
어떤 때에는 생각이 동원될 때도 있었으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모든 길을 여셨고 모든 길로 인도하시며 하나하나 다듬어 주셨나이다.
나를 다듬어 온전케 하시는 아버지 앞에 내 마음 깊이 감사가 쌓이게 하심으로
모든 것을 볼 때에 그것을 나의 현실의 눈으로 보게 된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마음으로 보게 되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인도하셨음에 감사를 드리나이다. 그럼으로 인하여서 오늘날 이와 같은 부와, 이와 같은 명예와 이와 같은 명성과
이와 같은 아버지의 영광이 내게 있으므로 많은 이들에게 칭송을 얻으며
내 자식으로 인하여서 기쁨이 되어지니 감사를 드리나이다.
내가 살아 생전에 정녕 아픈 곳이 없었고 내 살아 생전에 어떤 어려움도 없었으며
어떤 것으로도 힘듦이나 고통의 상황이 없었으므로 인하여서도 감사를 드리거니와
이제 숨을 거둔 연후에 아버지 품에 안겨
앞으로 되어지는 아버지의 섭리를 바라보게 하심에도 감사를 드리나이다.
아버지시여, 내가 죽음을 앞두고 이와 같이 감사와 기쁨과 희열이 넘치게 하심에
감사를 드리나이다. 이제 이후로 모든 것이 아버지의 섭리 가운데 있사오매
내가 육의 모든 것을 놓는다 할지라도 앞으로의 계획하신 모든 일들이
아버지의 섭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지게 될 것과
아들을 통한 섭리를 온전히 이루실 것을 믿나이다.
아버지 감사를 드리나이다.
내가 이와 같이 아버지 앞에 평안하게 안기게 하심에 감사를 드리나이다.
이 땅의 삶이 너무나 덧없는 것이로되 아버지께서 내게는 그 삶을
덧없게 하신 것이 아니요 너무나 귀하고 값진 것이 되게 하심으로
이제 죽음을 맞이할 때 이와 같은 기쁨과 감사함과 희열이 넘치는 가운데
아버지 품에 안기게 하시니 감사를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아버지 손에 있사오며 모든 것들로 인하여서 아버지 크게 영광을 받으소서"
아브라함은 이처럼 마음 중심에서 고백하며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게 됩니다. 이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아내 사라가 장사되어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게 되지요. 다음시간부터는 아브라함의 사후에 펼쳐지는 이삭과 그의 후손들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즉 장차 나오게 될 세상 모든 민족과 열방 위에 믿음의 푯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는 창 12:1부터 시작해서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 들으셨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답게 공의에 비추어 볼 때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는 온전한 믿음의 표상을 보여주었지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어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순전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을 들은 여러분도 아브라함의 신앙이 도전되지 않으십니까? 많은 분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기 위해 입술로는 열심히 기도하고 있지만 막상 행함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에게조차도 이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들으신 아브라함의 신앙을 통해 정녕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 그 신뢰가 끝까지 변함없는 신앙으로 나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진 마음을 결코 세상의 그 무엇에게도 빼앗기지 마시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순간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맞는 순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올렸던 고백과 같이 "주여 내가 이 순간을 기쁨과 감사함과 희열이 넘치는 가운데 맞이하여 주님 품에 안기게 하심에 감사하나이다"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2-03-24 오전 3:49:44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