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43)
서 론 /
오늘은 창 23장 전체를 본문으로 하여 아브라함의 지혜와 그의 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해서 단지 믿음만 좋고 순종만 잘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 마음에 악은 모양이라도 없으니 위로부터 오는 선의 지혜가 있었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넓고 큰 마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신약에 기록된 팔복,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장의 말씀들에 비추어 볼 때에 그 어느 것 하나 부족됨이 없는 온전한 모습의 아브라함이었던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악 자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범사에 형통함을 받을 수 있었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도 화평할 수 있었는지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 론 /
1. 겨우 구원받아 낙원에 들어가게 된 사라
1절에 "사라가 일백 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했는데, 175세를 살았던 아브라함에 비하면 사라는 비교적 일찍 삶을 마쳤다고 할 수가 있지요. 사실 인간 경작의 역사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하나의 표본으로 세워질 만큼 온전했던 아브라함의 아내라면 사라 역시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를 못했지요.
창세기 강해를 통해 들으신 대로 사라는 여전히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마음에서 악의 모양을 벗어내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믿음이라기보다는 아브라함 곁에서 늘 보고 들었기 때문에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육적인 믿음에 가까웠지요. 그러니 육적으로 아브라함과 늘 함께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수준에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라가 이렇다 해서 아브라함이 사라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당연히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사라 역시 어떻게든 좋은 천국에 함께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를 못했지요.
바로 2절 말씀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했지요. 아브라함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과의 밝은 교통함을 통해 내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고 지옥은 어떤 곳이며 사람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도 잘 알았지요. 또한 자신의 아내 사라가 천국의 어떤 처소에 들어갈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처럼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통할 수밖에 없었지요. 누구보다도 오랜 세월을 이 땅에서 함께 했고 여러 가지 연단의 세월을 함께 지내야 했으며 육적으로는 사랑하는 아내요, 약속의 씨인 이삭의 어미였기에 아브라함은 이러한 사라가 장차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중에 함께 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그렇지를 못하게 되었으니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통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다면 사라는 죽은 후에 어떤 처소로 간 것일까요? 그 답을 얻기 위해 여기서 잠깐 그 동안 살펴보았던 사라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씨인 이삭에 대한 언약을 주셨을 때에 사라는 그 말을 듣고 믿지 못하여 그만 웃고 말았었지요. 아브라함을 통해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체험했음에도 마음에서 온전히 믿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아멘" 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 여전히 육신의 생각이 동원되며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면 불순종이 나올 수 있는 모습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갈 때도 사라에게 말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말해 주어도 반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사라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육의 방법을 취해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도록 한 것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것이 아니라 사람 편에서 보기에 좋은 방법을 취한 것이었지요.
사라는 아들 이삭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로 보았다기보다는 그저 육의 어미로서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라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 해도 결코 순종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는 결국 사라의 마음에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하갈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면 그 마음에 있는 악의 모양을 발견할 수가 있지요.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마음,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멀리하고 심지어 상대는 어떻게 되든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하려는 마음 등 그 마음에 있는 여러 가지 악의 모양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지 마음에 담아 두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권세와 위치를 가지고 마음에 있는 대로 휘두르는 모습이었지요.
물론 당시는 구약 시대로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에 할례를 할 수 있는 때는 아니었으나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통해 선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수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과 주변 이방 족속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서 비록 나에게 힘이 있고 권세가 있어도 그것을 함부로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낮은 사람이라도 늘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 진리임을 보았지요. 그런데도 사라는 단지 악을 마음에 담아두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고 행하는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2단계에도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지요. 믿음의 2단계에 있는 사람은 비록 아직은 육체의 일을 다 벗지는 못했다 해도 진리가 무엇인지 들어서 알기 때문에 육체의 일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조금씩이나마 변화되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세월이 지나도 변화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악의 모양을 마음에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겉으로도 드러내는 모습이었지요.
더욱이 사라는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훌륭한 신앙의 모델이 바로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나 행함이 변화되지를 못했으니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 과연 믿음의 몇 단계로 보시겠습니까? 눅 12:47-48에 보면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했지요.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사라는 분명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은 경우라 할 수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자임에도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 드릴 것이 없는 사람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당시가 구약 시대라고는 하지만 사라는 상대적으로 너무 좋은 조건 속에서도 여전히 육에 거하며 마음도 행함도 변화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니 이러한 사라가 갈 수 있는 처소가 어디이겠습니까? 겨우 구원은 받았다 해도 낙원 이상의 좋은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2. 낙원에 가게 된 사라로 인해 애통해하는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겨우 구원받아 낙원에 갔다는 사실은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상고해 보면 사라가 왜 낙원밖에 갈 수 없었는지를 잘 알 수 있지요. 심판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아브라함의 아내였다고 해서 더 봐주는 것도 없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아내였음에도 그 정도밖에 되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요. 내세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아브라함이 평소에 얼마나 많은 것으로 사라를 깨우쳐 주었겠습니까? 많은 교훈도 주었을 것이고 이런저런 깨우침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알려주었지요. 그러나 결국 사라 스스로가 그 말씀과 깨우침들을 마음 깊이 받지 못하고 흘려버렸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은 후에까지도 아브라함의 마음을 심히 아프고 애통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이러한 아브라함의 심정을 잘 느껴보게 되지요. 저는 우리 주의 종들이나 일꾼들,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을 대할 때 육의 가족보다도 더 마음이 가게 됩니다. 더욱이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써 오신 분들이라면 늘 감사하는 마음이며 더 살펴보게 되지요. 그렇다면 제가 그처럼 힘쓰고 애써주신 분들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영적인 사랑은 오직 어떻게든 그분들을 꼭 새예루살렘으로 인도해 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들이 영으로 들어오기를 마음에서 더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며 부족한 모습이 있을 때는 더 애타는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하지요.
더욱이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이 보여지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러서는 자칫 낙원에 조차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분들을 위해서는 눈물로 애통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예루살렘에서 꼭 함께해야 할 분들이 그렇지 못한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슬퍼하며 애통하게 되는 것이구요. 그처럼 많은 권능의 역사들을 보고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영의 말씀들을 수없이 듣고 또 들었음에도 오늘 본문의 사라처럼 그 마음과 행함이 변화되지 못하여 구원받는다 해도 겨우 낙원 정도밖에 못가는 분들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죽은 후에 구원받은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경작을 시작하시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죽은 후에 구원받은 영혼이 갈 곳과 구원받지 못할 영혼이 갈 곳을 구분하여 두셨지요. 여러분이 천국과 지옥 설교나 책자를 통해 아시듯이 영의 세계는 너무나 정확하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구원받은 영혼이 육의 몸을 떠나게 되면 두 천사에 이끌리어 윗음부로 가게 되지요. 그곳에서 3일 동안 머물며 영의 세계에 적응하는 기간을 갖는 것이고 장차 가게 될 대기 장소에서의 삶에 대해 교육도 받게 됩니다. 그런 후에 낙원의 가장 자리에 마련된 대기 장소로 옮겨가 거기서 주님의 재림 때까지 지내게 되는 것이지요. 단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사람은 낙원 가장 자리의 대기 장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새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하여 새예루살렘에 가서 장차 자신이 살게 될 집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새예루살렘 안에 마련된 다른 공간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들이 인간 경작이 시작된 후부터 지금까지 똑같았던 것은 아니지요. 즉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지고 이 땅의 삶을 마친 후 윗음부를 관장하게 되기 전과 그 후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시기 전과 그 후 이 각각의 상황이 다른 것입니다.
아담이 이 땅에 내려와 경작을 받게 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죽게 되었고 그렇게 되면 죽은 후에 그 영혼들이 가야할 곳이 있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인간 경작이 시작되면서부터 윗음부와 아랫음부로 나누어져 존재하게 하셨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아랫음부로 구원받은 영혼들은 윗음부로 가게 하셨지요. 그래서 구원받은 영혼들은 윗음부로 인도받아 그곳에서 나름대로의 질서에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이르러 아브라함이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윗음부를 관장하는 사명을 맡은 후부터는 물론 이전과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영혼들이 윗음부로 가게 되지만 이때는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말하게 되었지요. 눅 16:22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드시며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 이전까지는 구원받은 영혼들이 그냥 윗음부로 가게 되었지만 아브라함 이후로는 구원받은 영혼들이 윗음부로 가되 아브라함 품에 안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는 또 상황이 좀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 구원받은 영혼들은 일단 모두가 윗음부에서 아브라함의 주관 아래 대기하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윗음부에 있던 영혼들도 함께 낙원 가장 자리의 대기 장소로 옮기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윗음부가 구원받은 영혼들의 대기 장소가 아니라 낙원 가장 자리의 대기 장소로 가기 전에 잠시 거쳐가는 장소로 개념이 바뀌게 되었지요. 윗음부를 거친 영혼들은 낙원의 대기 장소로 옮겨가 살게 되는데 이때는 더 이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하지 않고 주님 품에 안겼다고 말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하여 이때부터는 모든 구원받은 영혼들이 주님 품에 직접 안기는 것은 아닙니다.
히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을 뵈올 수도 없지요. 그런데 하물며 이런 사람들의 영혼이 어찌 주님 품에 직접 안길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구원받은 영혼들 중에 낙원의 대기 장소에 머물게 될 영혼들은 직접 주님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 품에 안겼다고 표현하는 것은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부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며 모든 구원받은 영혼들이 주님의 주관하심 안에 거하게 된다는 뜻으로서 이처럼 표현하는 것이지요. 다만 이때도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미리 새예루살렘에 가게 되므로 주님 품에 안겼다는 말 그대로 주님을 뵈옵고 안겨 볼 수도 있는 것이구요.
그리고 백보좌 대심판 이후에 각 사람의 영혼은 자신이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번 결정되면 영원히 변함이 없지요. 아브라함은 이러한 영적인 비밀들을 알았기에 더더욱 낙원에 갈 수 밖에 없는 사라의 처지를 생각하며 슬퍼하고 애통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4. 죽은 사라를 위해 매장지를 얻으면서 정도(正道)를 걷는 아브라함
3-4절에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했는데 그동안 창세기 강해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아브라함은 비록 이방 족속들 가운데 살았지만 늘 그들과 화평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는 이방족속들이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육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막강한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변 나라의 왕이라도 아브라함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을 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이처럼 힘과 권세가 있고 주변의 이방 족속들이 자신을 감히 어찌하지 못한다 하여서 그로 인해 마음이 높아지거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결코 아니었지요.
죽은 사라를 위한 매장지를 얻는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이 매사에 얼마나 정확했고 또한 정도(正道)를 걸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장지를 구함에 있어서 당시 머물고 있던 땅의 헷 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 표현하고 있지요. 물론 아브라함은 헷 족속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도 또 얼마든지 자신의 힘이나 권세를 가지고 그들에게 어떠한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는 땅을 지목하여 그곳을 취하고 싶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마음에서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겸손하게 자신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 낮추며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사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이에 헷 족속이 대답하기를 6절에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내 주여"라고 부르고 있으며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택하여 쓰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들이 아브라함을 "주"라 부른다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 아브라함을 어떠한 존재로 보았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설령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이곳을 나에게 달라" 말한다 해도 헷 족속의 입장에서는 기꺼이 들어주어야 할 만큼 당시 아브라함은 대단한 권세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러한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헷 족속이 이처럼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에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탐심이나 교만한 마음이 있었다면 속으로 음, 당연히 그래야지하며 당장 자신이 원하는 곳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지요. 오히려 7-9절에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 몸을 굽히기까지 하는 최대한의 겸손과 예의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도 상대가 그냥 주겠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달라" 한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값을 치르고 사겠다고 말하고 있지요.
이러한 아브라함의 말과 태도에는 결코 교만하지 않은 겸손한 마음과 함께 육의 사람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나오는 선의 지혜가 담겨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지금은 거저 주겠다고 말한다 해도 나중에 상황이 바뀌고 세월이 지나면 그 마음이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이지요. 그러니 아브라함은 중요한 매장지를 얻음에 있어서 훗날 어떠한 분쟁의 소지도 없도록 하기 위해 정확한 준가를 주고 그 땅을 사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헷 족속의 대답을 보면 육의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가 바로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아브라함이 이러한 육의 사람들을 어떻게 품어 일을 이루어 가는지를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남보다 권세와 힘이 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면 쉽게 지시하고 명령하며 자기 뜻대로 일을 이루어 나가려 합니다. 더욱이 마음에 교만이 있는 사람은 상대가 나를 알아주고 높여주면 오히려 기세가 등등하여 더 높아지려 하게 되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권세 정도라면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고 그것도 거저 얻을 수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자기 유익을 구한다거나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 상대를 무시하는 마음 등이 전혀 없었지요. 비록 시간과 비용이 좀 들더라도 정도를 걸었고 상대의 마음을 먼저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 깊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악의 모양은 막상 그 상황이 되어 보아야 알 수 있지요. 남을 섬기는 위치에 있을 때는 겸손한 것 같다가도 자신이 섬김받는 위치에 서게 되면 본성 속에 있는 악의 모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머리된 위치에 있는 분이라면 아직 영으로 변화되지 못한 사람의 마음도 잘 파악하여 범사에 시시비비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섬김은 기쁨으로 받아도 되겠지만 어떤 섬김은 받지 않아야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는 오직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와서 상대의 마음을 분별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경우입니다. 오늘도 들은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을 신속히 영의 마음으로 일구셔서 주님 품에 꼭 안길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35:57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