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40)
서 론 /
창세기 22장에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떠한 믿음으로 순종했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독자까지라도 아낌없이 하나님 앞에 드렸다고 하는 차원 정도가 아니지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그 이상의 차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삭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 때문이지요. 이삭은 하나님께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이루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위한 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약속하셨는데 바로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주신 아들이 이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육으로 생각할 때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게 되면 결국 이삭을 통해 이루시겠다고 하신 언약의 말씀도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변함없이 믿고 기다렸던 25년이라는 세월도 또한 이삭을 낳아 지금까지 길러온 세월도 모두가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구요.
아브라함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전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어떠한 이유나 변명도 핑계도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온전한 순종과 믿음을 확인하시기 위해 그를 친히 부르시고 시험하신 것입니다. 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인지 거기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으셨고 또 이삭을 바치면 어떻게 해 주시겠다는 어떠한 약속도 없이 무조건 이삭을 바치라 하신 것이지요. 바로 이때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진가가 나오게 됩니다.
본 론 /
1.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로 순종한 아브라함
3절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했지요. 어떠한 육신의 생각이나 잠시 동안의 망설임도 없었고 또는 고민할 것도 없이 즉시로 순종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육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맞지 않는 일이라 해도 이처럼 순종의 행함이 나왔던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어드렸기에 조금의 오해함이나 서운함도 없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믿음을 인정해 주시므로 이러한 명령까지도 하실 수 있으셨다는 사실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에게 어떤 사명을 줄 때에 그것이 육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하고 이루어 내기가 어려운 것일수록 사실 그 사명을 받으신 분은 더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믿음이 그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제 편에서 볼 때에 믿음도 부족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이나 목자를 사랑함도 부족한 사람이라면 그런 분에게 어찌 힘들고 어려운 사명을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만큼 믿음도 있고 목자 사랑함도 있는 사람이라야 저분에게는 이것을 맡겨도 능히 믿음과 사랑으로 해낼 수 있겠구나 하고 마음에 주관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일을 지시하고 사명을 줄 때도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여러분에게 육으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이루어 내야 하는 사명이 왔다면 내 믿음과 사랑을 그만큼 인정해 주시는구나 하고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께서 누구한테나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과 같은 시험을 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은 시험을 아무한테나 허락하실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시험이나 연단도 각 사람의 믿음에 따라 허락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명이나 직분도 각 사람의 믿음과 그릇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이러한 시험까지라도 주실 수 있었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어떤 근심이나 고민을 한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이 한번 아브라함의 입장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하나님, 이삭만은 안 됩니다. 다른 것은 무엇이나 드릴 수 있으니 다른 것을 대신 드리면 안 될까요?" 이런 대답을 하실 분은 안 계십니까? 또는 "하나님,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아내도 설득해야 하고 준비도 해야 하니 시간을 좀 더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유를 대실 분은 안 계신지요? 아니면 "하나님, 제가 좀더 기도해 보겠습니다." 한다거나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으니 아예 불순종할 분은 안 계시겠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을 아직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로 순종하기 위해 이처럼 아침 일찍이 일어나 길을 떠났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예전에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셨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만을 듣고 즉시로 순종하여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저도 이런 경우들을 많이 경험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해외성회를 인도하러 갈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해 주시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물론 대부분은 결과가 어떻게 될 것까지 미리 미리 알려 주시지만 어떤 경우는 "네가 가보면 알 것이다" 말씀해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 결과는 항상 대성공이었고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만 중간 과정에 어떤 어려움이 올 것인지는 말씀해 주지 않으실 때도 있는 것이구요. 하지만 저는 어떠한 경우라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라" 말씀하시면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테러의 위협이 있는 곳이든 기독교 집회를 법으로 금지한 곳이든 집회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는 곳이든 상관하지 않고 순종하여 갔던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이나 방법을 동원하여 위험이나 어려움을 피해보려 하지 않았고 집회하기 쉬운 곳만 가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이처럼 사람 편에서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말씀대로만 순종했을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형통하게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중동 출장의 경우는 더더욱 믿음과 순종이 필요하지요. "가서 누구를 만나라"는 말씀도 없고 "만나면 무슨 대화를 하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 편에서의 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필요 없지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일을 담당하는 일꾼에게도 늘 생각이 동원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며 악은 모양이라도 없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자신의 어떠한 생각도 동원하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여 따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당당히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질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2. 만반(萬般)의 준비를 하고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리기 위해 길을 떠나면서 준비를 대충해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명의 사환을 대동하여 번제에 쓸 나무까지 준비하여 떠났지요. 번제에 쓸 나무 하나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현지에 가서 대충 아무 나무나 가지고 준비하려는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온전히 순종할 마음으로 준비했던 것이지요. 적당히 순종하는 척 하다가 상황을 봐서 변개하려 하거나 어떤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정말 번제를 드릴 온전한 마음이었기에 모든 준비를 갖춰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주의 종들이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마치 아브라함이 마지못해 이삭을 바친 것처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사흘 길을 가면서 고민하고 번민하며 괴로워했다고 설명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안을 열어 당시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여주실 때 아브라함은 결코 슬퍼하거나 번민하지 않았습니다. 삼 일 길을 갈 때도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걸음을 재촉했지요. 얼굴에 수심이 차 있던 것도 아니었고 이삭을 보면서 슬퍼하며 눈물을 보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평안한 얼굴로 마음에서는 여전히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함은 어디서부터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히 11:17-19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는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림에 있어서 조금의 주저함이나 서운함 또는 의심이나 변개함이 없었던 것이지요.
여러분은 혹여 나름대로는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은 시험이나 연단이 왔을 때 나에게 왜 이런 시험이 오는 것일까 하며 그로 인해 감사와 기쁨이 떠나지는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이 왔을 때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데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이 왔을까 생각하거나 그로 인해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한 번도 변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며 신실히 믿어드렸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험이 왔을 때에 그 마음이 변개치 아니하고 온전히 마음 중심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그런 분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 주시고 크게 드러내어 쓰실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차피 통과해야 할 시험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이 시험을 기쁨과 감사로 통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시험을 허락하셔서 그가 통과하여 축복받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시험이 왔을 때 힘들어하고 넘어질 사람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축복을 주시기 위한 시험을 허락하실 수조차 없다는 사실입니다.
3. 두 사환을 남겨두고 이삭과 함께 산에 오르는 아브라함
이어지는 4-6절에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다는 것은 그가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에 앞서 조금이나마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결연한 의지와 다짐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한 지혜도 담겨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함께했던 두 사환은 남겨둔 채 이삭만을 데리고 번제드릴 곳으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왜 지혜일까요?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번제드릴 곳까지 두 사환을 함께 데리고 갔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막상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아마 이 두 사환은 주인님이 좀 이상해 지셨나보다 하며 아브라함의 행동을 막으려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주인인 아브라함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의 생각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마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두 사환에게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말해 주어도 두 사환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었을 것이구요. 더군다나 독자 이삭이고 자기들이 사랑하는 주인이요 이것을 잡아다가 번제로 짐승처럼 각을 떠서 드린다고 하는 것이 사환에게는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접근 못하게 막지 않겠습니까? 영적으로 두 사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함에 함께 동참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있어서 육의 사람을 데리고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영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육의 사람은 결코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육의 사람은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하나님의 일도 더 잘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과연 그 안에 영의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하지요.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사람이 많다 하여도 그 안에 육의 사람이 많이 있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은 더 더디게 됩니다.
육의 사람들은 결국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기 때문에 영의 것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 가운데서 육의 방법을 찾기 때문에 영의 방법으로 이루는 데에 방해만 되지요. 온전한 순종도 나오지 않을 것이고 육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말해 주어도 결국에는 자신이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순종할 수 있는 영의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지요.
삿 7장에 보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단지 사람의 수가 많은 것보다 사람의 수는 적다 해도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 수 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을 비롯한 이방 족속의 연합군이 13만5천 명 가량의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왔을 때 이에 맞서기 위해 모집한 이스라엘의 군대는 단 3백 명만을 가려 뽑아내십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3백 명을 이끌고서 적군을 대파시키고 승리를 거두지요.
육의 사람이 볼 때는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고르고 골라 3백 명만을 남기시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주신 전략은 믿음 있는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칼과 창과 활로 단단히 무장해서 적진으로 쳐들어가라 하신 것이 아니었지요. 무기 대신에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춘 채 적진으로 다가가 항아리를 깨뜨리고 나팔을 불며 큰 소리로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목숨을 아까워하고 사람의 생각 가운데 두려워 순종하지 못할 사람은 이 작전에 함께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순종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은 일찌감치 집으로 돌려보낸 후에 어떤 명령에도 담대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모아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었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순종만 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적군은 크게 놀라 자기들끼리 서로 칼로 치며 도망함으로 그 혼란을 틈타서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지요.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는 아무리 일이 급하고 많은 사람이 필요한 일이라 해도 그렇다 해서 아무나 보낼 수 없는 경우가 많지요. 육의 사람이 가서는 도저히 안 되는 일이기에 보낼 만한 영의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보내지 않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본 제단을 통해 세계 선교를 이루고 대성전을 이루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의 원리라는 사실입니다.
왜 이처럼 연단하고 연단하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의 사람들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왜 때를 따라 시험을 허락하셔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셔야만 하겠는지요? 우리에게 주신 이 크고 놀라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바로 알곡이 필요하고 영의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여러분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기 원하시는 것이지요. 영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육신의 생각 가운데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일에 함께 동참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4. "여호와 이레"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
아브라함은 두 사환을 남겨둔 채 이삭과 둘이서만 번제드릴 장소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는 영의 일을 혹여 육의 사람들로 인해 방해받지 않기 위한 것이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룸에 있어서 주변의 상황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변함없는 의지 가운데 순종했던 것이고 결코 중도에 변개하거나 불순종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지켜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의 아름다운 향을 받으시므로 기뻐하셨고 여호와 이레로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8절에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나이까" 하고 묻는 이삭에게 아브라함은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답변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고백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아브라함의 이 고백대로 친히 번제에 쓸 짐승을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다른 것으로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선한 고백을 들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백대로 이루어주셨다는 말이지요.
다음시간에는 아브라함이 끝까지 변함없는 마음으로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과정과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로 축복하신 내용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의 삶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깨우칠 수가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려 버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크고 넓은 마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또한 온전한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은 어떤 것인지 이러한 것들을 하나 하나 깨우칠 수가 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도 이 말씀을 들으면서 모든 것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영의 급속한 흐름을 타고 있는 때이므로 여러분이 결단하고 기도하며 노력해 간다면 이전보다 훨씬 신속하게 영으로 들어올 수가 있는 때이지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정녕 영의 사람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 올라가실 때 누구와 함께 가셨습니까? 마 17:1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하여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올라가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러 가실 때도 막 5:37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하였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영적인 일을 이루실 때에는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가려서 데려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영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영으로 준비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도 때가 급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아 육의 모습들을 호리라도 남김없이 벗고 영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많은 말씀들로 깨우치시며 이끌고 계십니다.
그러나 선택은 바로 여러분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영의 흐름을 탈 것인가 아니면 육의 흐름을 탈 것인가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영이다. 너는 육이다.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택하는 것입니다. 요 3:20-21에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행함을 통해 나는 무엇을 택하고 있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영을 선택하여 날마다 빛으로 더 가까이 나오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당당히 쓰임받을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1:40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