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39)
서 론 /
그랄 왕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고백하는 것처럼, 성경을 상고해 보면 아브라함이나 하나님의 사랑받고 보장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정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열 재앙을 하나씩 행하자 처음에는 애굽의 술객들도 자기들의 술법으로 그것을 흉내 내었지만 세 번째 재앙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애굽의 술객들은 출 8:19에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말씀하고 있지요. 즉 술객들조차도 모세 선지자가 나타내는 권능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또한 출 11:3 후반절에 보면, "그 사람 모세는 애굽국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 하여, 애굽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모세 선지자가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잘 알 수가 있지요.
사무엘 선지자 역시 삼상 3:19-20에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삼상 18:28 전반절에,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다" 하여 다윗의 대적 사울조차도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인정할 정도였지요.
또한 여호수아는 수 3:7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말씀하시고, 수 4:14에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의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같이 하였더라" 말씀합니다.
요셉의 경우도 창 39:3에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했고, 23절에는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했지요.
이는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 2:43에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하여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나타내시는 권능의 역사들 앞에서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것을 알 수가 있지요. 나타나는 증거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경우는 행 5:15에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랬다고 말씀할 정도로 사람들 앞에 대단한 존재였지요. 또한 사도 바울 역시 행 14:11에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들이 분명히 나타나므로 사람들이 그 권세 앞에서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히 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요 14:21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도 반드시 함께하시는 증거들로 나타내 주십니다.
본 론 /
1. 아비멜렉과 아브라함과의 언약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비멜렉의 경우도 아브라함을 통해 자신의 집에 닫혔던 태의 문이 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범사에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들을 보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이처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아비멜렉은 한 나라의 왕이면서도 아브라함이 자신을 책망할 때, 그 권세 앞에서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권세가 있다 하여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높아지려하거나 상대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할 때도 만약 아비멜렉이 생각하기에 아브라함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긴다고 느꼈다면 둘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권세를 앞세워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이 아니었기에 책망할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책망하였지만, 늘 덕과 사랑으로 상대를 품고 그 마음을 풀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26절에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하며 자신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호소하자, 더 이상 책임을 추궁하거나 몰아붙인 것이 아니지요. 아브라함 편에서 먼저 둘 사이에 화평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편에서는 아비멜렉에게 면박을 주려하거나 어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아비멜렉에게 깨우침을 준 후에는 이내 먼저 화평을 좇는 길로 행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후에라도 이 우물로 인해 다시금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줌으로써 둘 사이에 언약의 증거를 삼았던 것이구요. 책망을 하면서도 결국은 화평을 좇고, 화평을 좇으면서도 서로 간에 확실히 할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히 선을 긋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 지혜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상대의 잘못만을 지적하다가 그로인해 서로 간에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화평을 좇는다고 하면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않은 일이 오히려 나중에 자신에게 올무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뱀 같이 지혜로우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 5:39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이 상대가 나에게 뻔히 해를 가할 것을 알고 분명히 속이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그렇게 해 주라는 뜻이 아니지요. 이는 곧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뜻이며, 악으로 나오는 상대까지도 감동시킬 만한 깊은 선(善)의 차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원수까지라도 품고 변화시킬 수 있는 온전한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선과 사랑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으되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에 대해서는 바르게 분별하여 영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 또한 잘 분별하여서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이처럼 늘 상대를 품고 화평을 좇기 원하는 마음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잘 알기 까닭에 3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여 아비멜렉과의 사이에 분명한 증거로서 일을 마무리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수로서 이는 아브라함의 행함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것임을 의미하지요. 또한 암양 새끼는 생산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물이 있어야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산을 의미하는 암양새끼를 통해 생산의 원천인 물에 대한 소유가 아브라함 자신에게 있음을 확실히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여 아비멜렉과 서로 맹세한 후에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도 증거를 삼았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도 브엘세바에 대한 증거를 삼은 아브라함
33절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했습니다. 사람과의 사이에 육의 언약으로 마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으려 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형통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킴받고 인도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예전에도 아브라함은 늘 가는 곳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먼저 단을 쌓으므로 하나님 앞에 보장받고 인도받았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뢰하며 순종하는 사람의 모습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 성도님들이라면 집을 새로 이사하거나 새로운 사업터를 시작하게 될 때, 사람 사이에 해야 할 일만 하고 마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사를 한다고 할 때, 전에 살던 사람과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짐을 옮겨와서 정리를 마치고 나면 그것으로 이제 이 집은 내가 권리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집이다 하는 것이 아니지요. 육적으로는 그렇다 할지라도 영적으로도 역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집을 허락해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운데 장막이나 사업터가 지킴받으며 범사에 형통하게 인도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에라도 모든 일에 진리 안에서 정도를 좇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구요.
이처럼 아브라함은 사람 사이에 할 일을 한 후에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인정받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겼던 것이며, 그것을 통해 범사에 보장받고 인도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34절에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말씀한 대로, 여러 날을 이방인의 땅에 거하면서도 온전히 지킴받으며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보장받는 관계가 되어진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보장하심 속에서 지킴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시 3:5-6에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하는 고백이 중심에서 담대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경우
2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그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셨을 때, 과연 아브라함이 어떠한 믿음과 순종을 내보였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였지요.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친히 부르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약 1:13-14에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말씀하셨지요. 즉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시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는 왜 하나님께서 시험을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시험한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시는 시험은 사람이 그 안에 악의 모양이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 사단의 송사를 받음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험을 말하지요. 바로 욥과 같은 경우입니다. 겉으로는 순전하고 완전해 보여도 그 마음 안에는 아직 악의 모양이 남아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뽑아 버리게 하시기 위해 사단의 송사를 받아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욥이 어떤 악을 행하거나 죄를 지어서 그에 대한 보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시험을 잘 통과하면 결국 축복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그래서 연단이 곧 축복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악을 행하거나 죄를 지어서 그에 대해 사단의 송사를 받는 경우는, 축복을 위한 연단이 아니라 죄의 값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것이지요. 이는 어떤 시험이나 환난, 재앙을 맞는 경우로서 이런 경우는 시험을 치렀다 해서 이후에 어떤 축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원수 마귀 사단의 송사를 받아 공의 가운데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경우도 두 가지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첫째는 마음 안에 있는 악의 모양을 발견하여 그것을 뽑아내 버림으로 이후에 축복을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단의 송사를 받아주심으로 시험을 허락하시는 경우라 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사단의 시험을 통해 결국에는 자신의 악을 철저히 깨달음으로 통회자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악을 벗어 버렸을 때 이전보다 더한 축복이 오게 된 것이지요.
둘째로는 공의의 법칙에 따라 죄의 결과에 대한 보응으로서 사단의 송사를 받아주심으로 시험이나 환난을 허락하시는 경우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짓는 사람에게 질병이 찾아오거나 가정, 사업터, 일터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들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경우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직접 시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손에 맡겨 시험을 허락하시는 경우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는 아브라함에게 어떤 악의 모양이 있어서 그것을 뽑아내게 하시기 위해 시험을 주시는 경우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어떤 죄가 있어서 보응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아닙니다. 이미 지금까지의 연단 과정을 통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육신의 생각이 철저히 깨어진 아브라함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제 마지막으로 친히 아브라함을 시험하셔서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서 세움 받기에 완전한 사람임을 증명하시기 위함이었지요.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감동의 향을 흠향하시면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온전히 축복을 주시기 위한 축복의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시험은 사단의 손에 맡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 안에 어떤 악의 모양이 있어야 그것을 끄집어내어 시험을 줄 수 있는 것인데, 아브라함에게는 그러할 만한 악의 모양이 없으니 사단에게 내어 주어도 시험할 수가 없지요. 예를 들어, 만약 사단이 아브라함에게 아무리 혹독한 재앙을 가져다 준다 해도 아브라함이 욥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 마음에서 감사와 기쁨이 떠나겠습니까? 설령 그 자리에서 목숨을 내 놓으라 해도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아브라함이지요. 그러니 사단이 어떤 시험을 하려 해도 사단의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4. 아브라함을 친히 시험하신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친히 시험하신 것이며 이 시험 또한 축복에 축복을 더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시험을 주셨을 때, 그가 어떻게 통과할 것을 너무나 잘 아셨지만, 그럼에도 이처럼 시험의 과정을 거치게 하심으로 원수 마귀 사단도 그것을 지켜보면서 아무런 이의(異議)도 달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98, 99년도에 저에게 있었던 연단이 바로 이러한 경우였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연단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것이 축복의 연단임을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연단을 겪음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저를 결코 사단의 손에 내어 주신 것이 아니었지요. 하나님께서 친히 시험하신 경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시험하신 것은 저에게 어떤 허물이 있어서도 아니고, 제 안에 어떤 악의 모양이 있어서도 아니었지요. 저를 시험하신 목적은 제 안에 임해있는 사랑이 어떠한 차원이라는 것을 드러내심으로 이후로는 원수 마귀 사단이 전혀 송사하지 못하는 가운데 창조의 최상의 권능의 차원으로 이끄시기 위한 것이었고 그 시험을 통해 제 안에 임해있는 사랑의 차원을 원수 마귀 사단도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창조의 최상의 권능을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속한 근본의 소리를 발하도록 하셔도 원수 마귀 사단이 결코 송사할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손에 친히 붙들리어 시험을 받은 것이었지만, 우리 성도님들은 원수 마귀 사단의 손에 내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시험케 하신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 시험을 통해 여러분 안에 있는 갖가지 악의 모양들을 드러나게 하신 것이었고, 바로 얼마 전에 그 모든 것을 계수하심으로 여러분이 자신의 악을 깨닫고 회개하였을 때, 대사면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98, 99년도의 연단이 저에게 가져다 주는 영적인 의미와 여러분에게 가져다 주는 영적인 의미가 다른 것이지요. 결과적으로는 여러분도 그 연단을 통해 이제는 자신의 악을 깨닫고 그것을 뽑아낼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연단이 여러분에게도 축복이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영혼이 잘되는 영적인 축복을 받은 것은 이후로는 여러분에게 육적인 축복도 함께 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러한 모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사망으로 가는 영혼들을 보면서 마음에 애통하며 고통을 받았지만, 마음 중심에서는 늘 기쁨과 감사로 연단을 값지게 받아나갔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2절부터는 과연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지기에 충분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진가(眞價)가 드러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설명이나 이유도 없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번제로 드려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렇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명령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순종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축복을 받아도 하나님 안에서 받아야 축복이고 연단을 받아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육적으로는 아무리 축복을 받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언제 순간에라도 사라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사이에 해야 할 것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그것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고 보장받을 수 있어야 모든 것이 온전한 축복으로 올 수가 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람과의 사이의 관계를 우선시 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 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고 사람과의 사이의 관계에서도 부족됨이 없게 해 주셨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높여 주셨고 주변의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게 해 주시니 오히려 왕이라 해도 그 앞에서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도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해졌을 때, 여러분이 있는 곳곳에서 인정받으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할 마음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연단하시며 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물론 아직 악의 모양을 다 버리기까지는 그것으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의 송사를 받을 수는 있지만 여러분이 죄를 지어 그것으로 인해 보응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고전 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처럼 믿음의 분량에 맞는 시험만을 허락하시며, 그 시험을 통해 더 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손 안에서 연단을 받는 것은 영혼이 잘되어지는 축복의 길이며 결국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축복도 함께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창세기 강해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의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깨달아 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보장하시는 증거가 여러분의 삶속에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1:44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