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36)
서 론 /
지난 시간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변 이방 족속들에게 아브라함의 존재를 드러내시고 그의 존재를 확실히 심는 계기로 삼으셨던 사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겼던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서 육으로 생각하면 이 사건이 하나의 불미스러운 일로 보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축복이었지요. 이 사건을 계기로 아브라함은 주변 이방인들에까지 하나님의 사랑받고 보장받는 선지자로서 확실히 심어지게 됨으로 그들로 하여금 아브라함을 감히 어찌하지 못할 두려운 존재로 여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 21:22에 보면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의 존재가 주변의 이방 족속들 가운데도 심어졌기에 아브라함은 그들의 세력 속에서도 자신의 삶의 터전을 일구며 장차 형성될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기초를 닦아 나갈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주변의 이방 세력들이 아브라함을 단순한 족장 정도로 여겼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세력 아래로 넣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변 이방족속들 사이에서도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러한 주변의 위협들로부터 지킴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 스스로도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지킬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보장하시는 증거가 따랐기에 주변에서 감히 넘보려하지를 못했다는 것이지요.
시 127:1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함께해 주셔야 온전히 지킴받고 보장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러한 증거가 따랐으므로 아내 사라를 빼앗기는 사건이 예전처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된 사건이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전에 아내를 빼앗겼을 때도 결과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지만 이번에 아내를 빼앗기는 사건은 그 이상의 축복과 열매로 나와졌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드디어 약속의 씨인 이삭이 태어나는 내용입니다.
본 론 /
1. 하나님의 정하신 때와 기한에 태어난 이삭
1-2절에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신 것이 아브라함 때문임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하시겠다 말씀하셨을 때 이를 듣고 있던 사라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하여 그만 웃고 말았던 것을 보게 되지요. 그러니 이러한 사라의 믿음으로는 약속의 씨인 이삭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히 믿는 아브라함을 보시고 마침내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하신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머리된 사람의 믿음과 행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은 결국 아브라함의 씨로 허락된 것이기에 비록 사라의 믿음이 부족하다해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아랫사람들의 믿음은 부족한 경우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머리된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는 경우들이 많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머리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받고 믿음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육적인 조건이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우선으로 하여 세워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약속된 씨인 이삭을 허락하셨는데 그것이 정확한 기한에 이르러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아브라함에게 좀 더 일찍 이삭을 주셨어도 되지 않았을까? 할 수도 있지만 전 3:1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일에는 정한 기한이 있고 그것을 이룰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하시는 분은 오직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니 기한과 때를 하나님께서 일단 정해 놓으시면 사람이 서두른다고 앞당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편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고 변함없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바라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를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없이 믿었기에 세월이 지나도 그 믿음이 변함없었던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기한이 차매 눈에 보여지는 열매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 결코 사람 편에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려 해서는 안되지요.
그런데 이삭을 얻게 된 아브라함에 대해 "늙은 아브라함"이라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굳이 늙은 아브라함이라 표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육으로 보면 이미 나이 들고 늙어 도저히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대로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으로는 도저히 바랄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을 바라고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지요. 아브라함은 이러한 믿음을 가졌기에 롬 4:18 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느 정도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비교해 보면 스스로 답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현실에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부정적인 입술의 고백과 불평이 나오지는 않는지? 또는 나는 안 되겠다하며 포기하지는 않는지?, 입술로는 "믿습니다"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사람의 방법과 생각을 동원하지는 않는지요? 혹여 이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아브라함
이어지는 3-4절에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말씀합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낳기 전에 주신 이름이지요. 창 17:19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잊지 않고 그것을 마음에 명심하여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을 낳은 지 팔 일만에 할례한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창 17:12에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할례를 행한 것이었습니다.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속한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셨을 때도 아브라함은 말씀을 받은 그 당일에 할례를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생각 동원하지 않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 나가는 아브라함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절에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하여 아들 이삭을 낳은 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정확한 때를 맞추어 역사되었음을 다시 한 번 말씀하고 계시지요.
3. 회개의 마음과 함께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웃고 있는 사라
6절에서는 육과 영의 극명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했는데 사라는 전에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지 못하여 웃고 말았습니다. "어찌 90세나 된 사라와 100세나 된 아브라함에게서 자식이 태어날 수 있을까" 하고 사라 자신이 믿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서도 육의 사람은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웃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 이삭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웃게 되는데 이때 웃는 것은 기쁨의 웃음이었지요. 그동안 믿지 못하고 바라지 못하던 일을 경험하게 되니 어찌 감사와 기쁨이 밀려오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온전히 믿지 못했던 것이 회개되어지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인해 사라는 기쁨의 웃음을 웃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여 기쁘고 충만해진다 해서 그의 속 중심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지요. 장차 예전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니 그 안에 있던 악의 모양이 다시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 시간에 설명이 될 것입니다. 받은 바 은혜와 충만함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할례하여 변화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순간의 기쁨과 충만함으로 끝나고 마니 결국 마음의 할례도 이루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 여전히 예전 모습이 또 나오고 마는 것이지요.
그런데 육에 거하는 사람들은 친히 보고 듣고 체험한다 해도 이러한 잠시 동안의 기쁨과 충만함이 없습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이 친히 보고 체험한 후에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한 대로 안 믿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 주어도 여전히 믿지 못하여 웃고 마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할 것은 사라가 웃은 것이 한편으로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나이 많이 들고 늙은 몸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기가 부끄러운 것이지요. 오늘날도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셨는데도 부끄럽다고 하여 간증하지 않으려는 분들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간증이라는 것은 나를 치료해주시고 응답해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의 고백인 것이며 치료와 응답의 확신에 대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7절에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말씀하신 것도 육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해 주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사라가 그 나이에 아이를 낳아 젖먹이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사라가 아이를 낳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결 론 /
하나님께서 약속의 씨인 이삭을 허락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똑 같은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받았지만 반면에 사라는 믿지 못하였는데 그 차이는 그 후에도 드러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받지 못했던 사라는 아들 이삭 하나를 낳는 것으로 마치지만 아브라함은 그 후로도 여섯 명의 자녀를 더 낳았지요.
롬 4:19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말씀한 대로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었을 즈음에 이미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았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고도 75세를 더 향수하며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그의 몸이 일시적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회춘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 잘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이며 아브라함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가졌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의 주변에는 많은 이방 족속들이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과 교류해야 하는 일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은 주변의 환경과 조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지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소돔 성의 사람들 속에 살아가면서 신앙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과 달리 아브라함은 비록 소돔 성 같은 곳에 살지는 않았다 해도 이방인들 속에서 믿음을 굳건히 지키며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을 나타내며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비록 세상 가운데서 세상 사람들과 접하며 산다 해도 세상에 물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빛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결국 얼마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과 곧은 중심을 가졌고 빛 가운데 살아가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브라함처럼 정녕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1:57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