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31)
서 론 / 성령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기록한 이유
우리가 성경을 통해 인간 경작의 역사를 나누어 보면 크게 셋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사역하시던 시대, 두 번째는 주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역했던 시대, 세 번째는 성령님께서 사역하시는 시대입니다.
간단히 구약 시대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사역하시던 시대라 말하는데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시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친히 음성이나 이상과 환상으로 역사하시기도 하고 부리시는 천사를 사자로 보내어 역사하시기도 했지요. 물론 지금도 인간 경작의 모든 역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관해 가시는데 다만 구약 시대에는 친히 아버지 하나님께서 전면에 나서서 사역하시던 때라는 말입니다.
이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잠시 동안의 사역이 있으신 후에 다시 사역의 배턴을 성령님에게 넘기심으로 장차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는 날까지 성령님께서 사역하시는 시대가 펼쳐지지요.
그렇다 하여 구약 시대에는 아버지 하나님 홀로만 사역하셨고 주님과 성령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령 시대라 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서는 가만히 바라만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지요. 삼위일체 하나님은 늘 함께 사역하시기 때문에 구약 시대라 해도 주님과 성령님께서 때를 좇아 아버지 하나님의 사역을 도우셨고 지금 성령 시대에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서 활발히 사역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단 각 시대마다 주체가 되는 분이 계셔서 그 시대에는 주로 그분의 이름으로 사역이 이루어지지요.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는 주님과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라 해도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시는 경우가 많으며 성령 시대에 이르러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의 사역 역시 성령의 이름으로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의 주체는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과 성령님의 사역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하나님을 대신하는 역할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배운대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러 오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셨는데도 성경에는 그분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표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오신 것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아버지 하나님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오신 것이었기에 여호와 하나님이라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큰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떤 일을 보러 가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계약을 하고 도장을 찍었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고 권한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왜 성경에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성령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 했는지 이해가 되셨을 것입니다.
본 론 /
1. 육의 공간의 법칙에 따라 소돔에 도착한 두 천사
창 18:22에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하여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사람의 형상으로 이 땅에 내려온 두 사람 즉 루시엘과 루시야 천사장은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소돔을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창 19:1에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말씀한 대로 정오 즈음에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 음식을 대접받고 잠시 대화한 후 소돔을 향하여 떠났던 두 천사장이 날이 저물 때가 되어서야 소돔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의 면적이 우리나라의 강원도보다 조금 크고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마므레 근처와 소돔과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지요. 만약 천사들이 이 거리를 영의 공간을 타고 간다든지 아니면 육의 법칙을 뛰어넘는 능력으로 갔다면 이처럼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8:30-40을 보면 행 8:38-40에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하여 주의 영에 의해 이끌려간 빌립이 다른 장소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바로 영의 공간 속에서 영의 흐름을 타고 순식간에 이동을 했던 것입니다.
두 천사장도 얼마든지 이렇게 할 수 있음에도 날이 저물 때가 되어서야 소돔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들이 영의 공간을 타거나 육을 초월하는 능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육의 법칙을 따랐음을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해 육의 몸을 입은 사람이 걷듯이 그들도 동일하게 걸어서 갔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두 천사장이 제한된 육의 공간을 입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바로 사람과 동일한 조건 속에서 모든 것을 살피기 위함이었지요. 그냥 휙 날아가서 소돔성만을 살피고 불의 심판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동일하게 걷고 느끼면서 소돔 주변의 정황들까지도 세세하게 살폈던 것입니다.
2. 소돔의 삶에 지치고 공허했던 롯
마침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이 소돔에 도착한 두 천사장을 보고 즉시로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롯이 어떻게 해서 이처럼 극진히 영접하고 절했는지는 전에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 자신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자신을 구하러 온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멜기세덱을 만날 수 있었던 롯은 당시에 영안이 열려 멜기세덱과 함께하고 있던 천사장들을 보았는데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롯 앞에 나타난 천사들이었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앞으로의 모든 것을 아시기에 미리 롯으로 하여금 두 천사장을 볼 수 있도록 그의 영안을 열어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롯이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롯이 소돔의 삶에 얼마나 지쳐 있었고 그의 마음이 공허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벧후 2:6-8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삼촌 아브라함 곁에서 진리를 보고 듣고 배웠던 롯이었기에 비록 눈의 보기에 좋은 것을 택하여 소돔을 그의 삶의 터전으로 삼기는 했으나 그 속에서 행해지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합당치 못한 것인지를 마음에 느끼며 고통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소돔 성이 당시에 얼마나 죄악으로 관영했겠으며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롯의 마음 또한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그러니 소돔에서의 삶에 지침과 함께 롯의 마음에는 공허함이 찾아왔던 것이지요. 전에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살 때의 삶과 지금 자신의 삶을 비교해 보게 되고 그러면서 지금 너무나 가치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이 밀려왔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두 천사가 그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는 롯에게 찾아온 귀한 은혜의 기회였지요.
영적으로 심령이 너무나 가난해져 있던 롯이었기에 두 사람이 어떤 분들임을 아는 롯은 결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두 천사장이 어떤 목적에서 지금 소돔 성을 찾아왔는지는 모른다 해도 롯은 이때야말로 잃었던 은혜를 찾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기에 결코 두 사람을 그냥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이것이 결국은 롯에게 구원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3.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롯
그래서 롯은 두 천사장에게 간청하여 자신의 집으로 모시게 되지요. 2-3절에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했습니다. 바로 롯의 섬김의 행함이 있었기에 이것이 롯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롯이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으나 롯이 이처럼 하나님의 사자를 극진히 영접하고 은혜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공의가 조금도 어그러지지 않는 상황에서 구원의 길이 열릴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는 마치 제가 환자분들에게 기도를 해 줄 때 저의 권능이 아무리 크다 해도 기도받는 분 편에서 조금의 믿음은 내보여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무런 믿음과 정성도 없이 어떤 요행이나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제 앞에 나와 기도받으려 한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역사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롯 역시 그가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은 삼촌 아브라함의 은혜가 너무 컸지만 구원은 결국 개인의 신앙과 관련된 것이기에 롯 스스로도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그의 신앙을 내보여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롯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찾아온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았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주의 종을 보면 어떻게든 섬기기 원하고 은혜받기를 원했으며 은혜의 자리가 있으면 어떻게든 찾아가 은혜받으려는 모습이던 분이 은혜가 떨어지면 이제는 은혜의 자리가 있어도 피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오히려 은혜가 떨어지고 충만함이 떨어졌을 때에 더더욱 은혜를 사모해야 할 것이고 충만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겠지요. 은혜의 자리가 있으면 더 찾아가야 하고 은혜의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롯은 두 천사를 보았을 때 그들을 간청하여 집으로 모셔 섬길 만한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였기에 은혜의 기회를 잡을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마음에 품는 것 위에 이러한 롯의 믿음의 행함이 더해졌기에 불의 심판 속에서도 구원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4. 소돔 사람들의 패역성(悖逆性)
이처럼 롯이 두 천사장을 섬기고 있을 때 당시 소돔이 얼마나 패역해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4-5절에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말씀하고 있지요. 여기서 소돔 사람들이 두 사람에 대해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하는 것은 그들의 성적(性的)인 부패를 잘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롯의 집에 들어간 두 사람은 루시엘과 루시야 천사장입니다. 이 두 천사장은 하늘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는 위치에 있는 분들로서 그 용모의 아름다움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지요. 사람들이 보통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보게 되면 "저 사람은 마치 천사 같다." 말하기도 하는데 지금 이 두 사람은 보통 천사가 아니라 천사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천사장이니 이 땅의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지요.
이처럼 두 천사장이 사람의 형상을 입었다 해도 외모의 아름다움은 이 땅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분되었지요. 그런데 당시 소돔에는 성적 타락이 매우 심했습니다. 유 1:7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때 폼페이라는 곳을 가 보신 분들은 아시지만 그곳의 성적 타락은 오늘날과 비교해 봐도 그 정도가 매우 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돔도 바로 그러한 상황에 있었고 그런 중에 소돔 사람들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너무나 아름다운 두 사람을 보게 되니 소돔의 사람들이 요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롯의 집을 에워싸고는 두 사람을 내놓으라는 것이지요. 정욕에 눈이 어두워 앞뒤 어떤 상황도 살피지 않은 채 오로지 두 사람을 내놓으라 위협했던 것입니다.
이때 롯은 어떻게 했습니까? 6-7절에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했지요. 흥분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 이처럼 나선다는 것은 사실 생명의 위협까지도 감수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자신의 집에 모신 두 분이 어떤 분들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롯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 분을 지키려했던 것이지요.
5. 두 천사장을 지키기 위해 두 딸을 내놓고자 하는 롯
그러나 상황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롯은 그들에게 너무나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8절에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했던 것입니다. 아직 시집가지 않은 두 딸을 대신 내어주어서라도 자신의 집에 모신 두 분을 지키려 했지요.
이런 롯의 모습을 보고 혹자는 딸들을 내어주면 어떻게 될지를 뻔히 알면서 어떻게 딸들을 내어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또 딸들에게도 자신들의 의지가 있는데 어찌 아버지라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바로 딸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입다의 경우이지요. 그러나 입다의 경우와 지금 롯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입다의 경우는 그 마음이 선한 데서 그와 같은 서원을 했던 것이 아니지요. 삿 11:8에 보면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게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여 입다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들이 입다에게 조건을 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머리가 되게 해준다는 것이지요.
이에 입다가 대답하기를 9절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하여 자신을 정말 머리로 세워 줄 것인지를 묻습니다. 그 마음이 순수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지요. 이런 마음이었기에 어떻게든 전쟁에 이기려 했던 입다는 막상 전쟁에 임하면서 경솔한 서원을 하게 됩니다.
삿 11:30-31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니까 "평안히 돌아올 때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의 이러한 서원에는 다분히 계산적인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주인이 밖에서 돌아오게 되면 누가 가장 먼저 나와서 맞이합니까? 바로 종이지요. 입다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자신을 가장 먼저 나와 맞을 사람은 종들 중에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처럼 사람의 생명이 달린 서원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입다가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무남독녀 외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었기에 입다는 결국 자신의 서원을 지켰지만 이것이 결코 선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지요.
그러나 롯의 경우는 전혀 상황이 다릅니다. 롯은 딸들을 내어주는 대신 자신의 어떤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오직 하나님께 속한 분들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딸들의 의사를 전혀 무시한 채 자기 마음대로 하려 했던 것도 아니었지요. 딸들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충분히 아버지의 뜻 가운데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었기에 롯은 이런 결정을 해서라도 귀한 두 분을 지키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선한 마음 가운데 나온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요. 두 딸들도 무사히 지킴을 받고 마침내 패역한 무리로부터 건짐을 받게 됩니다.
두 천사장이 지금까지는 소돔 사람들의 패역함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의 형상을 입은 채 육의 사람들처럼 육의 법칙대로 행동했지만 이제는 소돔 사람들의 패역함을 분명히 확인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고 육의 법칙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게 되니 순간 능력을 행하여 문밖에서 소동하는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롯과 그에게 속한 가족들을 데리고 소돔 성을 빠져나가게 되지요. 그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두 천사장이 소돔성에 이르렀을 때 롯이 성문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설령 앉아 있었다 해도 두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처럼 그들 앞에 나가서 극진히 대접하여 자신의 집으로 모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한 집으로 모셨다 해도 소돔의 백성들이 몰려와서 위협하며 두 사람을 내놓으라 했을 때에 만약 두 사람을 그들에게 내놓았다면 어떻게 되었겠구요? 그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긋났다면 롯이 구원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로 은혜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곳에 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롯이 마음의 공허함을 달랠 곳이 없어 성문에 앉아 있었던 것이지만 그곳이 바로 은혜의 기회를 만날 수 있는 축복의 장소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있어야 할 은혜의 자리에 항상 계십니까?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시는지요?
두 번째로 롯은 은혜의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잡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끝까지 기회를 주기 원하십니다. 그 기회의 때가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여러분이 사모함으로 믿음을 내보인다면 기회가 왔을 때 반드시 그 은혜의 기회를 잡을 수가 있지요. 단지 예배나 기도 시간에 앉아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은혜와 축복의 기회를 내가 꼭 놓치지 않고 잡아야겠다는 마음과 그에 따르는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롯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설령 생명의 위협이 온다 해도 자신의 가장 귀한 두 딸들을 희생하면서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도리를 지켰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때 먼저 시험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과연 끝까지 믿음을 내보일 수 있는가? 그 믿음이 변함없는 영적인 믿음인가를 보시지요. 그래서 그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반드시 축복이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올 수가 있는데 이 시간에 다 일일이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여러분은 항상 깨어 있어서 어떤 시험이 온다 해도 통과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다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롯을 멸망하는 소돔성에서 구원하심같이 여러분의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서 여러분을 건지시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친히 체험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부흥성회를 통해서도 너무나 많은 분들이 치료받고 문제 해결받으셨는데 혹여 아직까지 응답받지 못하신 분들이 있다면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응답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2:15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