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29)
서론 /
본문 창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다시 한 번 여호와 하나님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정 즈음에 장막 문에 앉았던 아브라함은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선 것을 보게 되지요. 그런데 이들을 본 아브라함은 즉시 달려 나가 그들을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말합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아브라함이 지금 세 사람에게 하는 말을 보면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겸비하고 극진한 섬김의 자세가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에는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묵을 만한 여관같은 곳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인구가 많지 않아서 인가(人家)도 드물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자신의 집 근처를 지나는 여행자들을 보면 자기 집으로 들여 접대하는 것이 풍습이었지요. 따라서 아브라함처럼 선하고 베풀기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나가는 여행객을 보고 자신의 집으로 청하여 대접하는 것이 당연한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이 지금 보통 여행자들을 접대하는 수준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지요. 아내 사라에게 직접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였고 자신이 직접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왔던 것입니다. 또한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진설하였지요.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버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하여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아브라함 자신이 직접 곁에 모셔 서서 서빙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매우 부유하고 힘으로도 연합군과 싸워서 승리할 만큼 세력이 있는 큰 족장이었습니다. 창 14:23에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 왕을 대할 때도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하며 왕을 대하면서도 매우 당당하고 위엄있는 태도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또한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랑받고 신뢰받으며 보장받는 참으로 존귀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보고 이처럼 황급히 달려가서 땅에 굽혀 절하며, 그들을 집으로 청하여 자신이 직접 곁에서 음식까지 대접하였던 것이지요. 더구나 그들을 "내 주"라고 부르며 아브라함 자신을 그들의 종이라 낮추고 있습니다. 또한 이 세 사람이 아브라함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도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9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하여 마치 아랫사람에게 하듯 묻고 있습니다. 또 평소에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과연 아브라함이 이처럼 섬길 만큼 대단한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본론 /
1.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신 성령 하나님
창 18:13에 보면 이 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세 사람과 대화하는 내용인데 갑자기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하여 아브라함에게 말씀하고 있는 분이 여호와임을 알 수가 있지요. 세 사람 중에 한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과 친히 동행할 수 있었던 나머지 두 분은 누구였을까요?
창 18:22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남으셔서 아브라함과 대화를 계속하시는데 그 사람들 곧 나머지 두 사람은 소돔을 향하여 갔다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창 19:1에 보면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했던 두 사람이 천사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고 롯은 전에도 만났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은 그들을 알아보았지요. 그래서 땅에 엎드리어 절하면서까지 그들을 극진히 영접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천사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동하여 이 땅에 내려오실 만한 위치에 있는 천사라면 보통 천사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이 둘은 바로 루시엘과 루시야 천사장입니다. 따라서 이 날에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세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님을 모시는 두 천사장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것이었고 아브라함은 이분들이 누구시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보았기 때문에 이처럼 극진히 처음부터 영접하였던 것이구요. 물론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이 두 천사장을 단 번에 알아보았구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이처럼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과 두 분의 천사장을 알아 볼 수가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전에 아브람이 전쟁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해오다가 멜기세덱을 만났던 바로 그 사건으로부터 찾을 수가 있습니다. 전에 창세기 14장에서 설명했듯이 멜기세덱의 형상으로 아브람 앞에 나타나 그를 만나주셨던 분은 성령 하나님이셨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 앞에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도 바로 성령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전에 멜기세덱이라는 형상으로 나타나셨던 성령 하나님을 이미 뵈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다시금 성령 하나님을 뵙게 되었을 때 곧바로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전에 멜기세덱의 형상으로 나타나셨을 때와 지금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셨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자세히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전에 성령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천사 즉 루시엘과 루시야 천사장이 함께 했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성령 하나님은 물론이고 함께한 두 천사장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또한 롯 역시 두 천사장을 알아보았는데 이는 앞으로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멜기세덱과 만나고 있을 때 롯에게도 잠시 영안을 열어 그 상황을 보게 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때 롯도 멜기세덱과 함께 하신 두 천사장을 보았기 때문에 창 19:1에서 소돔에 찾아 온 두 천사장을 보고 바로 알아보았던 것이구요.
2. "사람 셋을 보았다"라고 기록한 이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성경에는 이 땅에 내려오신 성령 하나님과 두 천사장에 대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보았다" 하지 않고 "사람 셋을 보았다"고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실 때에 어떤 방법과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지요. 꿈이나 이상 중에 만나주시기도 하고 환상이나 음성으로 만나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형상으로 오셔서 만나시기도 했구요. 그런데 지금까지의 모든 경우는 육의 세계에 있는 아브라함 앞에 영의 공간을 열어 보여주시므로 영의 공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영으로 만나고 느끼게 해주신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영안이 열리고 영적 귀가 열려야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지요.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곁에 함께 있다 해도 영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지 않았다 해서 전혀 영적인 상황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요. 영적인 기운과 함께 영감으로 느낄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두 천사장과 함께 나타나신 경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이때는 단지 육의 공간 안에 영의 공간을 열어서 그 안에 계신 모습을 보여 주신 차원이 아니라 직접 육의 공간으로 나오신 경우이지요. 제한적이나마 육의 공간을 입고 육의 공간으로 나오셨다는 말입니다. 마치 이전에는 텔레비전 속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을 뵈었던 것이라면 이번에는 직접 텔레비전 밖으로 나오신 하나님의 형상을 뵈온 것과 같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제한적인 육의 공간을 입어 나오시게 되면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모습이 보일 수 있는데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보여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세 분이 이처럼 육의 공간을 입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것을 보았기에 본문에 "사람 셋"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세 분을 볼 때 육의 공간의 제약을 입은 사람의 형상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동시에 영안이 열려 보았기 때문에 육의 공간을 입고 있는 형상과 함께 원래의 형상 즉 영의 모습도 동시에 볼 수 있었지요.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영의 세계에 있는 선지자들이나 천군,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들이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 즉 첫째 하늘의 공간 안에 나타날 때 이들은 영의 시간과 영의 공간의 흐름을 타고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때는 영의 시간의 흐름이 멈추면서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와 같은 것을 타고 오게 되지요. 그러나 이때에 육의 세계로 내려온다 해도 공간은 여전히 영의 공간의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육의 공간 안에 영의 공간과 연결되는 통로가 열리면서 영의 공간이 부분적으로 형성되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요.
따라서 이처럼 영의 공간을 타고 있는 선지자나 영적인 존재들은 육의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세계에 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영의 공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안이 열려야만 그들을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육의 공간에 속한 존재들이 아니라 여전히 영체로서 영의 세계에 속한 존재로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같은 영의 공간이라 해도 둘째 하늘의 에덴에 사는 사람들이 육의 세상에 내려오면 그들은 영안이 열리지 않아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땅의 사람과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그들은 영체가 아니라 흙으로 지어진 살과 뼈가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육의 공간에서도 보여지고 만져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창세기 6장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에덴 동산에 살던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 내려와 사람의 딸들과도 결혼할 수가 있었던 것이구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전에도 설명 드렸듯이 둘째 하늘은 영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영의 공간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셋째 하늘 이상의 공간은 온전한 영의 차원에 속한 공간이기 때문에 이러한 영의 차원에 속해 있는 존재들을 육의 사람들이 보려면 반드시 영안이 열려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영의 공간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친히 첫째 하늘의 육의 공간을 입으시므로 제한된 육의 공간에 맞는 형태로서 나타나 보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때는 영안이 열리지 않은 육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지요. 영의 세계에 계실 때의 형상으로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육의 공간의 제약을 입고 있는 마치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구요.
3. 영과 육의 공간에서의 하나님의 형상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처럼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 있었을까요? 이는 전에 잠깐 설명을 드린 적이 있듯이 넷째 하늘의 공간을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품은 대로 그 형상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넷째 하늘의 공간에서는 어떤 물질의 상태가 고체, 액체, 기체 등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마음에 품으시는 대로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원래 어떤 형태가 없으신 빛과 소리로 계셨던 분이지만 셋째 하늘에 내려오실 때만 해도 구체적인 인자의 형상을 입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장차 천국에 가면 뵈올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지요. 그리고 그 형상을 따라 첫 사람 아담이 만들어졌던 것이구요. 물론 넷째 하늘에서도 인자의 형상을 입고 계실 수 있지만 그 곳에서는 주로 빛과 소리로 계십니다.
그런데 똑같은 인자의 형상을 입으셨을 때라도 근본된 넷째 하늘에 계실 때와 셋째 하늘에 계실 때의 모습은 다르지요. 차원에 따라 나타나는 빛과 영광, 위엄 등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크리스탈 조각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크리스탈로 아름답게 깎아 놓은 조각이 있다고 할 때에 같은 조각이라도 어떤 빛과 분위기에 전시하느냐에 따라 크게 다른 모습으로 보여질 수 있지요. 아주 밝은 빛이 있는 공간에서 볼 때는 여러 가지 빛깔로 영롱하고 화려하게 반짝이며 마치 신비한 빛의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보면 별로 빛도 나지 않고 형체만 보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넷째 하늘에 계신 근본 하나님의 영광과 모습이 그보다 제한된 아랫 차원의 공간 속에서는 다르게 보여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그 모습이 영의 세계 안에서도 넷째 하늘과 셋째 하늘에서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첫째 하늘에 임하셔서 육의 공간을 입으셨을 때는 그 차이가 더 크게 날 수밖에 없지요. 더욱이 육의 공간에 내려오실 때도 영의 공간을 열어 그 안에 계신 모습을 보는 것과 완전히 제한된 육의 공간을 입고 육의 공간으로 나오신 모습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나 천사들은 스스로 제한된 육의 공간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육의 공간에 나타난다 해도 여전히 영의 공간을 타고 있는 것이며 영의 공간에 속한 존재들인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마음에 품으시는 대로 어떤 차원의 공간이든지 입으실 수가 있습니다. 영의 공간을 탄 그대로 육의 공간에 임하실 수도 있고 육의 공간의 한계를 스스로 입으시므로 사람의 눈에 보일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나실 수도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성령님은 바로 이와 같이 한정된 육의 공간을 스스로 입고 나타나신 경우인 것이지요. 성령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으로서 이처럼 마음에 품으시는 대로 육의 공간을 입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함께한 두 천사장도 스스로 육의 공간을 입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순간만큼은 성령님의 공간 안에서 성령님과 함께 육의 공간을 입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었던 것이구요.
그러나 성령님과 두 분의 천사장들이 이처럼 육의 공간을 입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해서 사람과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육의 체는 입고 있지만 영에 속한 육의 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세 사람 즉 성령님과 두 천사장이 아브라함이 대접하는 요리를 먹었다 했는데 이는 우리 사람이 먹는 것과는 다르지요.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처럼 음식을 씹어서 잘게 부수어서 분해하고 소화하여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흩어져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음식을 드셨던 것과 비슷하다 말할 수 있지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음식을 잡수신 후 호흡을 통해 음식을 분해하셨는데 하나님과 두 천사장도 이와 비슷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하여 육의 공간을 입은 상태가 부활체의 몸과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부활체의 몸은 이 땅에서 경작받은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형된 것이지만 오늘 본문에 세 분이 사람의 형상을 입은 것은 잠시 필요에 의해서 육의 공간에 적합한 형태의 몸으로 존재하고 계셨던 것뿐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두 천사장과 함께 이처럼 육의 공간을 입은 상태로 이 땅에 내려오셔야 했던 것일까요? 그냥 예전처럼 영의 공간 안에 계신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친히 살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으로 내려오셔서 살피실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친히 소돔과 고모라 땅의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직접 그들을 대해보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앞으로 19장 에 가서 다시 설명이 나오겠지만 두 천사장이 이처럼 사람과 같은 형상으로 직접 그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의 패역한 정도를 확인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장들을 보고 자기들 보기에 좋을 대로 악을 행하여 천사장들에게 상관하려 했던 것이지요. 그냥 영으로 와서 살폈다면 이렇게 직접 그들의 악을 느끼지 못했을 텐데, 사람의 모습으로 와서 살폈기 때문에 그들의 악을 몸소 체험하며 느낄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음시간에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내용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이번 주는 고난주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사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 대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고난과 고통을 당하셔야 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고통을 나 때문에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2부 때 부활절 칸타타 공연을 보실 텐데 예수님의 고난당하시는 모습이 나오게 되지요. 그 장면을 보면서 대부분 눈물을 흘리시게 되는데 눈물이 나오는 이유가 단지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너무 참혹해서만은 아닙니다. 그러한 눈물은 세상 사람들도 흘릴 수가 있지요. 저와 여러분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원래는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그 고난을 대신 받아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고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는 것이며 그러한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주님을 더욱 사랑하지 못한 것이 죄송해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러한 참혹한 십자가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마음 아픈 것은 당연한 것이구요.
한 주간 동안도 예수님의 고난을 잘 묵상하셨겠지만 오늘 2부에 있을 공연을 통해 다시 한 번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보혈의 공로를 생각하시면서 은혜와 감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롬 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는 말씀처럼 우리를 위해 생명주신 주님을 위해 자신의 생명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다는 고백이 마음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올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2:24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