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27)
서 론 /
오늘 본문 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드디어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침내 열국의 아비로 세움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축복의 순간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아브람에게 친히 나타나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에 아브람에게 주셨던 언약의 말씀을 이루어 주시려고 아브람으로 하여금 준비케 하기 위해 이처럼 그의 앞에 나타나 만나주신 것이지요. 이 사건은 인간 경작의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대신 보내시거나 음성만으로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람 앞에 친히 나타나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만나러 오신 것이 환상이나 이상 중에 보는 것과는 달랐지요. 환상이나 이상 중에 하나님을 뵙는 것은 이 육의 공간 안에 영의 공간의 문이 열리면서 그 안에 있는 영의 세계를 보는 것이지만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은 육의 공간 안에 영의 공간이 형성되면서 연결 통로와 같은 것을 타고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셨다 하여 하늘에 계신 본체가 직접 오시는 것은 아니지요.
쉽게 말해 분체로 오신 것인데 물론 본체 즉 하나님의 근본 자체를 뵙는 것과 영의 분리를 통해 오시는 분체를 뵙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체로 오신다 해서 하늘에 계신 본체와 모습이 다른 것이 아니며 뵙는 편에서 분체라 느끼는 것도 아니지요.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본체는 하늘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분체를 통해 동일한 모습과 느낌으로 이 첫째 하늘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본체와 같은 모습과 느낌이라 해도 4차원의 공간에 계신 하나님께서 1차원의 제약된 공간으로 내려오신 것을 뵙는 것과 장차 우리가 천국에 가서 뵙는 것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왕을 만난다고 할 때 그 왕이 여러분의 집에 찾아와서 만나는 것과 여러분이 왕궁으로 찾아가서 만나는 것과는 여러 가지가 다르겠지요. 또한 고화질의 선명한 텔레비전이라 할지라도 실물을 보는 것과는 차이가 나는 것처럼 하나님을 분체로 뵙는 것 역시 본체의 모습이나 느낌, 위엄과 권세 등은 동일하다 해도 장차 실물인 본체를 뵈올 때 느낄 감동과 환희, 충만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처럼 아브람을 만나러 내려오실 때에 하나님 홀로 오시는 것이 아니지요. 엄청난 무리의 천군과 천사를 대동하고 호위를 받으시며 오시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신 분들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첫째 하늘에 내려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오시는지를 아시지요. 천군과 천사들이 미리 내려와 바삐 움직이면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는지 그 행차가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하며 권세와 위엄이 느껴지는지를 보셨지요. 또 보좌와 함께 내려오시는 것을 봅니다. 더욱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움직이실 때는 아들들이 동행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본문에 아브람을 만나실 때도 아버지 하나님 홀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들들을 대동하고 내려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능히 알 수 있지요.
본 론 /
1. 너는 네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만남을 위해 아브람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먼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75세 때에 그를 택하여 부르시고 지금까지 많은 연단의 과정을 통해 그를 다듬고 믿음을 성장시켜 오셨음에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완전하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이라는 위치가 결코 흠이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완전할 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징계나 재앙만이 아니라 축복을 주실 때도 공의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아브람에게도 열국의 아비로 세워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주시면서도 먼저 그에게 완전할 것을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도 먼저 여러분에게 준비된 그릇을 요구하시지요.
성경상에 이름이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 앞에 쓰임받고 축복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그릇을 준비해야 했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본 제단이 축복받고 만민 위에 우뚝 서게 된 과정을 보아도 또한 저의 권능이 날로 커지게 된 과정을 보아도 반드시 그릇이 준비된 만큼, 하나님 앞에 공의 가운데 인정받는 만큼 축복도 더해졌고 권능도 더해졌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릇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본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할 것"을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던 구약 시대에는 이 말씀이 행함의 온전함을 뜻하는 것이었지만 성령을 받고 마음에 할례해 나가는 성령 시대에는 마음의 거룩함과 온전함까지도 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 해서 구약 시대에는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구약 시대나 지금의 성령 시대나 모두 마음의 할례하는 것이었지요. 신 30:6에 보아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하신 것입니다. 바로 마음에 할례를 하여 마음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생명을 얻게 하신다 했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을 통해 얻기 원하시는 참자녀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녀들을 천국에 들이셔서 영생을 주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아브라함이었기에 그는 행위로만 하나님 앞에 완전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온전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신 것은 단지 외형적인 행함의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행함의 완전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행함도 중요하되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어떤 사람들은 믿는다 하면서도 이를 마치 잘못된 율법주의인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마음과 함께 행함의 중요성을 말씀하지요.
아브라함이 마지막 관문이었던 독자 이삭을 바치는 시험을 통과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시며"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약 2:21-24에서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2.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과 세운 영원한 언약
이제 본문 2-8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언약의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고 계시지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뜻은 많은 무리의 아비라는 뜻으로서 본문에는 "열국의 아비"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장차 얼마나 많은 믿음의 후손들이 나오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7절에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십니다. 오늘 아브라함을 통해 세우신 언약으로 말미암아 장차 마지막 때까지의 모든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이끌어 가시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여러분도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로 복음이 회귀되면서 인간 경작의 역사가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으로 인하여 끝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언약을 주시며 사람 편에서도 이 언약을 확증하는 증표로서 할례할 것을 말씀하셨지요. 9-10절에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따라 할례를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과의 사이의 언약이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지요.
3. 하나님과 언약의 증표, 할례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 끝의 포피(包皮) 또는 양피(陽皮)를 끊어내는 의식으로서 하나님께서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고 심지어는 안식일에도 할례만큼은 행했지요.
요 7:22-23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즉, 율법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받았지만 이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할례를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그것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일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믿는다면 당연히 행함도 따라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증표로서 할례를 명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할례를 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해 나가겠다는 사람 편에서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할례만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임과 동시에 이제부터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는 약속과 같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갈 5:3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니 설령 할례를 했다고 해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그는 결국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롬 2:25에도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또한 이어지는 26절에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하여 무할례자라도 율법대로 살면 할례한 것과 같이 여김을 받을 수 있다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롬 2:14-15에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는 말씀과 짝을 이루는 말씀으로서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이라도 양심에 따라 율법의 행위를 나타낼 때는 그로 인해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표로서 구약 시대에는 이것이 반드시 행위적인 할례로도 나와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도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주를 믿는 유대인들 중에도 할례를 마치 구원의 증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구요. 행 15:1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했던 것이지요.
갈 5:6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롬 2:28-29에는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니 육신의 할례가 구원의 기준이 아니며 육신의 할례를 한 표면적 유대인이라 해서 모두가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대인이 아님을 알아야 하지요. 육신의 할례를 한 유대인이라 해서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약속의 백성으로서 할례를 한 이스라엘 백성만이 구원의 대상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까지 할례의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으셨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 12-13절에 보면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요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 중에 할례 받은 자 곧 하나님과 언약이 세워진 사람은 누구나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구약에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방인이든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하는 것은 육신의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로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냐 그렇지 않은 사람이냐로 정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구원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언약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은 모든 나라와 민족 중에서 믿는 사람의 조상이 되기 위해 열국의 아비라 칭함을 받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으로서 세우심을 입었다는 사실에 대해 롬 4:9 후반절-13절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된 것이 할례를 받은 후가 아니고 할례를 받기 전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이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침을 받은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 해서 할례자의 조상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할례받기 전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조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사이의 언약은 할례나 율법의 행위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믿음의 의로 말미암는다는 뜻이지요.
오늘 본문에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만남을 통해 이처럼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담긴 언약이 맺어지는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들들을 동행하여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성경의 내용이 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씨를 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웃었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음 시간에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과 사이에 언약을 맺은 사람은 그 증거로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고 이렇게 할례받은 사람에게만이 하나님의 언약도 효력이 있는 것이지요.
이 땅에서 사람 사이에 어떤 계약을 맺을 때도 한쪽에서만 도장을 찍은 계약서는 무효이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에 있어서도 우리 편에서 도장을 반드시 찍어야만이 그 언약이 온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할례인 것이므로 할례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떻게 할례를 해야 할까요? 골 2:11에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믿음의 증표로써 이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아가서는 안 되며 육을 벗고 영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나는 교회에 다니니까, 나는 교회에 이렇게 오래 다녔으니까 나는 이런 직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이러한 것들은 단지 자신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임을 표면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육신의 할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로서 얼마나 악은 모양이라도 버렸고 얼마나 주님을 닮아 거룩하여졌으며 얼마나 아버지 닮은 영의 마음을 가졌는가 바로 이러한 마음의 할례를 원하시지요. 요일 3:18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씀하신 대로 말과 혀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할 것이 아니라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즉 진실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구원받은 천국의 백성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나타내실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할례의 증표로 말미암아 계 22:5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하신 언약의 말씀이 여러분과 하나님과 사이에 성취되어짐으로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2:32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