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26)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자신의 나이가 많음에도 아직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자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종으로 있는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동침케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하갈이 잉태를 하게 되자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게 되고 이로 인해 사래는 스스로 연단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인도하심을 받아 나갔어야 하나 사래는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였다가 결국 연단을 자초하고 만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생각과 방법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 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이며 어떤 뜻과 섭리가 있으신지를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으면 발견하여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해도 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달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래가 스스로 자초한 연단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사래는 자신의 계획대로 하갈이라는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그녀로 하여금 잉태케 하였지만 막상 하갈이 잉태를 하게 되자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하갈이 자신의 잉태함을 깨닫자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사래는 하갈이 자신에게 속한 종이라 생각하여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하갈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지를 않았던 것이지요. 자신이 비록 종이기는 하지만 후사가 없는 집안에서 후사를 잉태하였으니 스스로 자신을 높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 역사를 보아도 자주 나오지요. 궁녀의 신분으로 왕궁에 들어왔다가 어느 계기를 통해 왕의 은총을 입게 되자 순간에 마음이 높아져서 함께했던 주변의 사람들마저 무시하고 교만해져 가는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는 중전의 자리까지 넘보며 악을 행하는 경우도 볼 수 있구요. 물론 하갈이 그렇게까지 심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사래의 입장에서 느낄 때에는 하갈의 조그마한 행동이나 말 하나도 자신을 멸시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역시 자존심과 악이 있기 때문이지요. 상대는 그런 의도에서 한 행동이나 말이 아닌데도 스스로가 자격지심에서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의 교만이라는 것이 평상시 때 또는 자신의 처지가 낮을 때는 드러나지 않다가도 막상 권세가 주어지고 인정받는 위치에 서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갈 역시 종의 신분으로 있을 때는 설령 교만한 마음이 있었다 해도 어찌 그것을 드러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주인 아브람의 아이를 잉태하게 되자 눌러 두었던 교만의 마음이 드러나게 되고 이처럼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기에까지 이른 것이지요. 이는 꼭 하갈의 경우만이 아니고 진리로 온전히 변화되기 전에는 누구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섬김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섬기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늘 자신을 돌아보아 혹여 나에게 섬김 받고자 하고 나를 드러내며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의 마음이 있지는 않은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온 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잠 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하신 말씀이 마음에 항상 명심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본 론 /
1. 연단의 책임을 아브람에게 돌리는 사래
본문 5절에 보면 사래 역시 스스로가 자초한 연단을 통해 악의 모양이 하나하나 드러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말하고 있지요.
사실 모든 일을 처음부터 계획한 것도 자신이요 그래서 하갈을 남편에게 준 것도 자신인데 그로 인해 자신에게 해(害)가 돌아오게 되자 그 탓을 곧바로 남편 아브람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정작 남편에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자기 생각과 방법대로 행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자기편에서는 하갈에게 관대하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하갈 편에서 자신을 멸시하는 듯이 나오자 하갈에 대해서도 서운함과 감정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가면서까지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고 억울하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사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래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했음에도 막상 결과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자 그 책임은 남편에게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다면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내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것이 무엇인가? 이러한 것을 기도하며 깨우쳐야 할 텐데 사래는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그 탓을 남에게 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기 생각이 다 옳고 자신이 하는 일은 다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항상 자기 생각과 계획을 고집하고 어떻게든 밀고 나가려 하지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자기 의견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다른 사람들이 화평을 좇기 위해 그 사람의 의견에 따라주기라도 하면 더더욱 신이 나서 자기 주장대로 이끌어 가지요.
그런데 이처럼 자기 원하는 대로 했음에도 막상 그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기라도 하면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우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과도 화평하지 못했음을 돌아보며 스스로 책임을 지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옳았고 자신은 여전히 잘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잘 도와주지 않았다거나 자신의 계획대로 100% 따라주지 못해서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고 하는 것이지요.
모세 선지자의 경우는 자신의 구원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동족의 죄를 대신 책임지고자 했던 모습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처럼 스스로 한 행동에 대해서조차 책임지려 하지 않는 모습은 너무나 합당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사래 역시 자신의 계획으로 인해 생긴 결과라면 자신이 겸허히 받아들이고 풀어나가야 했으나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탓을 남편에게 돌리고 있으니 잘 되면 내 탓, 잘못 되면 남의 탓이라는 식의 비진리의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항상 자신의 말과 행동에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며 자신으로 인해 안 좋은 결과가 생겼을 때는 그것을 무마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여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 한 번의 잘못이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실수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될 수 있는 축복의 기회를 삼을 수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깨달아야 할 점은 끝까지 선을 베풀 수 있는 선의 마음입니다.
사래는 하갈에 대해 나름대로 선과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생각과 다르게 되니 그 마음에서 악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래가 정녕 좋은 마음에서 했던 일이라면 하갈이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에 함께 기뻐하고 더 위해 주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갈이 사래를 멸시한 것은 분명 잘못한 것이지만 그렇다하여 그 탓을 남편에게 돌리며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모습은 결코 선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 머리된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선을 베풀며 그가 잘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랫사람이 쑥쑥 성장하여 어느새 자신과 비길 만한 위치에 서게 되었지요. 예전에는 내가 관리하던 회원이었다면 이제는 같은 임원이 되어 동등한 위치에서 일을 해 나가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자신보다도 더 인정받으며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지요.그렇다면 이때 머리된 사람의 마음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함께 기뻐하며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도와줄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이런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설령 상대가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까지 올라도 이제는 그 사람을 윗분으로서 정성껏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도 "저분이 저렇게 성장하여 하나님 앞에 큰 일꾼이 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지요.
그러나 사래와 같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상대가 어느새 성장하여 자신보다 더 인정받고 사랑받는 위치에 서게 되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지요. 또한 혹여 자신의 생각에 상대가 자신을 좀 무시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면 아니, 내가 저렇게 키워 줬는데 그 은혜도 모르고 나를 무시하다니 하며 마음이 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상황들이 있을 수 있지요. 예를 들어, 나는 본 교회에 온 지가 훨씬 오래 되었는데 나보다 늦게 온 사람이 어느새 자신보다 더 머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내가 섬김받는 위치에 있었고 상대를 심방해 주며 많은 것을 가르치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내가 상대를 섬기며 때로는 지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물론 이때 머리로서 섬김을 받게 된 사람 역시 예전에 받았던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라면 설령 지금은 내가 더 머리된 위치에 있다 해도 예전에 자신을 도와주고 은혜 주었던 분에 대해 변함없이 섬기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섬김을 받다가 이제는 섬겨야 하는 입장에 선 사람 편에서는 상대에게 그것을 바라고만 있어서는 안 되지요. 예전에 내가 갈무리하던 사람인데, 예전에는 내가 더 신앙이 좋고 인정받았는데 이런 생각에만 젖어서 여전히 섬김 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질서를 좇아 머리된 분을 열심히 섬기고 저분은 늦게 왔음에도 어떻게 저렇게 빨리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 일꾼이 되었을까? 이러한 것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마 19:30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말씀처럼 누가 먼저 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먼저 영으로 들어오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 해서 육적인 질서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육의 질서에 매여 영적인 질서를 깨우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더불어 여러분이 선과 은혜를 베풀었다면 그 자체로 기뻐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라며 끝까지 선으로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래 역시 자신이 하갈에게 은혜를 베풀었을 때 하갈이 그것을 선으로 갚지 못했다 해서 똑같이 자신도 악을 발할 것이 아니라 만약 계속해서 선으로 대해 나갔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하갈의 마음을 움직여 주사 모든 것이 화평함 가운데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래는 그렇지를 못했고 이어지는 본문에 보면 결국 하갈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할 정도로 하갈을 심히도 학대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니 이것이 어찌 선이겠으며 앞서 하갈에게 베풀어 준 선 또한 어찌 참된 선의 행동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갈에게 선을 베푼 것도 자신의 유익을 좇은 것이었고 그렇게 했을 때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자 곧바로 악을 발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2. 순리를 좇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린 아브람
6절에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왜 하갈을 사래의 손에 붙여서 이런 결과가 나오도록 놔둔 것일까요? 하갈은 자신의 귀한 아이를 잉태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녀의 행동이 좀 지나치다 싶어도 사래를 설득하고 달래서 끝까지 하갈을 두둔하며 보호해 주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아브람은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가정의 머리된 가장으로서 얼마든지 사래를 설득하고 달래거나 아니면 지시해서라도 어떻게든 하갈을 지켜 줄 수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생각과 방법이지요.
아브람이 그렇게 했다면 설령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일지 모르나 속으로는 두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고 서로를 미워하며 감정을 품게 되겠습니까? 사래에게 "참으라"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도 아니고 하갈에게 "참으라" 해서 될 상황도 아니었지요.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는데 어느 편 손을 들어 준다 해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려 한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해결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겼던 것이지요.
가장으로서 권한이 있다 해서 그 권한으로 "너는 이렇게, 너는 저렇게 해라" 지시하여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순리를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가시도록 맡겨 드렸다는 말입니다. 하갈은 원래 사래에게 속한 종으로서 하갈에 대한 권한이 사래에게 있으니 그대로 맡기는 것이 순리이지요. 그 결과 당장에는 하갈이 사래를 피하여 광야로 도망가고 마는 결과가 나타났지만 이것이 오히려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집니다. 육으로 보면 문제가 더 꼬이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이것이 바로 문제 해결의 시작이었지요.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친히 하갈에게 "사래에게로 돌아가 복종하라" 하니 하갈도 다른 길이 없게 된 것입니다. 만약 아브람이 하갈에게 "무조건 여주인 사래에게 복종하라" 했다면 하갈은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아브람에 대해서도 서운한 마음과 감정을 가질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이처럼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지시하니 하갈은 그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 해서 하갈에게 무조건 돌아가 사래에게 복종하라고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장차 그녀가 낳게 될 아이에 대한 축복과 언약의 말씀을 주시지요. 그냥 무조건 돌아가라 하면 하갈이 생각하기에 이제 돌아가서 그 고통을 또 어떻게 견뎌야 하나 하며 심히도 고통 받으며 힘들어했을 텐데, 이처럼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는 언약의 말씀을 주시니 하갈은 소망 가운데 말씀에 순종하여 순순히 돌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래 역시 막상 하갈을 심히 학대하여 하갈이 도망하는 상황에까지 처하게 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남편 아브람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게 되지요. 내가 좀 심했나 보다, 그래도 남편 아브람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는데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이런 생각들이 들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갈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예전처럼 심하게 학대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아브람이 자신의 힘과 방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순리를 좇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화평함 속에서 해결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신 것은 바로 사랑하는 아브람의 마음을 생각하셨기 때문이지요. 만약 사래와 하갈 사이에 갈등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만 간다면 이를 지켜보는 아브람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브람을 생각하사 결국 모든 것이 화평함 가운데 해결되도록 인도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때 아브람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렸다는 점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나는 혹여 내가 가진 권세와 힘을 가지고 순리를 벗어나 문제를 풀어 나가려 하지 않았는가? 그 과정에서 혹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화평함이 깨어지게 하지는 않았는가?이러한 것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내 방법 가운데 풀어 가려고 하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의 아브람의 모습을 통해 여러분 자신의 모습과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이스마엘에 대한 예언
이어지는 12-16절에서는 하갈을 통해 낳게 될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적인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12절에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했지요. 여기서 들나귀같이 된다는 말씀은 그가 거친 환경 속에서 스스로 개척하여 나가는 삶을 살 것을 말씀합니다. 그 삶이 쉽고 평탄한 것이 아니며 영토와 삶의 터전을 얻기 위해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친다" 말씀한 대로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며 싸워 나갈 것을 말씀합니다. 다른 민족을 치기도 하고 다른 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기도 하는 이러한 과정들이 있게 된다는 뜻이지요.
또한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 살리라"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역을 정확히 구분지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정통성을 이어갈 후사가 아니었기에 그는 약속의 씨인 이삭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에게도 영토를 주시되 그곳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사에게 약속하신 땅과는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아브람을 생각하사 이스마엘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는 온전한 축복의 후사가 아니었으므로 따로이 구분된 영역을 주시고 그 안에서 스스로가 개척하며 삶을 일구어 나가도록 하셨던 것이지요.
4. 감찰하시는 하나님
사래의 학대에 못 이겨 광야로 도망쳐 나왔던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언약의 말씀을 받은 후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고백합니다. 자신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살피시고 비록 종의 몸이지만 자신에게서 낳게 될 후사까지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시 33:13-15에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말씀하지요. 또 시 139:1-4에서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렇게 우리 인생들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공의에 따라 정확히 역사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하갈은 바로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이처럼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 느끼게 되니 이제 후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지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도 결국은 아브람을 보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게 되는 이 모든 과정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요 사람의 생각 가운데 되어진 일들이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의인 아브람을 보시고 모든 것이 화평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스마엘에게도 이처럼 언약의 말씀으로 함께해 주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얻은 때가 그의 나이 팔십육 세였습니다. 아브람이 약속의 씨에 대한 언약의 말씀을 받고도 10년이 넘었을 즈음에 이르러서였지요.
그렇다면 사람의 생각에는 이 아들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약속의 씨인가 보다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된 씨인 진짜 후사는 그로부터 14년 후에 태어나게 되지요. 이처럼 약속의 씨에 대한 언약의 말씀을 받은 지 10년이 넘어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고 이후로도 14년 동안이나 다른 후사가 없었음에도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거나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했기에 마침내 100세가 되어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때에 약속의 씨인 이삭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 17장에서 하나님께서 99세가 된 아브람에게 나타나 그를 열국의 아비인 아브라함으로 세워 주시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렘 33:2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하시고 그 계획에 따라 반드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시지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방법을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거나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기도하기보다는 당장 자기 보기에 좋은 길과 방법을 택하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브람은 가정의 일 하나까지도 자기 임의대로 생각과 방법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순리를 좇아 하나님 앞에 맡겨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범사에 하나님께 믿고 맡기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정의 머리도 주님이시요, 기관과 구역에서부터 선교회와 교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직의 머리도 주님이 되심으로 늘 형통함의 축복 가운데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2:35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