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24)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12절부터는 아브람이 꿈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 장면이라 했습니다. 깊이 잠든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장차 그의 후손들이 겪게 될 일들을 보이시며 음성으로 함께 역사해 주고 계신 것이지요. 그런데 꿈이라고는 하지만 아브람은 실제 벌어지는 상황처럼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두려움이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장차 그의 후손들이 겪게 될 일들을 보니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고 많은 역경과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게 되니 순간 두려움이 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지고 본격적인 인간 경작의 역사 속에서 앞으로 그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을 푯대로 하여 믿음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 하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는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지요.
본 론 /
1.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앞일에 대해서 미리 알려 주셨는데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매우 구체적인 내용까지도 알려 주고 계십니다. 13-14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셨지요. 이 말씀 안에는 장차 야곱을 통해 시작되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들어가서 종살이 하게 될 것과 그러다가 출애굽하게 될 것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요셉이라는 인물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훗날 총리가 되는 것도 그의 형제들 즉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 땅으로 이주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도 그곳에서 종살이하며 사백 년을 지내는 것도 모세를 인도자로 하여 출애굽하게 되는 것도 이 모든 것들이 다 사람의 힘이나 계획으로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 속에서 이루어진 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이 강성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그들의 종으로 살아간 것이 아니며 짧은 시간 안에 이스라엘 민족을 큰 민족으로 형성시켜 나가기 위한 섭리 가운데 허락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살이 한 기간이 왜 400년 동안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16절 말씀과 연관하여 설명을 드릴 텐데,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앞으로의 되어질 일들에 대해 구체적인 시간까지도 말씀해 주셨고 그 말씀대로 정확히 이루어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은 믿음이 온전한 자로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졌지만 그의 후손들은 각각의 믿음의 분량대로 그들의 믿음이 성장해 가는 만큼 하나님을 체험하며 인도받아 나가게 되지요. 그들의 믿음으로는 당장에 가나안 땅을 침노해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후손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 믿음의 연단의 과정들을 하나하나 섭리하시고 그 계획에 따라 인도해 가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때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출애굽하게 하시고, 모든 것이 공의의 법칙에 맞는 시점이 되었을 때에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가게 하신 것이지요.
이제 15절에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라 인정받을 만큼 흠 없고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엘리야나 에녹 또한 모세와 비교해 보았을 때 얼마든지 산 채로 들림받아 아버지 하나님 곁으로 갈 수 있는 인물이었지요.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생명이 다하는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가 있지요. 사람이 이 땅의 삶을 마치게 되면 그 중에 구원받은 영혼들은 윗음부로 가게 되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은 아랫음부로 가게 됩니다. 바로 아브라함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마치고 승천하실 때까지 윗음부에 거하면서 구원받아 오는 영혼들을 그 품에 맞아 주는 사명을 감당했던 것이지요.
눅 16:22에 보면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하여 구원받은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 품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어 주시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의 믿음의 척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영혼들은 믿음의 푯대가 되었던 아브라함 선지자의 품에 안기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구원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구원받은 영혼들이 주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시기 전에 이 땅의 삶을 마치고 구원받은 영혼들도 모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구약시대에 구원받은 영혼들은 비록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기회가 주어지지요. 그래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계의 법칙에 따라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구세주로 나오기 전에는 구약에 구원받을 영혼들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던 것입니다.
벧전 3:19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그 영이 음부에 내려가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 중에 구원받은 영혼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지요. 그러나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도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이 윗음부에 머물면서 모든 구원받은 영혼들을 주관해 가는 사명을 맡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죽을 때도 너무나 평안하게 숨을 거두게 됩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사랑을 받던 그였기에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모든 것이 평안했지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지고 마침내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 오직 순종해 나감으로 어느 것 하나 어그러짐 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인도받는 삶을 산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복된 것을 볼 수 있지요. 모든 것이 평안한 환경 속에서 행복하게 이 땅의 삶을 마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믿지 않던 일가친척이 전도되거나 가족들이 하나 되고 믿음이 더해지는 복된 시간이 되는 것이지요.
2. 사대와 400년의 의미
본문 16절 말씀을 보면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했습니다. 앞서 13절에서도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하여 4라는 숫자와 연관이 있었는데 사백 년이나 사대에 나오는 4라는 숫자는 고난을 의미하는 수로서 이는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겪게 될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연단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선민으로서 온전히 나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지요. 하나님에 대해 알아 가게 되고 깨우치며 믿음이 성장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사대 만에 이 땅 즉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사대(四代)란 야곱의 아들들의 세대로부터 시작하여 출애굽하던 때의 세대까지를 말합니다. 즉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아들들을 제 일세대로 하여 출애굽의 세대가 제 사세대가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모세의 계보를 상고해 보면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가 일세대요, 레위의 아들 고핫이 이세대, 고핫의 아들 아므람이 삼세대, 아므람의 아들 아론과 모세가 사세대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한 지 정확하게 사대(四代)만에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이처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기까지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며 괴롭힘을 당하게 될 기간을 400년이라 했지요. 행 7:6에도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하여 스데반 집사도 400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요.
그런데 출 12:40-41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하여 출애굽기의 저자인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을 430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 3:17에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하여 사도 바울 역시 사백삼십 년을 언급하고 있구요.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성도 여러분, 400년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생각할 때 한 세대를 100년으로 계산하여 사대(四代) 즉 400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400년은 "사대 만에 돌아오리라"는 말씀과 짝을 이루어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애굽 땅에 정착한 때부터 모세에 의해 출애굽하게 되는 때까지를 말하지요.
그런데 400년이라고 하는 숫자는 사대와 짝을 이루기 위한 어림 숫자인 것이고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은 430년이 됩니다. 430년의 시작점과 끝점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주장들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야곱이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이주한 때를 B.C. 1876년으로 하여 출애굽 사건이 일어난 B.C. 1446년까지가 정확히 430년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따라서 400년이 맞느냐 430년이 맞느냐를 가지고 시시비비 논쟁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어떤 때는 400년으로 또 어떤 때는 430년으로 기록케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면 되는 것입니다.
3. 공의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본문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후손들이 사대 만에 돌아오리라 하시며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정확한 공의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말씀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사대라는 기간이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갈 만한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시간이었다면 당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이방 족속들에게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가운데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니느웨 성의 백성들에게 요나 선지자를 보내어 돌이킬 시간을 주셨고 소돔과 고모라에도 친히 천사들을 보내어 그들의 죄악의 관영함을 살피심으로 최후의 기회를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방 족속이라 하여 무조건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공의를 적용시키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공의는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 속에 살아가면 그 안에서 부요케 될 수도 있고 큰 재앙이나 사고를 만나지 않을 수도 있지요. 세상에서도 나름대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있고 열심히 구제하며 좋은 곳에 물질을 쓰는 사람도 있으며 악하지 않게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공의라는 법칙 안에서 그들이 행하고 심은 만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공의를 적용시키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늘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되어 전혀 축복도 받지 못하고 항상 시험, 환난 가운데 살아야 하겠지요. 물론 세상 사람들이 받는 축복은 그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기에 원수 마귀 사단은 늘 틈을 찾아 어떻게든 자신들의 밥으로 삼아 가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이 육의 세상에도 정의와 질서가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는 있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욕심에 이끌리기 때문에 선(善)으로 승리해 나가는 사람이 드문 것뿐이지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아직 죄악이 관영하지 않은 가나안 땅을 단번에 정복해 들어가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거하는 사람들의 악이 공의의 심판의 선(線)을 넘을 때까지 참고 인내하시며 기회를 주신 것이지요. 물론 당시의 육적인 상황을 보았을 때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가족들 70명으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후손들로 하여금 크고 강한 민족을 형성해 갈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아직 가나안 땅에 살던 이방 족속들을 멸하실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 가운데 역사하시되 반드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주시려 해도 또 여러분을 시험 환난으로부터 지켜 주시려 해도 모든 것을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지요. 하나님의 자녀라 해서 무조건 축복 주시고 지켜 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나에게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할 것이 없으면 어떤 저주나 시험 환난도 임하지 않지요.
잠 26:2에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아무 이유 없는 저주나 시험 환난은 결코 임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찾아왔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를 찾아 하나님 앞에 회개했을 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며 예전처럼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아모리 족속에게도 그러셨듯이 어떤 문제가 드러나 결과로 나타나기까지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유예 기간이 있지요. 물론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문제가 드러나기까지의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어떤 잘못을 했다 해서 단번에 징계나 시험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깨달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거듭 주시다가 그래도 돌이키지 않을 때 결국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손을 대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 마귀 사단에게 내어주시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가운데 아모리 족속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 더욱더 악으로 치달아 갔기에 결국 사대(四代) 후에는 심판의 한계선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들어 그들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삼으시지요. 이것이 곧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복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가나안 정복이 약속된 땅을 믿음으로 취하는 축복의 과정이지만 당시 가나안 땅에 거하고 있던 이방 족속에게는 죄악에 대한 심판의 과정이 되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스스로도 공의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세주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도 그 많은 연단과 고통을 받으셔야 했지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단번에 구세주로 세워 주신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고난당하시며 구세주로서의 자격을 갖추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과정을 순종으로 통과해 나가셨기에 구세주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이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실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빌 2:9-11 말씀처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셔서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빌 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말씀한 대로 자기를 철저히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기에 이제는 공의 가운데 하나님께서 마음껏 주님을 높여 주실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4. 아브람의 제사를 흠향하시고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
본문 17절 말씀을 보면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했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제사를 얼마나 아름다운 향으로 기쁘게 흠향하셨는지를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얼마나 그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는지를 친히 확증할 수 있는 증표로서 보여 주신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마음 중심에서 믿음과 정성으로 하나님 앞에 드렸는가에 따라 이와 같은 증거를 통해 확신을 주고 만나 주십니다. "내가 너의 기도를 기뻐 받았다 내가 너의 정성과 믿음을 기뻐 받았다"는 증거를 나타내 주신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아버지 하나님과 이런 관계가 되어지면 더욱 확신 가운데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8절에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하십니다. 이 말씀 역시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셨던 말씀을 다시 한 번 확증하는 말씀이지요. 아브람이라고 하는 한 인물을 통해 장차 그의 후손들이 얼마나 창대하게 뻗어 나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현실을 본다면 아직 후사도 태어나지 않았고 주변에는 당시 아브람으로서는 넘볼 수 없는 강한 민족들이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처럼 엄청난 약속을 주셨던 것이고 아브람은 그 약속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기에 히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에 따라 때가 되매 시간을 초월하여 언약의 말씀이 성취될 수가 있었던 것이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한 그 언약의 말씀들이 다 성취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되기에 여러분이 기도를 받을 때도 믿음으로 받으면 대부분 즉시로 응답이 되어지지만, 아직 응답받기에 부족한 것이 있을 때는 그 믿음의 분량이 채워진 후에 응답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의 소리가 한 번 발하여지면 반드시 그대로 성취되듯이 제가 기도해 드릴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았으면 아직 응답받기에 부족한 것이 있는 경우라도 그 내용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되어진다는 말이지요.
19-21절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 당시에 살고 있던 이방족속들의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지요. 이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처럼 많은 이방 족속들이 나름대로 힘을 키워 자리잡고 있는 가나안 땅을 사람의 힘만으로 정복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사람의 힘만 가지고는 이들을 이길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들 이방 족속을 몰아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취하려면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바로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러한 믿음을 갖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여러분이 가나안 정복사를 보시면 알겠지만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며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이방족속을 하나하나 정복해 가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들이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육적으로는 강하고 큰 민족으로 성장케 하시며 영적으로는 가나안 정복에 필요한 믿음을 키우게 하시고자 애굽에서의 400년 종살이도 또한 40년 광야생활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장의 현실이 아니라 앞으로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대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당장 보기에는 어려운 길인 것 같고 고난의 길인 것 같지만 그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축복의 길이요 형통함의 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보기에 좋은 길, 자기 보기에 편한 길만을 택하려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데 당장 그 길이 힘들어 보인다고 해서 순종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직 "아멘"과 "예"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가면 축복인데 당장 현실을 보기 때문에 순종이 나오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현실을 보지 않고 믿음으로 결과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의를 원하십니다.
아브람이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받음으로 결국 언약하신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어졌듯이 여러분도 신속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의를 이루어 축복의 2004년도에 주신 언약의 말씀들이 온전히 성취되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2:45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