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23)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 이래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고 자신들 편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믿음좋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아브라함 이후에도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셨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길을 친히 인도해 가셨습니다. 연단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리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에 이르게 하셨고 동시에 아브라함의 후사를 통해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어 가실 계획 역시 하나 하나 진행시켜 나가셨지요.
본 론 /
1.아브람의 후사에 대한 언약
본문 4-5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십니다.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후사에 대한 언약의 말씀을 주신 적이 있는데 그 말씀을 주신 후로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브람에게는 후사가 없었지요. 그러다가 이제 다시 한 번 후사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약속을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이전에 주신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이처럼 다시 한 번 언약의 말씀을 주고 계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주신 언약의 말씀을 믿지 못하거나 의심한 것이 아니었으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지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언약의 말씀을 주심으로 아브람과의 약속을 확증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이처럼 언약의 말씀을 받은 후 곧바로 약속의 씨인 후사가 태어난 것은 아니지요. 이후 사래의 몸종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이 태어났지만 그는 약속된 후사가 아니었습니다. 이때 아브람의 나이가 팔십육 세였지요. 그런데 그 후로도 14년이 더 지나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약속의 씨인 이삭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처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명하시며 약속의 말씀을 주신 때로부터는 25년이 지난 후였구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도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동안 아브람은 변함없이 아버지 하나님을 믿어 드렸습니다.
2. 믿음의 의
바로 본문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했지요. 이에 대해 로마서 4:13에는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의란 무엇일까요? 믿음의 의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현실을 보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그 결과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생각이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시기위해 하나님께서는 때로 시험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시험을 맞게 되면 그동안 쌓아온 믿음의 의가 드러나게 되지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정탐꾼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각 사람의 믿음의 의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열두 정탐꾼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은 민수기 13:32-33에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했지요.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수기 14:7-9에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똑같이 정탐하고 돌아왔음에도 이처럼 믿음의 고백이 달랐던 것입니다. 앞서 열 정탐꾼은 현실을 본 것이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의 눈으로 결과를 바라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 끝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이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믿음의 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의는 진실이라고 하는 결과로 나와지게 되지요.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세상에서도 자녀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대부분의 어머니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녀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몸을 던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했던 어머니라도 자녀가 장성하면서 어머니의 마음에 맞지 않고 빗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서로 다투기도 하고 심하면 원수 맺는 것도 봅니다. 어머니가 원하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원하는 진로를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머니와 자녀 사이에 금이 가고 말지요. 그렇다면 이것이 진실입니까? 진실은 변하지 않는 것인데 목숨까지 걸 수 있었던 모성애가 있었다 해도 세월이 흘러 자기 뜻과 의에 맞지 않으면 원수가 될 수도 있다면 이것은 진실이 아니지요.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의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유익에 맞지 않으면 변질되고 결국 배신해 버릴 수 있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믿음의 의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현실이 아닌 결과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며 이런 믿음을 내보일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신뢰성이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은 바로 이러한 신뢰 관계에 이르렀기에 본문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의 의를 인정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의의 결과가 열매로 나타난 것이 그때 당장은 아니라 했지요. 여러분도 이러한 법칙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성취되어 열매로 나와지기까지 누가 변함없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가?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지요.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로 다 나타난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당장 나타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각 사람의 믿음의 의를 측량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의가 원하시는 분량에 찼을 때 바로 응답이라고 하는 열매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일꾼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달아 명심해야 합니다. "가서 보여지는 열매를 따오라"고 하면 그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보여지지 않는 열매를 따오라 했을 때 믿음의 눈으로 결과를 바라봄으로 말씀에 의지하여 가서 열매를 따올 수 있는 사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일꾼을 찾으십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이 늘 들어서 아시던 말씀이라 해도 다시 한 번 마음으로 깨달아 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3.하나님의 징표를 구하는 아브람
이어지는 7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하시자 8절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대답을 하지요. 이 말씀도 여러분이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서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며 확증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이처럼 확증을 구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이의 약속을 확실히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간에 사랑의 징표를 주고받는 경우가 있지요. 이때 그 징표 안에 사랑이 담겨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징표를 보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느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마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로서 징표를 주고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람 역시 마음 중심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지만 이것을 징표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증함으로써 아버지와의 약속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고 결코 사라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시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시험하면서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가령 "하나님 이것만 응답해 주시면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하겠습니다." 한다든가 어떤 것을 결정함에 있어서 "일이 이렇게 되어지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가게를 팔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이 "하나님, 제가 일주일 동안 기도할 테니 그 안에 살 사람이 나오면 파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안에 살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안파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만약 이렇게 기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하나님을 이제 막 믿게 된 초신자나 진리를 잘 모르는 경우에는 이럴 수도 있습니다. 또한 기드온이 하나님의 뜻을 확증받기 위해 두 차례 하나님께 표적을 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확실한 증거를 구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말씀드리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속에 답을 정해 놓고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깨닫지를 못하고 있지요. 마가복음 11:24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믿음으로 일주일 동안 작정하여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증거를 구하는 것과 자기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4.흠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아브람
만약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이처럼 표증을 구하고 있는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지도 않으셨겠지요. 그러나 아브람은 의심하여 구한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9절에 아브람에게 보여주실 표증을 위해 그로 하여금 번제물을 준비케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 년된 암염소와 삼 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하셨지요.
여기서 삼 년된 암소와 삼 년된 암염소와 삼 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는 아브람의 전 재산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즉 이를 통해 아브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의미가 되지요. 그리고 삼 년이라는 것은 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은 생산을 의미하지요. 즉장차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업을 삼아 생산해 나감으로 그 땅으로 인해 축복받게 될 것에 대한 상징인 것입니다. 당시는 목축이 주 생업이었기 때문에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이 생산을 잘해서 불어나야 그것이 곧 축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아브람이 제물을 취함에 있어서 10절에 보면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했습니다.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은 중간을 쪼갰는데 새는 쪼개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에는 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의 중간을 쪼갰다는 것은 아브람과 아버지 하나님 사이의 약속을 정확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정확히 중간을 쪼개므로 어느 한편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하나님과의 정확한 약속을 의미하게 되지요.
반면에 새를 쪼개지 않은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브람 자신과의 관계가 상하(上下) 관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른 번제물은 그 중간을 쪼갬으로써 아버지 하나님과 아브람 자신 사이에 세운 약속이 상호 쌍방간에 이루어진 정확한 약속임을 나타내었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새는 쪼개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아브람 자신이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은 위요 자신은 그 밑에서 섬기는 자라고 하는 상하 질서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관계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번제물의 중간을 쪼갠다는 것은 마치 아버지 편의 것과 아브람 편의 것을 나누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이처럼 새는 나누지 않고 통으로 놓음으로써 모든 것이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1절에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말씀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의 약속을 그 누구도 깰 자가 없다는 의미이지요. 레위기 11:13에 보면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하여 솔개가 가증한 짐승임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처럼 가증한 짐승인 솔개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상징을 위해 준비한 번제물에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훼방하기 위한 원수 마귀 사단의 방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러한 솔개를 쫓음으로써 누구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훼방하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 여러분이 응답받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응답받기 위해 여러분 편에서는 하나님 앞에 할 도리를 다 했다 해도 원수 마귀 사단은 여러분이 쉽게 응답받도록 가만히 놔두려 하지를 않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아브람이 솔개를 쫓았듯이 여러분도 응답의 순간까지는 항상 깨어 있어서 원수 마귀 사단의 방해를 물리쳐야 합니다. 응답의 순간까지는 결코 방심하지 말고 늘 깨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아브람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번제물을 하나님 앞에 벌려놓는 것으로 자신의 할 바를 다했다 한 것이 아니라 17절에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불을 내려 번제물을 흠향하시기까지 깨어있어 번제물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5.꿈을 통해 앞일을 보게 된 아브람
이제 12절 말씀을 보면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은 하나님과 음성을 통해서 또는 이상을 통해서도 교통하는 체험들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꿈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체험이 기록되어 있지요. 동시에 13절부터는 꿈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깊이 잠든 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람에게 꿈으로 역사하심을 나타내 주지요. 그리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앞으로 그 후손들의 되어질 일들에 대해 보여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그의 후손들이 앞으로 헤쳐 나가야할 앞길이 결코 평탄치만은 않다는 것이었지요. 가깝게는 장차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될 것과 그 이후로도 그의 후손들에게 닥쳐올 역경의 순간들이 아브람의 꿈속에 펼쳐져 보였던 것입니다. 그 내용들이 밝고 평안한 것이 아니었기에 "캄캄함이 임하였다"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캄캄함이라는 단어에서도 느껴지듯이 아브람의 후손들이 장차 겪게 될 역경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꿈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마치 실제로 보는 것처럼 보여졌기에 그 내용들은 아브람에게 "심히 두려움"으로 찾아오게 되었지요.
하지만 아브람의 후손들이 겪게 될 역경을 결코 원수 마귀가 하나님보다 능력이 있어서 그처럼 역사해 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님의 주관하심 가운데 허락되는 일들이지요. 그러므로 원수 마귀 편에서는 자신들이 힘이 있어서 아브람의 후손들을 그처럼 역경으로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원수 마귀는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인 이스라엘을 영원한 사망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마지막에 다시 한 번 아버지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섭리가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그냥 사망으로 가게 놔두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회귀를 통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허락하시게 됩니다. 마지막 때를 위해 예비된 두 증인도 있는 것이구요.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불을 밝히는 역사가 그들 스스로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요. 바로 복음의 회귀를 이루게 될 성령의 불같은 역사가 그 땅에 베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하나 하나가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끝이 보여 오고 있으니 때가 얼마나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꿈으로 역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으로 역사하실 때는 아무에게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없고 아버지 하나님을 신실히 믿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꿈으로 역사하시게 되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를 좇아 자녀들에게 꿈으로 역사하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꿈을 통해 다가올 시험을 미리 알려 주시거나 기도의 응답에 대한 확증을 보여주시기도 하며 자신의 신앙 상태를 깨우쳐주시기도 하지요. 그러나 육신의 생각이 남아 있는 사람은 꿈속에서도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뜻을 정확히 분별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꿈으로 역사하시는 경우들도 많지만 그렇다 해서 모든 꿈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자신의 생각 속에 꾸는 꿈도 얼마든지 있고 때로는 원수 마귀 사단이 주는 꿈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꿈을 해석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하지요. 꿈의 내용을 말씀으로 비추어 잘 분별해야 하며 자신이 꾼 꿈이 정확히 맞는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이 온전히 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실히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꿈에 항상 자신의 생각이 들어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도 정확하게 꿈으로 역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어떤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시는 경우이지요. 예를 들어 본교회에 인도받아 오시는 분들 중에는 꿈에 저를 보거나 본교회를 보고 찾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들은 그 영혼을 본 교회로 이끄시려는 섭리가 있는 것이지요. 또는 외부 성도들 중에 본교회가 앞으로 짓게 될 대성전을 보신 분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제 삼자의 입술을 통해 본 제단에 주신 대성전 건축의 섭리를 다시 한 번 확증시켜주시는 섭리도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섭리가 있어서 꿈으로 역사하시는 경우가 있는 것이며 일반적으로는 각 사람의 믿음과 성령의 충만함 그리고 마음의 사모함 등 여러 가지가 종합되면서 꿈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받게 되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은 정확한 것이되 꿈을 꾸시는 분들 중에는 항상 자신의 꿈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지를 분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주셨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현실이 아닌 결과를 바라보는 믿음의 의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 믿음의 의가 약속의 씨인 이삭으로 나타난바 될 때까지 아브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변개하지 않았지요.
본 제단도 바로 이러한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변함없이 믿음의 길을 달려올 수가 있었습니다. 개척 때 주신 세계선교와 대성전 건축에 대한 말씀을 저를 비롯하여 개척 당시에 함께했던 분들 중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누구도 의심하거나 변개하지 않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던 사람 현실을 바라봤던 사람들은 떠나갔지만 개척 이래 지금까지 만민의 양 떼가 되신 분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현실이 아닌 결과를 바라보신 분들은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분명한 열매를 보고 계십니다. 지금에 와서 누가 세계를 이루는 것을 의심하겠고 대성전 건축을 의심하겠는지요? 아마 거의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이제는 눈에 본 듯이 손에 만진 듯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녕 여러분이 믿으신다면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신부 단장이며 온 영을 이루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의 의를 인정하셔서 그에게 약속의 씨인 이삭을 주실 때 먼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에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 말씀을 이루어주시기까지는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할 때를 기다리셨다는 말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의 의를 보시고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어주심에 있어서도 먼저는 완전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은 본교회에 주어진 사명이자 여러분이 새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한 숙제와도 같은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목자의 권능으로 이루어 가신다 말씀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도 새예루살렘으로 이끄시기 위해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에 함께 동참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는 만큼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에 함께 동참할 수가 있지요.
그러므로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은 여러분의 신부단장과 온 영을 이루는 것과도 서로 맞물려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 해서 모든 성도님들이 신부 단장을 마치고 온 영을 이룰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그릇들이 함께 동참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새예루살렘의 영광 중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육과 영이 더욱 확연히 구분되어지고 있는 이때에 새예루살렘을 소망하는 분이라면 신속히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녕히 영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어 지금까지 이루어 온 믿음의 의가 새예루살렘의 영광으로 열매맺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5:24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