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108)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아들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는 그로 인해 아들 함에 대해 저주를 하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저주의 대상이 가나안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곧 함과 그의 후손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지요.
본 론 /
1. 셈과 함과 야벳의 축복과 저주
창 9:18에 함을 가나안의 아비라 기록하고 있듯이 함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음에도 그를 특별히 가나안의 아비라고 기록한 것은 바로 함의 종족의 정통성을 장차 아들 가나안이 이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마치 여러 자녀들을 둔 아버지가 있다고 할 때 사람들이 대개는 장자의 이름을 들어서 "○○의 아버지"라 부르지만 그보다는 꼭 장자가 아니라 해도 자녀들 중에 아주 뛰어나거나 출세해서 가문을 대표하고 이어갈 만한 자녀가 있을 때는 오히려 그 자녀의 이름을 들어서 '누구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같지요.
함의 종족 역시 아들들 중에 가나안이 계보의 정통성을 이어 나갈 아들이었던 것이고 결국 이처럼 함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아들인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곧 함의 종족 전체에 대한 저주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저주로 인해 함의 종족은 영적으로는 물론이고 육의 질서상에 있어서도 형제들 중에 가장 낮은 위치에 처하고 말지요.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했으니 함의 종족은 장차 인류 역사에 있어서 다른 형제의 종족들과 비교할 때 종과 같은 위치에밖에 설 수 없게 됩니다. 인류 역사를 이끌어감에 있어서 주역의 위치에 서지 못한 채 다만 주변 인물로서밖에 역할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지요.
반면에 아들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장차 노아의 세 아들들을 통해 퍼져 나갈 후손들이 과연 서로 간에 어떤 질서 관계를 갖게 될지가 담겨 있지요.
셈에 대해서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할 만큼 보장과 축복이 주어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노아의 정통성을 아들 셈이 이어받게 된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야벳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말씀한대로 야벳 역시 많은 번영과 축복이 있을 것을 알 수가 있지요. 하지만 셈과 같이 정통성을 이어받은 하나의 주체로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이 다만 셈의 장막에 함께 거하면서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야벳이 비록 축복과 번영의 약속을 받아 창대하게 뻗어 나갈 수는 있지만 결국 야벳 역시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인류 역사의 중심에 있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마치 롯이 크게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삼촌인 아브라함 안에 거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가나안은 이러한 셈과 야벳의 종이 된다 했는데 이는 실제적으로 훗날 셈의 후예인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가나안 땅이 정복을 당하면서 이루어지지요. 당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가나안의 후예들이 차례로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그들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또한 함의 후손인 오늘날의 아프리카의 여러 종족들 역시 지난 역사 속에서 야벳의 후예인 유럽 종족에 의해 노예로서 많은 수난을 당해야 했지요.
하지만 가나안이 셈이나 야벳의 종이 된다는 데에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종이 된다는 의미와 함께 그의 후손들이 장차 척박함과 고통과 핍박 속에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의 아프리카 종족들의 대부분은 기아와 고통과 박해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한때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살았던 함의 후예들도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쫓겨나게 된 뒤로는 이스라엘에 의해 주도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통과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지요. 물론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에는 그들에 의해 오히려 이스라엘이 고통받을 때도 있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인간 경작의 역사에 있어서 함의 후손은 결코 주체가 될 수 없고 부수적인 역할밖에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종이란 지배를 당한다는 의미요 자기 것이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어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에 함의 후손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계속하여 그와 같은 입장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지요. 비록 영적인 권세 가운데는 아니라 해도 당시의 육적인 질서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받는 권세를 가지고 있던 노아의 한 마디가 이처럼 훗날 인류 역사의 흐름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의 경우를 통해서 권세라는 것이 그것을 소유하는 것보다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권세란 그것을 가진 사람에 의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선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남을 힘들게 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요. 권세가 진리 안에서 아름답게 사용된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며 기쁘게 하지만 비진리로 잘못 사용되어지면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고 고통 가운데 빠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잠 29:2에는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했는데 여러분 자신은 스스로를 생각할 때 여러분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즐거워하겠는지요? 아니면 백성이 탄식을 하겠는지요? 권세란 쥐고 휘두를 때가 아니라 오히려 섬김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때에 진정 그 가치가 아름답게 빛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된 권세를 가지셨으면서도 오직 섬김의 본을 보이셨던 예수님처럼, 여러분 역시 자신에게 주어지는 작은 권세라도 섬김을 위한 아름다운 도구로서 사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비진리의 길로 빠져 들어가는 함의 자손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은 함은 이후로 점점 더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근본에 내재된 육의 속성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주가 선포된 이후로는 그의 생각하는 것이 더욱더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르침과는 멀어져 갔던 것이지요. 이는 마치 어떤 자녀가 큰 잘못으로 인해 '자신은 이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자신의 앞날 역시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오히려 점점 더 부모님의 말씀도 안 듣게 되고 비진리의 길로 빠져 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 왕의 경우를 보아도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키려 하기보다는 변명하기에 급급했고 그 후로는 오히려 더 악하게 하나님의 뜻에 대적해 나갔던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오히려 그를 왕으로 기름 부었던 사무엘 선지자까지 사울이 두려워 피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함도 아버지인 노아로부터 저주의 말이 떨어지자 어떻게든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대적하는 쪽으로만 행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볼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입술을 통해 그러한 죄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가를 깨우쳐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때 그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이켜서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어떤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 가운데 '나는 이제 용서받을 수 없나 보다' '나에게는 저주가 임할꺼야' 이런 식으로 단정지어 버리고 말지요. 그러면서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는 자포자기하여 점점 더 깊은 죄 가운데로 빠져듭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일흔에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녕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죄를 지적하고 깨닫게 해 주셨을 때에 비록 지금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주님 앞에 너무나 민망하고 부끄러울지라도 다시금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의 마음을 느끼지 못할 때는 주님 앞에 다시 나아갈 힘조차 얻지 못한 채 스스로에 대해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함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물론 함에게 내려진 저주는 인간 경작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함이 좀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하나님 앞에 매달려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를 거두려 했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 노아의 마음을 풀어 드리기 위해 이전보다 훨씬 더 노력했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어찌하든 자신에게 내려진 아버지 노아의 저주를 거두려 했겠지요.
그러나 함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점점 아비 노아의 가르침에서 멀어져 갔고 이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지요. 함이 정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아버지 노아 앞에 나아가 회개했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마음씀을 갖느냐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보면 마 6:12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이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이 그러지를 못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짓고 나면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게 됩니다. '제가 이러 이러한 죄를 지었는데 아버지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러한 기도를 올릴 수 있으려면 바로 주기도문의 내용에서처럼 내가 먼저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 내가 혹여 싫어한 사람이나 미운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나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나는 내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마음에 조금이라도 선한 양심이 있다면 나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차마 기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은 설령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도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담대함이 주어지지요.
여기서 담대함이란 죄를 짓고도 떳떳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중심으로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에 반드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마음에서 분명히 믿기 때문에 오는 담대함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지은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마음에 확신이 올 수가 없지요. 자기 마음에 그러한 사랑이 임해있지 않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역시 자기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내 마음에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조금의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라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역시 마음에 와 닿기 때문에 비록 죄에 대해서는 민망하고 죄송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가 용서를 빌 수 있다는 말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자녀가 있다고 할 때에 이런 자녀는 부모 앞에 어떤 큰 잘못을 했을 경우 대부분 부모에게 털어놓으면서 용서를 구하지 못합니다. 이는 부모님이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 안에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러한 잘못을 했을 때에 그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임해 있지를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진하게 느끼는 자녀가 있다면 그는 설령 어떤 잘못을 했다 해도 부모에게 털어놓고 용서를 구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죄송하지만 자신의 부모님은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고 앞으로 더 잘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진 자녀라면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같은 잘못을 해도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내 마음에 용서의 마음이 있고 내 마음에 사랑의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용서의 마음에 대해서도 정녕 마음에서 느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3. 함의 후손, 니므롯
이렇게 저주받아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함과 이러한 함의 기질을 받고 태어난 후손들은 이후 삼, 사대에 이르며 많은 자손들로 퍼져 나가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엄청난 사건을 벌이고 맙니다. 바로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이지요.
이제 다음 시간부터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겠지만 함의 후손 중에 니므롯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통해 세워지는 나라가 창 10:10에 보면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했습니다. 바로 시날이라는 지명과 바벨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지요. 그런데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이 쌓여진 곳이 바로 시날 평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벨탑 사건이 함의 후손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가 있지요. 물론 바벨탑 사건에는 꼭 함의 후손만 관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일을 주동해 나간 것은 바로 함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함의 후손들은 저주받은 조상의 후손으로서 자신들이 저주받았다고 하는 열등감으로 인해 오히려 자기 족속들을 하나로 모아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하였지요. 자신들이 더 우등한 민족으로서 자신들을 중심으로 다른 민족들을 하나로 모아 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열등감을 만회하기 위해 어떻게든 힘을 모아 다른 민족들 위에 서고자 하는 악한 생각이 발동하게 되었던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까지 짓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11장에서 설명이 되겠지만 여기에 다른 형제의 후손으로부터 나온 민족들까지 함께 동참함으로 인해 인류의 언어가 갈라지면서 뿔뿔이 흩어져 퍼지는 인류 역사의 일대 전기(轉期)를 맞게 됩니다. 함의 후손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함의 후손 중에 앞서 말씀드린 니므롯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해 창 10:8에서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할 정도로 당시 니므롯이라는 존재는 매우 뛰어났고 이러한 니므롯이 있음으로 인해 함의 후손들은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지요.
또한 창 10:10-12에 보면 니므롯에 의해 여러 나라가 세워졌고 주변의 땅으로도 널리 진출해 나갔으며 레센이라고 하는 큰 성까지도 건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여러 조건들이 맞아떨어지면서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민족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지 삼, 사대에 이르렀을 즈음에 함의 후손들이 주동이 되어 바로 바벨탑을 건축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지요. '탑을 쌓는 일이 왜 그리 문제가 되었는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탑을 쌓는 자체가 아니라 탑을 쌓는 사람들의 마음과 목적입니다.
창 11:4에 보면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했던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11장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고 지금은 잠시 여러분이 궁금해하시는 인종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4. 노아의 세 아들로 인한 인종의 변화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크게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이 있는데 이것도 결국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 아들들로부터 각각 어떤 인종이 나온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노아가 저주하면서부터 그의 세 아들들로부터 인종이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저주받은 함의 후손이 흑인종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 말이 맞다 해도 저주받은 순간부터 곧바로 인종이 나누어진 것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각각의 세 아들들에게 전해진 기질과 장차 그들이 정착해 살아가게 될 토양의 기질 이 두 가지 요소에 따라 점점 인종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게 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기질이라는 것이 꼭 성품적인 면에서의 기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외모나 형태적인 기질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함의 후손이 가지고 태어난 이러한 기질적인 요소와 그들이 정착하여 살아가게 될 아프리카라는 땅의 토질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지면서 점차 세월이 지남에 따라 검은 피부를 가진 인종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다른 형제의 후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야벳의 후손들이 받고 태어난 기질적인 요소와 그들이 정착하게 된 유럽이라는 땅의 토질적인 요소가 결합하여 지금 유럽에 사는 사람들의 인종이 나오게 되지요.
물론 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주변의 여러 환경이나 먹는 음식 등에 의해 같은 백인종 안에서도 더욱 세분화되어 다양한 외모와 형태를 가진 종족들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이구요. 인종이나 바벨탑에 대한 내용은 앞으로 창세기 10, 11장에서 다시 한 번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것입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홍수 후에 노아는 삼백오십 년을 더 살다가 구백오십 세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홍수가 있기 전,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홍수의 심판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었던 노아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그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 노아의 마음에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후회였습니다.
홍수 전 600년이라는 세월을 사는 동안 어찌 보면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고 동행하며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었지만 홍수 후 350년이라는 세월을 사는 동안은 하나님 앞에 그리 담대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근본 육의 속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악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온전히 해결하지 못했던 노아는 이제 생을 마감하며 스스로를 돌아볼 때에 하나님 앞에 떳떳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홍수 전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였으며 새로운 인간경작의 출발점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3천층의 영광으로 만족해야 했지요. 그가 비록 심한 악의 모양을 발하거나 육체의 일 가운데 어떤 모습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생을 마감하는 순간 하나님 앞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다 버렸다고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구약시대에 있던 자로서 그만큼이라도 이루었다는 점으로 인해 3천층이라는 영광이 주어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3천층도 노아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다란 영광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아담에 비유하면 얼마나 참 대단한 영광의 자리입니까?
성도 여러분, '노아와 같은 분이라면 당연히 새예루살렘에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가 이 땅에서 아무리 중요한 사명을 감당했고 또 평생을 바쳐 헌신하며 수고했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편에서 원하시는 만큼의 분량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새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서 온전한 성결과 온집에 충성함을 이루어야 하지요. 넘치게 수고하며 충성했다 해도 온전한 성결을 이루지 못했다면 새예루살렘은 물론이고 3천층에 들어가기도 힘듭니다.
그러므로 정녕 새예루살렘을 소망하는 분들이라면 발견되어지는 근본 육의 속성까지도 온전히 빼내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온집에 충성해 나가시구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예루살렘의 자녀된 자격에 이르심으로 빛난 영광 중에 영원토록 거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8-05-07 오전 11:59:39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