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99)
서 론 /
창세기 8장에는 홍수 후에 그 많던 물이 어떻게 감하여졌고 또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로부터 나오기까지 어떤 과정들을 거쳤는지 설명되고 있습니다.
노아의 나이 육백 세 되던 해 2월 17일에 시작된 홍수는 40일 동안 비가 온 후에 멈추었으나 물은 150일 동안 땅에 창일하였지요.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무르게 되면서 물이 점점 감하여져 갔고 10월 1일에 드디어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게 됩니다. 그로부터 다시 40일이 지난 후에 노아는 까마귀를 내어놓으므로 물이 얼마나 감하였는지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 후에 물이 완전히 걷힌 것을 확인하기까지는 7일 간격으로 세 차례에 걸쳐 비둘기를 날려보냈지요. 그래서 노아의 나이 육백일 년 1월 1일이 되었을 때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제치고 지면에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그 후로도 57일을 더 기다려 2월 27일이 되어서야 땅이 마르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방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비가 시작된 날로부터는 장장 375일, 방주에 들어간 날부터는 382일이라는 기나긴 방주의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지요.
오늘은 물이 감하는 과정에 담긴 영적인 의미와 노아가 물이 감한 여부를 알기 위해 날려보냈던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깨우침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 론 /
1. 노아의 홍수 이후 단계적으로 물을 감하신 이유
본문 3절에 보면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일 후에 감하였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단번에 물이 물러가고 감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물러가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역사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도 스스로가 정해 놓으신 질서와 법칙을 좇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홍수의 심판과 함께 그동안 하나님께서 둘러 놓으셨던 빛이 사라지면서 근본된 육의 속성들이 드러나게 되지요. 그 동안은 빛에 둘린 상태에서 영의 흐름과 법칙에 적용을 받았지만 이제는 육의 흐름에 따른 육의 질서와 법칙에 적용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때부터 육의 질서와 법칙에 맞추어 역사해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육의 질서와 법칙을 좇는 것과 물을 단계적으로 감하게 하시는 것과는 과연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방주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이 땅에서는 새로운 인간 경작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땅에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환경이 준비되어야 하지요. 온통 홍수로 덮였던 이 땅에서 물만 거두어낸다고 해서 당장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홍수로 집이 잠겼다고 할 때에 물만 빼낸다고 해서 사람이 당장에 그 집에 들어가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 땅도 물이 거두어진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 번에 물을 다 사라지게 하시고 아직 준비되지 않은 세상에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내어 보내신 것이 아니라,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방주에서 나올 때쯤에는 사람이 살아가기에 가장 알맞은 환경으로 이 땅이 갖추어질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물을 감하게 하시면서 그 준비를 해 나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도 하루하루 날짜에 맞추어 창조의 사역들을 이루어 가셨던 것처럼 홍수 후에도 물이 감하는 속도에 맞추어 이 땅에 다시금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모든 환경을 조성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육의 질서와 법칙에 따라 이루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순간에 물을 거두시고 또한 순간에 모든 환경을 만드실 수 있으시지만 이 땅에서 영적인 빛이 거두어지고 육의 질서와 법칙에 적용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육의 질서와 법칙에 따라 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필요한 기간이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만약 아버지 하나님께서 단번에 물을 거두시고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방주에서 나오도록 하셨다면 어떤 상황이 되었을까요? 이 땅은 노아와 그의 식구들 그리고 방주에 탔던 수많은 짐승들이 나와서 당장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준비되지 않은 황폐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물이 거두어지면서 그 동안 물에 잠겨있던 식물이나 나무들이 드러나기는 했겠지만 사람이나 짐승들이 당장 그것들로부터 어떠한 유익을 얻을만한 상태가 아니었겠지요.
그러니 노아와 그의 식구들에게 있어서는 방주로부터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방주에서 나왔을 때 이 땅이 그들이 살아가기에 알맞은 상태로 준비되는 것이 더 중요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육의 법칙에 맞추어 이러한 환경을 차곡차곡 준비해 주시려고 물을 단번에 다 거두시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단계적으로 거두시면서 인간 경작의 새로운 환경을 조성해 가신 것이지요. 그러했기에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이 방주로부터 나왔을 때는 큰 어려움 없이 이 땅에서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섬세하게 모든 것을 섭리하셨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얼마나 철저히 지키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홍수 이후에 본격적인 인간 경작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모든 것이 육의 질서와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그 어떠한 것도 단번에 하실 수가 있지만 그렇다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육의 질서와 법칙을 무시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공의에 맞게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거의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었다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치료받은 김은득 권사님의 경우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단 번에 온전케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순간에도 치료하실 수가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권사님을 치료하실 때에 물론 그 기간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그래도 시간 간격을 두고 단계적으로 치료해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몸속에 핏줄과 힘줄부터 만들어 가시면서 점차 피부까지 온전케 해 가셨던 것이지요.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어 자랄 때도 처음에는 핏줄들이 만들어지면서 신경과 근육 등을 비롯한 내부 기관들이 만들어지고 점차 겉의 피부가 입혀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의 질서와 법칙을 좇아 역사하시는 과정입니다.
이는 물질의 축복을 주실 때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의 소유주가 되시지만 누군가를 축복해 주실 때 단 번에 하늘에서 돈벼락을 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축복받을 그릇을 만들게 하신 후에 주시는데 그것도 심은 대로 행한 대로 갚아 주시지요. 또한 주실 때도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실 분의 마음을 미리 주관하셔서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 스스로도 육의 질서에 맞추어 공의 가운데 역사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창조의 근본된 소리가 100% 발해지게 되면 상황이 좀 달라지지요. 그때는 온전한 영의 차원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육의 질서와 법칙을 벗어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전에는 하늘에 덮인 먹장 구름을 거두려면 육의 질서와 법칙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 그 구름을 거둬내야 했지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구름이 걷히기까지는 몇 분 정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근본의 소리를 100% 발하게 되면 육의 질서와 법칙에 상관없이 순간에도 먹장구름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육의 질서와 법칙을 뛰어넘는 수많은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창조의 근본된 소리를 100% 듣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언제든지 역사가 일어나게 되지요.
2. 새를 통해 물이 감한 여부를 알게 하신 이유
우리가 다음으로 살펴볼 영적인 의미는 노아가 물이 감한 여부를 알기 위해 새를 날려보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물이 다 마른 후에 노아에게 "이제 물이 다 말랐으니 나가라" 하신 것이 아니라 노아 스스로가 새를 통해 물이 감한 여부를 확인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에는 행함이 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 사람 편에서 행할 바와 도리를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믿음이라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경작을 받는 목적은 자유의지 가운데 마음 중심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참된 자녀로 나와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시고 사람 편에서는 할 일이 없다면 목적한 인간 경작이 이루어질 수가 없지요.
비유를 들어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는데 그 자녀가 힘들다해서 학교 숙제도 대신 다 해주고 공부도 대신 해 준다면 자녀가 학교에 다닐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자녀가 당장에는 좀 힘들다해도 스스로 숙제도 하고 공부도 해서 실력을 쌓는 것이 자녀가 학교에 다니는 목적이며 그것을 통해 자녀도 더 능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물론 그 과정에서 부모로서 자녀에게 힘도 북돋아 주고,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결국은 자녀 스스로가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경작도 이와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라 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대신 해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 편에서 당연히 해야 할 것과 도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있다면 이는 경작을 제대로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참된 자녀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홍수가 끝난 후에 시작될 본격적인 인간 경작이 바로 이런 것임을 노아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때부터 노아 스스로가 순종의 행함 가운데 나와지도록 이끌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노아는 그 전에도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행하는 사람이었지만 홍수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상황 속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차원이었습니다. 방주를 만드는 것도 일일이 어떻게 할지를 다 알려주시면서 이끌어 가셨고 짐승들을 방주에 태울 때도 하나님께서 친히 짐승들을 불러 주셨지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방주에 태우실 때도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하여 강권적으로 주관해 가셨던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각 상황에 맞게 스스로가 행할 바를 행해나가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 경작을 이루심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나가시고 사람 편에서는 그냥 거기에 따라만 갔다면 이것이 어찌 참된 경작이 되겠습니까? 믿음이 왜 필요하겠고 기도가 왜 필요하겠는지요? 그러나 인간 경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따른 스스로의 행함이 필요한 것이고 사람 편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행함도 있어야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칠 때에 하나님께서는 굳이 백성들로 하여금 성 주위를 돌도록 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취하라" 하셨다면 그것이 백성들에게 믿음이 될 수가 없지요.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도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멘 사람들이 강물에 발을 내딛기 전에라도 얼마든지 강의 흐름을 멈추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단강도 하나님께서 미리 멈추게 하시고 "이제 건너라" 하셨다면 이 역시 그들에게 믿음이 될 수 없지요. 하나님께서 명하시자 그것을 믿고 행했을 때 그에 따른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므로 이것이 참 믿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된 자에게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신 것도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지 못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을 요구하신 것이고 순종의 행함이 나왔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사람 편에서 할 바를 행함으로 나타냈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는 것이지요. 약 2:22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러한 영적인 의미를 깨우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다면 당연히 기도하고 심고 행할 때라야 그것이 곧 믿음이요 그 믿음에 따라 역사 되어진다는 사실을 마음에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노아 홍수 이후로는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주시기 위함입니다.
노아는 홍수 전까지 아버지 하나님과 많은 것을 교통하며 듣고 깨우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홍수 이후로 빛이 거두어지고 육의 근본 속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전처럼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지요. 그렇다해서 전에는 육의 근본 속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빛에 둘린 상태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눌려 있으므로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방해를 주지 않았으나 이제 육의 근본 속성들이 드러나게 되면서는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거두어지고 육으로 돌아와 완전히 인간 경작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는 바로 홍수 이후에 어떤 일들이 노아를 통해 일어납니까? 포도주에 만취되어 벌거벗고 자고, 자녀에게 옳지 않은 행실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노아가 함을 저주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나지요. 이와 같이 빛이 있음과 없음으로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이라면 과연 아들 함에게 어떻게 했을까요? 그때는 노아가 아들을 저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빛이 거두워짐으로 근본의 악이 나오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 함을 저주해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정확하신 뜻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 편에서도 행함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쉽게 교통할 수가 있었다면 이제는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 그만큼 애쓰고 힘써 교통하는 길을 뚫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노아도 물이 감하고 말라 가는 상황에 대해 물론 어느 정도 짐작하며 알 수 있었지만, 이처럼 새를 내어 보냄으로 인해 더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3. 까마귀와 비둘기 두 종류의 새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교훈
그런데 노아는 방주 밖으로 내어놓을 새를 선택함에 있어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택했습니다. 처음에는 까마귀를 내어놓았는데 7절에 보면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했지요. 하지만 까마귀는 이처럼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음에도 끝내 노아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온 것은 까마귀가 아니라 바로 비둘기였지요. 노아가 새를 내어놓은 이유는 땅이 마르고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얻고자 함이었는데 까마귀는 그 소식을 가져오지 못했으나 비둘기는 노아가 원하는 소식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처음 보낸 비둘기는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그냥 돌아왔지만 두 번째 보낸 비둘기는 감람 새 잎사귀를 가져오므로 물이 감한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고 세 번째 보낸 비둘기는 아예 돌아오지 않았지요. 즉 두 번째 비둘기를 보냈을 때는 비록 물 밖으로 나무가 드러나고 새 잎사귀가 돋아났을지라도 아직은 비둘기가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이 안되었지만 세 번째 비둘기를 보냈을 때는 방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될 만큼 살아가기에 충분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노아는 비둘기를 통해서 방주 밖의 세상에 대해 원하는 바를 알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까마귀와 비둘기 이 두 종류의 새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떤 일을 지시했을 때 그것에 순종해 나오는 모습에도 각 사람마다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시킨 것만 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시킨 것 이상으로 해내는 사람도 있지요. 물론 어떤 경우든 순종하지 않는 사람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일을 시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단지 시킨 것만 해내는 사람보다는 시킨 것 이상을 해내는 사람을 더욱 마음에 기뻐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시킨 것 이상을 해내는 사람을 보실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감동을 받으시며 넘치게 축복하시고 사랑을 표현해 주시지요. 어찌하면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마음에 축복 줄 수 있는 기회만을 보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순종의 행함의 차이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바로 그릇의 차이요 토질의 차이입니다. 똑같은 씨를 심어도 토질에 따라 각각 열매 맺는 것이 다른 것처럼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토질에 따라 각각 나와지는 순종의 행함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려 순종하느냐에서 오는 차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그 이상을 순종해 드리고 싶어도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그렇게 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은 시킨 것은 물론이고 그 말씀에 담긴 깊은 속마음까지 헤아리므로 시키지 않은 것까지도 이루어 드리게 됩니다. 잠 25:13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는 말씀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릴 수가 있는 것이며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바로 이런 사람을 찾으시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도 헤아려 순종할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고전 2:10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의 밝은 음성과 주관과 인도를 받을 때만이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 헤아릴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마음 안에 진리로 일군만큼 영의 마음을 이룬 만큼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순종이 나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까마귀와 비둘기의 모습을 통해 과연 여러분 자신은 얼마나 순종하고 있고 또 얼마나 순종 이상으로 마음을 헤아려 이루고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신속히 뜻을 헤아려 순종하는 단계인 순복(順服)의 차원에 이르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충성된 사자와 같은 영적 장수들로 나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라 하여 임의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정해 놓으신 공의의 법칙에 맞게 모든 것을 역사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공의의 법칙을 알아야 하지요. 무조건 "주세요" 한다고 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할 때 주시는지를 알아서 그에 맞게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 원하는 분은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되고,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시는 분은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시면 됩니다. 물론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무엇인지도 영적으로 바로 알아야 하겠지만 여러분이 그것을 바로 알아서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여러분을 사랑해주시고 만나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 안에서 역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지요.
자녀를 사랑한다해서 무조건 '오냐 오냐' 하고 키우거나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준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사랑이 아닌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을 베푸실 때 무조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수 있는 온전한 모습으로 만들어 가시면서 그에 맞게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때로 잘못했을 때는 책망도 하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징계를 해서라도 바른 길로 인도해 가시는 것이 공의 안에서 역사해 가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참 사랑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처럼 항상 좋은 것 주기 원하시고 좋은 천국으로 인도하기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날마다 느끼며 한없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오늘도 급속한 영의 물결 속에 힘차게 달려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5-04-30 오후 1:24:02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