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81)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앞을 떠난 가인이 정착한 놋 땅을 왜 에덴 동편이라고 표현했는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실제로 놋 땅이 둘째 하늘에 있는 에덴의 동편에 위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담이 처음 이 땅에 내려와 정착한 곳을 기준으로 동편을 에덴 동편이라고 표현한 것이라 했지요.
그러므로 아담이 처음 정착한 곳을 기준으로 해서 에덴 동편과 에덴 서편으로 나누었다는 것은 아담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살던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에 그곳의 이름을 옛날 자신들이 살던 고향 이름을 따라 짓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이처럼 에덴 동편이라는 것은 어디로부터 온 사람들인지를 나타냄과 동시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론
1. 아담이 정착하여 살았던 곳을 기준으로 나눈 에덴 동편의 놋땅
그렇다면 실제 아담이 이 땅에 내려와 정착하게 된 장소는 오늘날의 어디였을까요? 바로 이스라엘 지역이었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민족이 거하게 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으며 인류의 구세주되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땅이었지요.
이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정확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작 아담 자신이 살기 원했던 곳은 이곳 이스라엘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담이 처음 정착한 곳은 에덴과 연결되는 영계의 통로가 있는 곳으로서 아담도 이곳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곳에 살면서 늘 에덴을 마음에 둘 수가 있었지만 그가 정말 마음에서 살기 원했던 곳은 다른 곳이었는데 과연 어디였을까요?
이미 창세기 강해를 통해 아담이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을 다스리던 당시 그가 이 땅에 내려올 때마다 즐겨 찾던 곳이 있었다고 말씀드렸는데 바로 지금의 이집트 지역입니다. 아담은 바로 그곳에서 살기 원했지요. 예전의 이집트 지역은 오늘날과 달리 아담이 즐겨 찾을 만큼 매우 아름답고 이국적인 향취가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둘째 하늘에 있는 에덴 동산은 이 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임에도 아담은 이곳 이집트 지역을 좋아했지요.
물론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는 이 땅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웠는데 아담은 피라미드를 세울 장소로 이집트 지역을 택했던 것입니다. 피라미드는 아담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과 함께 이 땅이 자신의 지배 하에 있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로서 아담은 이러한 피라미드를 이 땅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곳에 세웠습니다. 그러니 아담이 이 땅으로 쫓겨와 살게 되었을 때에 가장 살고싶어하던 곳이 어디였겠습니까?
아담이 이 땅에 내려와 평생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며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 땅에서는 바로 지금의 이집트 지역을 동경했지요. 그러나 아담이 원한다고 해서 그대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를 짓고 유배당하는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담은 이집트 땅에 갈 수는 없었지요. 비록 자신이 살고 있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평생 그곳에 가지 못한 채 그리워하고만 살았던 것입니다.
당시는 아직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므로 아담이 이 땅에서 낳은 후손들도 처음 아담이 정착했던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는 곳에 퍼져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점점 사람들이 번성해 가면서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 갔지요.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들이 주로 이스라엘 주변에 둘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인이 정착한 에덴 동편의 놋 땅도 지금의 이스라엘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가인의 후손들과 문명의 시작
가인은 이곳에서 아내를 얻어 아들 에녹을 낳았고 본문 18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가인의 계보가 시작되었지요. 그렇지만 가인을 통한 계보가 장차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정통 계보는 아닙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장차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게 되고 구세주되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정통 계보는 아담이 130세에 낳은 아들 셋을 통해 이어지지요.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죄가 관영함으로 노아 때에 이르러 모든 사람을 물로 심판하시고 노아와 그 가족들로 새롭게 인류를 시작해 가시지만 노아도 바로 아담의 아들 중에 셋을 통해 이어진 계보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장차 노아의 홍수를 통해 그 계보 자체가 끊어져 사라지고 마는 가인의 계보에 대해서까지 이처럼 성경에 자세히 기록해 놓으신 것일까요? 성경에 이유 없이 기록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계보에 대한 기록을 통해 당시의 인간이 어떻게 이 땅에 퍼져나갔고 또 어떻게 문명을 이루어가게 되는지 그 과정을 알려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에 대해 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절을 보면 각대에 한 사람의 이름씩만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꼭 자녀가 한 명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처음 이 땅에 퍼져나가기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자녀를 낳았지요. 다만 그 중에서 가문의 대를 이어갈 자녀 한 사람의 이름만을 기록해 놓은 것뿐입니다. 그 이름은 주로 장자권을 가진 아들이거나 만약 장자가 대를 이어가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자녀들 중에서 대를 이를 자녀의 이름이 기록되었지요. 따라서 가인의 5대 손인 라멕까지는 각 대에 한 사람의 이름씩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급속한 속도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이 땅에 충만해져 갔는데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19절에 기록된 대로 당시 라멕에게 아내가 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명의 아내를 통해 자손이 번성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지요. 그런데 라멕의 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대에서와는 달리 비교적 상세하게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0-22절을 보면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라멕의 대에 이르러서 특별히 그의 자녀들과 생업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기록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라멕의 대를 기점으로 해서 인류 역사의 새로운 큰 획을 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삶이 안정되면서부터 비로소 문명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아담 때부터 전수되어진 많은 지식과 지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활용할만한 기반이 마련되지 않았었는데 라멕의 대에 이르러서야 그들이 지닌 지식과 지혜를 펼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여러분에게 동철을 가지고 농기구를 만들 수 있는 지식이 있다고 해서 당장에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먼저 땅에서 동철을 캐내야 하고 그것을 녹이거나 가공해야 농기구를 만들 수가 있지요. 그러려면 그만큼 많은 인력도 필요할 것이고 연장이나 도구들도 필요하겠지요. 바로 이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지기 위해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것이 라멕의 대에 이르러 갖추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라멕의 아들들의 대에 이르러서는 일이 분업화되고 더욱 문명의 기반이 잡혀졌지요. 라멕의 아들들 중에 야발은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아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바로 라멕의 아들 중에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수금과 퉁소를 잡는 사람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유흥 문화가 있었음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이처럼 유흥 문화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만약 먹고 사는 것이 급박한 상황이었다면 그런 와중에 수금과 퉁소를 가지고 나름대로의 유흥 문화를 즐길 만한 여유가 없었겠지요. 더욱이 이러한 유흥 문화가 생겨남으로 인해 비로소 문명이라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라멕의 아들 중 두발가인은 동철로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는데 이는 이미 당시에 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이나 철기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르치는 지식으로는 인류가 수백만 년 이상 석기 시대를 거쳤다고 말하지요. 그러다가 약 BC 3, 4000년부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상고해 볼 때에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석기 시대의 생활을 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그리고 철기 시대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이 땅에 살기 시작한지 그리 오래지 않아 이미 청동기 시대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인류가 오랜 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미개인으로부터 점차 진화된 것이 아니라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전해 받은 지식을 바탕으로 짧은 시간 동안에 발전해 왔음을 말해 줍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라멕과 그 아들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놓으심으로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인류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3. 인간경작을 위해 가인에게도 기회를 주신 하나님
가인을 통해서 시작된 계보는 라멕과 그의 자녀들의 대에 이르렀을 즈음 부락이나 마을 이상의 큰 집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인간 경작을 위한 환경이 어떻게 마련되어 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경기를 한다면 한쪽 팀 선수만으로는 안되고 서로 상대하며 경쟁해 줄 팀이 있어야 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경작을 위해서도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만약 구약 시대에 이 땅에 살던 모든 사람이 전부 하나님을 믿는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뿐이었다면 인간 경작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 이방 민족들도 있음으로 해서 그들과의 관계 속에 인간 경작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지요.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는 이방 민족들로부터 지켜 주시고 오히려 그들을 지배하며 다스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들어 사용하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역사해 가셨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7:14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말씀한 대로이지요.
이처럼 인간 경작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 이외에도 다른 민족들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아들 셋을 통해서만 정통 계보가 이어지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가인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퍼져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이런 저런 형태로 경작을 받아 나갔던 것입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요.
오늘날도 이 땅에는 주님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이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고 있지요. 이 세상에 모두 주님을 믿는 사람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렇게 되면 참다운 인간 경작이 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목표는 디모데전서 2:4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한 대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핍박도 받고 시험도 당하면서 더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곧 인간 경작이며 다 양들만 있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 속에 염소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더 깨어 신앙 생활할 수 있는 것이고 더욱 믿음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 해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아담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 놓으신 것은 아닙니다.
비록 가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해도 그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사람이었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지요. 룻은 비록 모압 여인으로서 이방인이었지만 시어머니에 대한 도리를 다할 뿐만 아니라 룻기 1:16에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예수님의 계보에까지 오르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렀으며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이냐 하나님의 선민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범죄한 가인이라 해서 그와 그 후손들을 그냥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인간 경작의 한 분야로서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4. 가인의 후손 중에 또 다시 살인죄를 범한 라멕
이어지는 23-24절을 보면 가인의 후손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하나님과 멀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가인의 살인 사건이후 성경에 다시 살인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단순한 살인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은 아내들을 불러 말하기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했으니 사람을 죽이게 된 이유가 상대방이 먼저 자신을 상하게 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싸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그 규모가 적었지만 서로 싸우는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6, 7세대밖에 지나지 않은 때로서 모두가 한 핏줄을 이어받은 가까운 혈육지간이었지만 사람들은 이미 나름대로 소규모의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영역과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싸우며 상대를 죽이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지요. 만일 진리의 마음이었다면 서로 돕고 협력하며 살아갔을 텐데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원수 마귀 사단의 지시를 받는 비진리의 마음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멕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말하고 있습니다. 라멕 스스로가 고백한 대로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해도 사람을 죽인 것이 떳떳할 수는 없지요. 오늘날처럼 악한 세대는 아니기 때문에 설령 싸움을 한다해도 상대를 위협하거나 상처를 입혀 쫓아 버리는 정도라면 이해가 되지만 사람을 죽이는 상황이 발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라멕의 이런 행동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지탄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어린 소년까지 죽일 수 있어" 하며 그의 행동에 대해 비난의 소리가 나올 수 있었지요. 라멕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가책을 받고 있었기에 아내들을 모아 놓고 당시의 위험한 상황을 설명하며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멕이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말한 것은 그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는 하나님께서 두려워 떠는 가인에게 죽음을 면할 수 있는 표를 주시면서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벌이 칠 배로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가인을 해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 만약 가인을 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벌을 일곱 배나 더하시겠다는 말씀이었지요. 하지만 라멕은 스스로 자기를 위하여 벌이 칠십 칠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누군가 만약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칠십 칠배나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이처럼 라멕은 스스로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일종의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사람을 죽인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이전의 조상 가인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임의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도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임의로 변질시키거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대를 힘들게 하며 저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랫사람이 자기 말에 따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앞뒤 다 자르고 "윗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시험을 만나게 된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잠언 26:2에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물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변질시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며 오히려 그 자신에게 화가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라멕은 자신에게 해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변질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한 대로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변형시켜서는 안 됩니다. 혹여라도 말씀을 손상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 역시 함부로 다루어서도 안 되지요.
다음 시간에는 아담의 계보가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사람들의 수명이 900세 정도였을 때에는 사람들의 성장 속도나 성장 단계 등이 오늘날의 사람들과 어떻게 달랐는지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결론
라멕은 상대가 먼저 자신에게 해를 입혔음으로 죽인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물론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나라와 가족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상대를 죽이게 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설령 어쩔 수 없이 상대를 죽였다 해도 마음이 선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변명하기보다는 너무나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라멕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변질시켜 자신을 정당화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지요.
이러한 라멕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혹여 누구인가 나에게 해를 입히면 몇 배로 갚아 주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남이 나의 것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런 저런 술수를 쓰지는 않았는가?' '상대에게 손해를 입히고 해를 주었음에도 오히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 하지는 않았는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5:39-44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어찌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주시지 않으시겠으며 축복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동안 이런 마음이 되지 못하셨던 분들은 회개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안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8-05-07 오전 11:58:50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