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66)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17:1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구세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말씀하신 후에 이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연단하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연단의 시간이 필요했고 이제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4라는 숫자에는 영적으로 고난의 의미가 담겨 있지요. 이 시간 동안 우리에게는 마치 험한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 듯한 때도 있었고 사방이 안개로 뒤덮여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 같은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나타내 주시는 권능은 날로 더해만 왔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확실한 권능의 증거를 보면서 마음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연단의 시간을 통과해 오신 분들은 분명 영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요동함이 있었고 이런 저런 충만하지 못한 모습들이 있었다면 이는 자신이 아직 영과는 얼마나 멀리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이란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도 상관없이 결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영으로 변화된 자녀를 원하시며 어떤 환경에서도 또한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오늘도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해서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고 말았는지를 들으심으로 사단의 어떠한 미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온전한 영의 사람들로 신속히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본문 1절 후반절에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했는데 이때 뱀이 왜 여자에게 접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설명 드렸습니다.
당시 모든 만물의 지배자로서 엄청난 권세와 위엄을 가지고 있던 아담 앞에 뱀이 감히 직접 나와서 그를 미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요. 물론 사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담이었지만 뱀이 아담 앞에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거니와 말할 수 있다 해도 아담이 그리 쉽게 미혹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단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아담을 미혹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사랑받는 여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미혹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지요.
1.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에게 접근한 뱀은 "너희더러"라는 표현을 쓰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라고 말함으로써 그 대상이 여자만이 아니라 아담도 함께 겨냥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결국은 아담을 함께 끌어넣으려 한다는 것이 이 말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또한 뱀이 너희라고 말을 했다는 것은 뱀이 이미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하신 것이 여자에게만이 아니라 아담에게조차도 금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지요.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뱀은 너희라고 질문함으로써 여자가 자기의 질문에 대해 어떠한 대답을 했을 때에 그 대답이 여자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아담도 같은 생각이라는 의미가 되어 버리도록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질문의 대상에 아담까지 포함시켜 놓았기 때문에 여자의 대답이 곧 아담과 여자 두 사람의 공동 입장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자는 뱀의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질문에 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가끔 이와 비슷한 상황들을 보게 되는데 제가 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마치 제가 한 것처럼 말하는 경우이지요. 자기 마음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와 대화하면서 어떻게든 제 입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답이 나오도록 상황을 만들어가려 하는 것입니다. 저야 물론 그 속마음을 알기에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거나 제 의중을 간접적으로 비추어 줍니다. 그러나 상대는 여전히 자기 의견만을 내세우다가 나중에 보면 "당회장님도 허락하셨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게 되지요. 또 어떤 경우는 자기 개인의 의견을 마치 전체의 의견인 양 확대하여 말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전체의 의견을 한 개인의 의견인 양 좁혀서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어 가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진실하지 못한 모습이지요. 지금 뱀도 바로 이러한 점을 노려서 결국 여자의 대답으로 인해 아담까지도 함께 올무에 걸리도록 하려고 이처럼 단어 하나까지도 교묘하게 사용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뱀이 여자에게 질문을 하면서 "참으로"라는 단어를 넣었다는 점입니다. "참으로"라는 말은 흔히 강조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전혀 그런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지요. 이 말 안에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서로 대화 중에 상대에게 "그것 진짜 정말이야?" 하고 되묻는 경우가 있지요. 그렇다면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까? 상대의 말이 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의미도 있지만 상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함께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냥 "그것 정말이야?" 해도 되는 것을 진짜라는 수식어까지 사용하면서 묻는 것은 "네 말을 믿기가 좀 어려운데"라고 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뱀은 "참으로"라는 단어를 넣어 질문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부인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여자로 하여금 마음에 혼란을 일으키도록 만들려는 것이지요.
만일 여러분이 이것은 100% 맞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실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여러분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그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상대가 묻기를 "그것 진짜로 맞아요?"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것 정말인가요? 확실히 진짜예요?" 이렇게 반복해서 되물어 오는 것이지요. 자신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 오던 사실에 대해 상대가 이처럼 의외의 반응을 계속 보이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은 잠시 움츠러들게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맞는 것인가? 혹시 내가 그 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게 되지요. 그래서 마침내는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뱀도 바로 이런 효과를 노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이런 뱀의 속임수에 넘어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말지요.
진실된 사람은 말을 할 때에 "참, 진짜" 이런 단어들이 필요 없습니다. 만약 상대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도 "진짜 사랑합니다." 이런 식의 말이 필요 없지요. 그냥 "사랑합니다." 이 한 마디로 족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은 그 자체로 진실하기 때문에 굳이 거기에 또다시 참이니 정말이니 이런 수식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물론 때에 따라서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처럼 강조를 위한 방법으로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앞에 항상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뱀이 "참으로"라고 말한 것은 결코 강조나 긍정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사용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말은 "모든"이라는 단어입니다. 뱀은 여자에게 물을 때 "하나님께서 너희더러 선악과를 먹지 말라더냐" 하고 물은 것은 아니라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고 물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2:16-17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동산의 다른 실과들은 다 허락하시고 오직 선악과만을 금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뱀도 물론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뱀은 여자에게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고 물었지요.
이는 곧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여자의 마음을 한 번 흔들어 보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미끼를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여자는 이런 식으로 질문을 받았을 때 잠시 경계심을 늦추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었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이처럼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고 물으니 "그것은 아닌데"라는 대답이 나오게 된다는 말이지요. 질문의 핵심을 교묘하게 피해서 여자로 하여금 부정적인 대답을 하도록 유도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도록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와 엄마가 수영장에 놀러갔는데 엄마가 아이에게 "깊은 데 들어가면 안 된다." 하고 단단히 경계를 해 두었습니다. 이 아이는 엄마의 말씀에 순종해서 깊은 곳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지요.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아이를 미혹해서 깊은 데 들어가도록 만들려고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때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우리 깊은 데 들어가서 놀자."하면 아이가 말을 듣겠습니까? "우리 엄마가 깊은 데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아이에게 말을 건네 볼 기회조차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이에게 "너희 엄마가 정말로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니?" 하고 물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때 아이는 "아니에요." 하고 부정어가 나오게 되지요. 엄마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깊은 데 들어가지만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해서 일단 아이로부터 부정적인 대답을 이끌어 낸 후에 뱀이 여자를 미혹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깊은 데 들어가도 괜찮아 엄마가 괜히 그러신거야" 이런 식의 말로 아이를 계속 유혹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뱀은 자신이 한 가지씩 질문을 했을 때 여자가 어떤 식으로 반응이 오리라는 것까지 계산해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뱀이 또 한 가지 올무를 놓기 위해 한 말은 "하시더냐"입니다. 여러분이 창세기 2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준 것도 아담이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도 아담이지요. 이처럼 아담에게 하신 명령은 그가 다스리고 있던 에덴 동산의 모든 만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질서에 따라 정확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뱀은 이러한 질서를 깨는 듯한 말을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담인데 뱀은 여자에게 마치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냐"는 식으로 물어 오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질서라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뱀은 여자로 하여금 자신이 아담의 권세 아래 있는 존재임을 잠시 잊도록 하여 마치 아담과 동등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대로 변질시키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A라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여 계시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주변의 B라는 사람에게 말했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또 다른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서요?" 하며 더 자세한 내용을 듣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실대로라면 "아니요. 제가 직접 들은 것이 아니고 A라는 분이 교통하여 받으신 내용을 저는 단지 전해들은 것뿐입니다." 하고 대답을 해야겠지요.
그런데 질문을 해 오는 사람은 마치 B라는 사람이 직접 하나님과 교통해서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나눌 정도로 영적으로 깊이 들어간 분"이라 하며 B라는 사람을 높여 주는 것이지요. 이때 이 사람의 마음에 있던 교만함이 발동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로 자신이 직접 계시를 받은 것처럼 상대에게 말을 해 나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원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까지 자기의 생각 속에서 말을 가감하여 결국 진실을 왜곡시켜 버리고 말지요.
하와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너에게 직접 말씀하셨느냐?"는 식으로 여자를 아담과 같은 위치에 놓은 듯한 말을 하자 여자는 마치 자신이 직접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기라도 한 듯 자기 생각이 들어가서 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부러 질서를 깨뜨리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지켜야 할 선을 넘다보니 하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의 의미를 임의대로 변질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처럼 뱀이 처음부터 사단의 도구로써 그 음성에 귀 기울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뱀이 가지고 있던 간교한 성질이 오랜 세월 동안 사단의 역사를 받으면서 결국은 사단의 음성에 순종하는 도구로 변질되어 갔던 것이지요. 여자는 뱀의 이러한 변질됨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뱀이 교묘하게 놓은 말의 올무에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들을 통하여 사단이 얼마나 치밀하며 계획적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단은 여러분 안에 있는 비진리의 마음을 꿰뚫어서 각 사람의 약점을 노리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 사단의 시험에 들지 모르지요. 여러분이 쉽게 내뱉어 버리는 말 한마디가 사단의 송사를 받을 수도 있고 여러분이 조금씩 사단에게 내어 주는 마음이 나중에는 마음 전체를 사로잡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이어지는 2-3절을 보면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앞서 뱀의 질문에 대해 여자가 대답을 하고 있는 내용인데 이 대답을 통해 이미 우리는 여자가 처음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변질시키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여자는 뱀에게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하고 대답을 합니다. 사실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명심하고 있고 또 뱀의 미혹에도 전혀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이러한 대답 자체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뱀의 궤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면 굳이 이런 말 자체를 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쳤어야 했지요. 그럼에도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은 뱀에게 '나도 이 정도로 인정받고 있는 존재다'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자존심이 강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너는 이런 것도 못하니?" 하고 말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린아이는 자신이 못하는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나는 이런 것도 할 수 있고 저런 것도 할 수 있어요." 하며 먼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도 이와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으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예를 들어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굶주리신 예수님께 마귀가 나타나 "돌들로 떡을 만들어 보라"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지요. "내가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다마는" 이라든가, "나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을 네가 모르느냐" 등 굳이 예수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누군가 비진리의 대화를 걸어오면 맞장구를 쳐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히 끊어 버려야 하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를 호통치거나 무례하게 대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초신자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진리를 몰라서 그런 경우는 진리로 잘 가르쳐서 이끌어 주어야 하지요.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믿음 있는 사람이 그럴 경우에는 분명히 깨우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혹여 상대가 받지 못하여 오히려 서로간에 마음이 상하고 상대가 실족이라도 할 것 같으면 조용히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하겠지요. 다음 시간에는 여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언 4:23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말씀하셨으니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을 지키되 비진리에 대해서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해도 결코 무디어져서는 안 됩니다.
사단이 뱀을 조종하여 여자를 미혹해 내기까지 그리 세월이 짧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뱀은 사단의 도구로써 여자에게 접근하여 이런 저런 말들로 여자의 마음을 떠보며 미혹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여자도 뱀의 말에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를 않았지요.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되었지만 그렇다고 사단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마침내 여자는 뱀에게 빈틈을 보이고 말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여 비진리에 대해 철저히 경계해 오던 여자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단은 여러분의 마음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디어지기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여러분 안에 있는 비진리의 마음을 건드리지요. 여러분이 마음 안에 있는 비진리를 다 뽑아 내어 사단의 송사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을 때까지는 사단은 쉬지 않고 공략을 해 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단의 끈질긴 공략이 계속되다 보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마음이 무디어져 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가 변질되어 조금씩 타협해 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전에는 다니엘 철야 시간 전에 미리 나와서 준비하던 사람이 1, 2년쯤 지나고 나니 이제는 시작종이 "땡" 칠 때 맞추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1, 2년쯤 지나고 나면 아예 다니엘 철야가 시작하고 나서 오게 되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여러분 중에 대부분은 성결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아마 이전에 세상에서 즐기던 오락을 끊어가게 됩니다. 당장 끊지는 못한다 해도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 나가다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끊게 되지요. 믿음이 들어가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말씀대로 살게 되니 계명을 지키니 다 끊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끊었던 것을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시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드라마를 좋아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어 끊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다시 좋아하게 된다거나 세상 음악을 아예 끊었던 사람이 다시 세상 음악을 듣게 되는 경우 등 주 안에 들어와 버렸던 것을 다시 취하는 경우들이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경우들이 다 마음이 점차 무디어져 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새예루살렘을 소망하고 영을 사모하던 마음이 점차 식어지고 무디어져 가기 때문이고 그처럼 죄와 악을 버리고자 애쓰며 몸부림치던 마음이 무디어져 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런 모습이 계속되다 보면 바로 미지근한 신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죄와의 싸움도 멈추게 되고 새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가던 열심도 식어지지요.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모든 일에 적당히 하게 됩니다.
따라서 정녕 새예루살렘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내 마음이 혹여 예전보다 무디어져 있지는 않은가? 또 내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고, 새예루살렘을 더 소망하고 있는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예전보다 기도는 더 많이 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더 충성하고 있는지 1년 전보다 반년 전보다는 얼마나 더 많이 변화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스스로가 깨어 점검하며 날로 마음을 다져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고린도후서 4:16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말씀하신 대로 육은 날로 후패해지고 영은 날로 새로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7-12-27 오후 1:24:48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