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62)
서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성령의 기운으로 충만히 채워져 있는 사람, 즉 육의 기운을 벗고 신령한 영의 기운으로 채운 사람은 영안이 열려 영의 세계를 보기도 하고 영감 가운데 아버지의 마음과 뜻까지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근본 하나님께로부터 온 우리 사람의 영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령이었던 아담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할 수가 있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의 지식들을 가르침 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게 되면서부터는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기가 빠지면서 대신 들어온 세상의 육의 기운에 의해 영이 둘러싸이게 되니 영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과 같은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이처럼 깊이 잠든 영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론 /
1. 육의 기운을 빼내고 영의 기운을 채우는 과정
그렇다면 성령이 오셔서 영을 살리시기 전인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었을까요? 이때도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했는데 물론 사람의 마음 안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전에 창세기 강해를 통해 설명드린 대로 구약시대에는 성령이라 하지 않고 성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신약시대처럼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 안에 오셔서 역사하셨던 것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성신의 감동함 가운데 역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역대상 12:18을 보면 "때에 성신이 삼십 인의 두목 아마새에게 감동하시니 가로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하리니 원컨대 평강하소서 당신도 평강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강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했는데 바로 성신의 감동함을 입어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역대상 28:12에는 "또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 곧 여호와의 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식양을 주고" 했습니다. 즉 성신께서 여호와의 전과 주변 건물들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친히 가르쳐 주셨다는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에스겔 43:5에는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하여 성신 즉 성령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환상 중에 인도해 가셨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비록 영이 죽어있던 구약시대이지만 성신의 감동함 속에 교통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성령을 받음으로 죽었던 영이 살아나면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렸습니다. 그렇지만 영이 살아났다고 해서 당장 하나님과 밝히 교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깊이 잠들어 있던 영은 깨어났지만 영을 두텁게 감싸고 있던 육의 기운들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하기 때문에 바로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폭풍우가 심한 악천후 속에서는 무선 통신이 장애를 받아 잘 통할 수가 없는 것처럼 육의 기운들은 우리의 영과 영이신 하나님 사이에서 통신을 방해하는 폭풍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육의 기운으로 더 많이 채워져 있는 사람일수록 그만큼 하나님과도 교통하기가 더 어렵지만 신앙생활을 통해 열심히 육의 기운을 빼내고 생기로 채워나가게 되면 마치 통신을 방해하던 폭풍우가 거두어지면서 맑고 청명한 날씨로 변화되듯이 우리와 아버지 하나님과의 사이를 방해하던 육의 기운이 거두어지므로 아버지 하나님과도 점점 밝히 교통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밝히 받아 나가게 되는데 육의 기운을 50% 빼냈으면 50% 듣는 것이고 100% 빼냈으면 100% 듣는 것이지요.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요인이 바로 육신의 생각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 육의 기운을 다 벗은 사람이라 해도 때로는 육신의 생각 때문에 온전한 순종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것은 육신의 생각이 마치 통신을 하는데 있어서 잡음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전화를 할 때에 어떤 경우는 혼선이 생겨서 상대방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게 됩니다. 때로는 혼선에 의해 들려오는 목소리가 오히려 원래 통화하던 사람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경우도 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있어서도 육신의 생각이 틈타게 되면 마치 혼선이 된 것과 같아서 때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과는 전혀 다르게 듣기도 하고 때로는 약간씩 변질되어지기도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음성을 통해 "아"라고 하시는데 육신의 생각 때문에 그만 혼선이 생겨서 "야"로 잘못 알아듣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아니면 전혀 다르게 알아들을 수도 있구요. 그러니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순종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구요. 따라서 이러한 육신의 생각을 동원케 만드는 죄와 악의 속성을 빼내어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배운 모든 지식과 이론 상식까지도 무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10에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성령을 받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바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말씀한 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까지도 새롭게 할 때만이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을 보면 태어날 때부터 육의 기운을 받고 나오며 자라는 과정 속에서도 계속해서 육의 기운은 쌓여만 갑니다. 요한복음 3:6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말씀한 대로 사람이 성령을 받아 영이 살아나기 전까지는 결국 육은 계속해서 육만을 낳아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육의 기운은 더 채워져만 가게 되고 육은 육을 원하기 때문에 이처럼 육의 기운이 쌓여갈수록 육의 것을 더 취해 나가게 됩니다. 마치 마약이나 약물에 중독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또한 마약으로 인한 독이 몸 안에서 다 빠질 때까지는 몸에서 계속해서 마약을 원하듯이 육의 기운도 다 빼내어 버릴 때까지는 계속해서 육의 것을 원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 안에 육체적인 정욕이 남아 있으면 그것을 다 버리기까지는 정욕적인 것을 보고 듣고 취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영의 기운이 육의 기운보다 더 강할 때는 영으로서 육을 다스려나갈 수는 있지만 근본 육의 뿌리까지 재하여 버리기 전에는 결코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온전히 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육의 기운을 빼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여 중도에 다시금 세상으로 향하게 되면 그 동안 어렵게 빼낸 육의 기운들이 다시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처럼 육의 기운을 다 빼내고 영의 기운으로 채워나가는 과정이 결코 쉽거나 또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정한 마음을 가지고 마음 중심에서 순종해 나가는 사람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도 이룰 수가 있지요. 하지만 그런 경우라 해도 어차피 신앙생활 해 나가다 보면 육의 기운을 빼내고 하나님의 신령한 기운으로 채워 나가는 과정에서 치열한 영적인 싸움을 겪게 됩니다.
진리를 알기에 마음에서는 그렇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내 안에 육의 기운이 더 많이 있을 때는 육의 기운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지요. 그래서 결국 육의 모습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차 육의 기운을 빼내고 하나님의 신령한 기운, 즉 성령의 기운으로 채우게 되면 성령의 기운이 채워지는 만큼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며 진리 안에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 중에 육의 기운과 성령의 기운이 비슷하여 팽팽히 맞서는 시점이 되면 이때 두 기운사이에 가장 치열한 싸움이 있게 되지요.
그래서 로마서 7:22-24에 보면 사도 바울도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며 마음 안에서 육과 영의 치열한 싸움이 있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17에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 역시 육의 기운의 지배를 받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기운의 지배를 받는 성령의 소욕이 서로 거스려 싸우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 안에서 이처럼 두 기운이 팽팽이 맞서고 있을 때 여러분이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으면 성령의 기운이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육의 몸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비록 육적으로는 피곤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생기로 인해 충만하고 강건할 수가 있는 것처럼 마음 안에 영적인 싸움이 있을 때에도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게 되면 성령의 기운이 육의 기운을 누르고 승리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축구 경기를 하는 두 팀이 있는데 두 팀의 실력이 비슷하다고 할 때에 어느 팀의 사기가 더 충만하냐에 따라 경기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실력은 비슷하다 해도 사기가 더 충만할 때에 상대팀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육의 기운과 성령의 기운이 서로 비슷한 세력으로 맞서고 있다 해도 여러분이 성령이 충만해지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성령의 기운이 능히 승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입기 위해서는 당연히 기도해야 하지요. 기도하지 않으면 오히려 성령의 충만함은 떨어지고 대신 세상의 육의 것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육의 기운을 충만케 만들어 줍니다. 예를 들어, 기도해야 할 시간에 세상의 오락을 즐기거나 육의 것을 취하게 되면 그만큼 육의 기운에게 원군을 더해주는 것과 같지요. 이때는 오히려 육의 기운이 충만함을 입어 비진리의 육의 모습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도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여러분 안에 성령의 기운의 육의 기운보다 세력이 약하다 해도 기도하게 되면 그만큼 외부로부터 성령의 기운을 돕는 원군이 들어와 도와주는 것과 같기 때문에 신속히 육의 기운을 빼내고 변화될 수가 있지요. 그러나 반대로 설령 성령의 기운이 더 강하다 해도 계속해서 기도하지 않고 육의 것을 취하게 되면 이때는 육의 기운을 돕는 원군이 들어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예전에 육에 있던 모습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앞서 말씀드렸던 두 팀간의 축구 경기를 예로 들 수가 있지요. 두 팀간에 실력의 차이가 난다고 할 때에 실력이 약한 팀에서 외부로부터 실력 있는 사람을 스카웃 하여 왔다고 합시다. 비록 이때 여전히 전체적인 실력은 좀 뒤진다 해도 새로운 사람이 들어옴으로 팀의 분위기가 바뀌는 경우가 있지요. 사기도 더 충만해지고 서로간에 똘똘 뭉치게 됨으로 결과적으로 실력이 더 있는 팀을 이기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원래는 실력이 있다해도 사기가 잔뜩 떨어져 있는 데다가 선수들까지 서로 화합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실력이 있어도 지게 되지요.
육의 기운과 성령의 기운 사이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통해 위로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충만히 받아야만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성령의 기운과 연합해서 육의 기운들을 신속히 빼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육의 것을 차단하고 영의 것을 취하는 만큼 여러분 안에 채워져 있는 영의 기운이 원군을 얻어 육의 기운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여러분은 혹여라도 육의 기운에게 원군을 더해주는 것과 같은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영의 기운에게 원군을 더해 주어야 하지요. 무엇을 보아도 영의 것만을 보고, 들어도 영의 것만을 들으며 생각도 오직 영의 생각만을 하면서 애쓰고 힘쓰며 불같이 기도할 때에 여러분 안에서 육의 기운은 신속히 물러가고 영의 기운으로 충만케 채워질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육의 기운을 빼내게 되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마음에 있던 육의 기운 즉 비진리의 속성들이 먼저 빠져나가기 시작하는데 그러면서 몸에 있던 육의 기운도 함께 조금씩 나간다 했습니다. 물론 본격적으로 몸에 있는 육의 기운이 빠지는 것은 영으로 들어와야 하지만 여러분이 영으로 일구어 가는 만큼 조금씩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몸에 있는 육의 기운이란 우리가 입고 있는 육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운으로서 바로 몸에 필요한 힘을 공급해 주는 원동력입니다.
따라서 육의 기운이 빠지면 육적으로 볼 때에 몸은 힘이 빠지고 약해질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힘이 주어지고 강건해지지요. 그것은 바로 몸에 있던 육의 기운이 빠지고 대신 위로부터 오는 생기가 채워짐에 따라 우리의 몸이 새롭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몸을 유지해 주는 원동력이 더 이상 육의 기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공급된 생기로부터 오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생기가 채워진 만큼 육과는 상관없이 항상 충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며칠씩 잠을 못 잤다 해도 몸은 여전히 충만할 수가 있는 것이고 하루종일 애쓰고 힘쓰며 수고했다 해도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오면 바로 이러한 차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물론 영으로 들어오기 전이라 해도 여러분 중에 대부분은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 전보다 몸이 훨씬 강건해지신 것을 느낄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통해 육의 기운을 빼고 생기로 채운만큼 육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을 믿기 전에 아프던 것이 언제 치료되었는지도 모르게 깨끗함을 입은 경우도 많지요. 이것은 생기 바로 성령의 기운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도 담겨있기 때문에 이러한 성령의 기운이 채워지면서 주님을 믿기 전에 아프던 것을 치료한 것이고 연약한 것을 강건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통해 육의 기운을 빼내고 성령의 기운으로 채워나갈 때에 요한삼서 1:2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신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 영으로 온전히 들어오기 전에는 육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가 있지요. 또한 영으로 들어왔다 해도 이제 온 영을 이루어야 하는 과정이 있고 온 영을 이루었다 해도 더 깊은 차원의 영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영으로 깊이 들어오는 만큼 육을 더 온전히 지배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몸에 있던 육의 기운을 모두 빼내고 전체를 생기로 충만하게 채우게 되면 그때는 몸은 비록 육의 세계에 속해있다 해도 전혀 육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게 되지요. 그럴수록 여러분의 몸도 점차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 전보다 더 강건할 수 있고 육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이미 육의 기운으로 채워져 있는 상태이므로 육의 기운이 빠져야 영의 기운이 들어올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우리 몸은 오랜 시간동안 육의 기운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육의 기운이 빠지고 생기가 들어오게 되면 그 변화로 인해 오는 충격을 받게 되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고려하여 조금씩 육의 기운을 빼면서 생기로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2. 영의 기운인 생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곳
그렇다면 우리 몸의 어디를 통해서 육의 기운이 나가고 대신 영의 기운인 생기가 들어오는 것일까요? 바로 입과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욥기 27:3에는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하여 하나님의 기운이 코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지요. 이는 여러분 중에 임종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신 분이라면 더욱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는 대부분 긴 한숨을 내쉬면서 임종하게 됩니다. 이는 바로 몸에서 생명을 유지해 주던 모든 기운이 얼굴 부분으로 모아지면서 코와 입을 통해 빠져나가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마지막 숨과 함께 사람의 영혼도 빠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때도 기운이 빠져나간 입과 코를 통해 기운을 불어넣어 살리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말씀하고 있으며, 열왕기하 4:33-35에는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하고 눈을 뜨는지라"
또한 열왕기상 17:21에도 엘리야 선지자가 죽은 아이를 살리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이 때도 아이의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렸다는 것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기운을 불어넣었음을 알 수가 있었지요. 이밖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누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사도 바울이 그를 살리는 장면을 보면 사도행전 20:10에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엘리야 선지자, 엘리사 선지자가 죽은 아이를 살릴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 위에 엎드려 안았던 것을 볼 수가 있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말씀 자체가 창조의 역사를 나타내니까 말씀으로 명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43-44을 보면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명하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살리는 기운과 함께 영혼이 다시 몸 안에 들어올 때는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얼굴에 있는 코와 입을 통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좀더 보충해서 설명하고 여러분이 궁금해하시는 영의 분류에 대해서도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령님은 어떻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 동시에 거하실 수가 있으며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18:20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도 설명될 것입니다.
결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고기가 물을 떠나게 되면 얼마 살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람은 근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은 끊임없이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야만 살아날 수 있고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의 영 또한 영적인 기운을 공급받지 않고는 결코 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고 영이 살아났다 해도 여전히 육의 기운에 쌓여있게 되면 다시금 죽은 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우리의 영을 감싸고 있던 육의 기운을 빼내고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신령한 영의 기운을 끊임없이 공급받아 채워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 영이 날로 성장하여 에베소서 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말씀한 대로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충만히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은혜가 되고 능력이 되어 욥기 33:4에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말씀한 대로 오직 우리를 살리신 전능자의 기운인 생기로 날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7-12-27 오후 1:25:49 Updated